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책과 세계


책과 세계 - 10점
강유원 지음/살림


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2. 세계의 근본 문제 

3. 인간과 사회 

4.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 

5.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6.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7.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 

8.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9. 에필로그 





관련 공부 글 보기

강유원의 책과 세계 | 2004 | 0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세계의 근본문제

강유원의 책과 세계 | 2004 | 02 인간과 사회

강유원의 책과 세계 | 2004 | 03 매체,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강유원의 책과 세계 | 2004 | 04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3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 쪽 구석에 쌓아 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 다만 몹시 뒤엉켜 있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라는 시간과 지상이라고 하는 공간 속에 나타났던 텍스트를 탐구하려는 이 작업에서는 그 둘의 관계를 규율하는 어떤 법칙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차라리 컨텍스트의 산물일지도 모를 텍스트들 스스로가 말하게 하고,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컨텍스트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이러한 발언과 드러남을 위하여 선택된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어떤 일정한 기준에서 뽑아 올려진 것이 아니다. 임의로 골라낸 것이다. 그것들이 당대 인류의 생활 세계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어떻게 그 세계에 개입했는지를 흘낏 들여다보기는 하겠지만, 우리의 추체험(追體驗), 즉 ‘미루어 겪어봄’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어설픈 지침을 가지고, 텍스트들을 들춰 보기로 하자. 과거가 오늘이고, 오늘이 과거일지도 모르며 내일은 아예 없을 수도 있으며, 저 아래 어느 차원에는 부동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는 다만 통상적인 시간 순에 따를 것이다.


92 에필로그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이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 불가능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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