피에르 아도: 명상록 수업

명상록 수업 - 10점
피에르 아도 지음, 이세진 옮김/복복서가

서문
I. 철인 황제
II. 『명상록』 개괄
III. 정신 수련으로서의 『명상록』
IV. 철인 노예와 철인 황제 ━ 에픽테토스와 『명상록』
V. 에픽테토스의 스토아주의
VI. 『명상록』의 스토아주의 ━ 내면의 성채 혹은 동의의 규율
VII. 『명상록』의 스토아주의 ━ 욕망의 규율 혹은 운명애
VIII. 『명상록』의 스토아주의 ━ 행동의 규율 혹은 인간을 위한 행동
IX. 『명상록』의 스토아주의 ━ 덕과 기쁨
X. 『명상록』을 통해 본 아우렐리우스

결론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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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선, 현대 독자는 고대 저작이 오래전 처음 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一요즘 나오는 인쇄 출판물처럼—늘 같은 상태였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텍스트는 인쇄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을 잊으면 안된다. 수백 년간 몇 번이고 손으로 베껴 쓴 글, 필사의 오류가 끊임없이 일어났던 글이다. 

6 학자들은 비판적 방법으로 오류를 분류해 최대한 원문을 복원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텍스트는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7 마지막으로, 현대 독자는 (아무도 이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데) 고대 저자가 자신과 같은 지적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저자의 말을 자신과 동시대를 사는 작가의 말과 똑같이 대한다. 

8 고대 저작을 이해하려면 저작의 콘텍스트━사유, 수사학, 철학의 세계뿐만 아니라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까지 포함하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콘텍스트―안에 놓고 보아야 한다. 특히 문학적 구성의 메커니즘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고대에는 담론의 규칙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다. 저자는 하고싶은 말을 하더라도 특정한 방식, 전통적 모델 철학이나 수사학이 정해 놓은 규칙에 걸맞게 해야 했다. 가령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영혼의 자연스러운 토로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연습이다. 

8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하고자 했던 바를 알아내고, 이 책이 속하는 문학 장르를 상세히 설명하며, 무엇보다 이 책에 영감을 준 철학 체계와의 관계를 규정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철인 황제의 전기적 생애가 아니라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17 무엇보다 고대의 철학자는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철학 이론가가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고대 철학자는 철학하는 사람답게 사는 자, 철학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였다. 

18 철학자는 이론적인 철학 교육을 받은 자나 철학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향을 하고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양식을 공언하는 자였다. 

21 짧은 망토와 딱딱한 침상은 스토아주의자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22 고대인에게 헬라스의 '생활방식'은 그리스 문화와 문명 그것도 정신적 형태와 물리적 형태 모두를 의미했다. 여기에는 문학과 철학 담론뿐만 아니라 체육과 사회적 생활 방식까지 포함된다.

24 루스티쿠스가 공직자였음에도(그는 162년부터 168년까지 로마 총독을 지냈다) 철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고대에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키케로와 세네카도 공직자였지만 거리낌없이 스스로 철학선생이라 일컬었다. 

39 손상되기 쉬운 구현 재료에 구술 혹은 집필되고, 그후 필경사가 베껴쓰는 과정에서 왜곡되다가 인쇄술이 발명될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도서관 화재에서 운 좋게 소실되지 않고 쓸모없는 작품으로 치부되어 사장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명상록』은 위험천만한 여정을 거쳐왔다. 

43 바티칸 필사본에서도 황제의 이 글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발췌 필사본에는 가끔 ta kat' heauton이라고 달려 있는데, 이 말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글' '사적인 글' 정도로 번역된다. 초간본의 제목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글Eis heauton'이다. 

45 『명상록』은 아우렐리우스가 자기를 주제로 삼아 자기와 나누는 대화다.

56 세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첫째 황제는 자기를 위하여 글을 썼다 둘째, 그는 독자를 고려한 통일성 있는 저작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날그날 글을 썼다. 그래서 그의 글은 서판처럼 휴대하기 쉬운 매체에 쓴 개인적 메모hypomnema 상태로 있었다. 셋째 그는 자기 사유, 문장, 성찰을 문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려고 공을 들였다. 그 문장의 심리적 효과와 설득력은 표현의 완벽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58 사유의 상당수는 이와 같은 삶의 세 가지 규칙을, 혹은 그중 어느 하나를 다양한 형태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실천적 규칙은 전반적 태도, 세계관 내면의 근본적 선택을 나타낸다. 그 선택은 '담론'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에픽데토스를 본따서 도그마타dogmata라고 부르는 보편적 문장으로 표현된다. 도그마는 어떤 실천적 태도를 기초부터 다지고 정당화하는 보편적 원리로,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명제로 제시될 수 있다. 

59 도덕적 선 혹은 미덕만이 선이요, 도덕적 악 혹은 악덕만이 악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61 도그마를 자기에게 거듭 말하고 자기가 다시 보기 위해 쓰는 것, 이것이 '은신'이다.

108 에픽데토스가 철학을 가르치던 시기와 키티온의 제논이 아테네에서 스토아 학당을 연 시기 사이에는 약 4세기의 세월이 있다. 스토아주의에는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적 전통,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물론적'이고 자연학적인 전통, 메가라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적 전통이 융합되어있다. 스토아적인 삶의 선택은 소크라테스적인 삶의 선택과 이어져 있다. 모든 것이 종속되어야 할 유일한 가치는 도덕적 선, 즉 덕이다. 

314 『명상록』은 아마도 에픽데토스가 고안하고 발전시켰을 삼원 구조━체계라고도 하는━를 전체적으로 취하고 있다. 이 삼원 구조 혹은 체계에는 내적 필연성이 있다. 이 체계가 담아내는 것이 철학의 세 가지 수련 주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영혼의 세 가지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세 가지 수련 주제는 실재의 세 형태, 즉 운명, 이성적 존재의 공동체, 개인의 판단과 동의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재의 세 형태 또한 철학을 구성하는 체계의 세 부분에 해당하는 대상, 즉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에 각기 상응한다. 

324 기쁨은 행동의 완벽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할 때만 단지 의무감에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 이성적 존재로 이루어진 한 몸에 속해 있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때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

326 인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의 유일한 가치, 즉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정의와 진리와 절제와 용기보다 나은 것"(III, 6, 1)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가 즐거이 여겨야 할 선이다. 

328 고대 문헌, 특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해석에서는 두 가지 오류를 삼가야 한다. 두 오류는 완전히 상반되지만 똑같이 시대착오적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되 지금 이 시대에도 횡행하는 첫번째 오류는 저자가 작품에서 자기를 완전히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오류에서는 작품이 창작자의 이미지에 충실하고 창작자와 흡사하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유행하는 두번째 오류는 저자의 개념이 무효가 되었고 작품은 자율적으로 자체적 삶을 산다는 이유로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려 하지 않는 것이다. 

329 우리가 보았듯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도 그가 글로 작성한 정신 수련은 스토아주의 전통, 특히 에픽데토스가 정의한 모양새의 스토아주의가 규정한 것이었다. 초안, 주제, 논증, 이미지는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에게는 글을 구상하고 짓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자기 안에서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했다. 

374 1권은 어떤 면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크 루소처럼 다소 추잡하고 부끄러운 일을 털어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처럼 신과 인간에게 받은 바에 감사하는 행위라는 의미로 말이다. 

389 1권은 감사의 표현이자 고백 신의 작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정리한 결산표다. 그러한 작용은 그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현실의 영역, 즉 도덕적 가치와 덕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황제로 길러졌다든가 게르만족과 싸워 승리했음을 신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신의 섭리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철학적 삶으로 인도받았음을 감사할 따름이다. 

417 스토아주의 자연학 이론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스토아주의자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게 그들의 체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자를 정의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삶의 선택, 즉 오직 보편 이성의 법칙에 따라 사유하고 욕망하고 행동하겠다는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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