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린 언더힐: 대림절 묵상


대림절 묵상 - 10점
이블린 언더힐 지음, 크리스토퍼 L. 웨버 엮음, 김병준 외 옮김/비아


머리말 ㆍ7 

11월 27일 첫째 날 기다림의 여정 ㆍ11 

11월 28일 둘째 날 대림절의 정신 ㆍ14 

11월 29일 셋째 날 여정의 출발점에서 ㆍ17 

11월 30일 넷째 날 사도신경에 대하여 ㆍ20 

12월 1일 다섯째 날 문을 닫아라 ㆍ23 

12월 2일 여섯째 날 인내라는 기술 ㆍ26 

12월 3일 일곱째 날 겸손함과 온유함 ㆍ29 

12월 4일 여덟째 날 기도라는 수련 ㆍ32 

12월 5일 아홉째 날 기도라는 신비 ㆍ35 

12월 6일 열째 날 새로운 습관 ㆍ39 

12월 7일 열한째 날 영원의 관점 ㆍ4

12월 8일 열둘째 날 창조에 대하여 ㆍ46 

12월 9일 열셋째 날 창조의 목적 ㆍ50 

12월 10일 열넷째 날 일상의 중심 ㆍ54 

12월 11일 열다섯째 날 악의 문제에 대하여 ㆍ57 

12월 12일 열여섯째 날 세례의 의미 ㆍ60 

12월 13일 열일곱째 날 섭리의 신비 ㆍ64 

12월 14일 열여덟째 날 성도의 상통과 신비주의 ㆍ68 

12월 15일 열아홉째 날 기도라는 통로 ㆍ72 

12월 16일 스무째 날 기도의 핵심 ㆍ76 

12월 17일 스물한째 날 중심을 향하는 기도 ㆍ80 

12월 18일 스물둘째 날 존재한다는 것 ㆍ84 

12월 19일 스물셋째 날 기도의 삶 ㆍ88 

12월 20일 스물넷째 날 깊이 있는 기도 ㆍ92 

12월 21일 스물다섯째 날 관조에 대하여 ㆍ96 

12월 22일 스물여섯째 날 창조 안에서 사랑한다는 것 ㆍ100 

12월 23일 스물일곱째 날 사랑의 초월성 ㆍ104 

12월 24일 스물여덟째 날 사랑의 시선 ㆍ108 

12월 25일 스물아홉째 날 성육신 ㆍ111 

12월 26일 서른째 날 신비와 일상 ㆍ115 

12월 27일 서른한째 날 영적성장에 대하여 ㆍ119 

12월 28일 서른둘째 날 하느님과의 일치 ㆍ123 

12월 29일 서른셋째 날 거룩함에 대하여 ㆍ126 

12월 30일 서른넷째 날 가난 속의 풍요로움 ㆍ130 

12월 31일 서른다섯째 날 관조하는 삶 ㆍ134 

1월 1일 서른여섯째 날 성탄의 목적 ㆍ138 

1월 2일 서른일곱째 날 목자들과 동방박사 ㆍ141 

1월 3일 서른여덟째 날 복음서의 증언 ㆍ144 

1월 4일 서른아홉째 날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 ㆍ147 

1월 5일 마흔째 날 세상의 빛 ㆍ151 

1월 6일 마흔한째 날 새로운 탄생 ㆍ154 

원문출처 ㆍ159 

편저자의 글 ㆍ163





24 다섯째 날

문을 닫아라


  그리스도는 어지간한 일에는 좀처럼 상세히 조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묵상하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지침을 주셨습니다. 바르게 묵상하고 조용히 물러가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와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기 위한 핵심 조건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문을 닫아라" (마태 6:6)


  "문을 닫아라." 저 두 마디를 하시고, 저는 주님께서 미소 지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저 두 단어는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규정해줍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서는 요란한 시간을 가집니다. 하지만 그건 피정이 아닙니다. 진정한 피정과 주말종교행사의 결정적 차이는 문을 닫는 것에 있습니다.

"문을 닫아라." 이를 실천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을 닫으며 살짝 틈을 남겨둡니다. 그 틈으로 바깥 세계의 소음이 들어옵니다. 그 탓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걱정거리, 관심, 갈등, 기쁨과 슬픔이 떠오릅니다.

  그리스도는 단호하게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게서 완전히 벽을 치고 하느님과 단 둘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다른 소리들이 섞여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일상은 그렇게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지 않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삶의 일정 부분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골방으로 들어가면서 신문, 후원 중인 단체의 보고서, 결혼앨범, 편지 뭉치들까지 움켜쥐고 들어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문 밖에 내버려 두어야만 합니다.

  요지는 오직 하느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거나 자기를 찾는 여행 따위가 아니라 그분과의 일치, 즉 그 분의 생명과 사랑을 그분 안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보다 견실하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36 아홉째 날

기도라는 신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클래식 공연장에 가서 정작 공연은 듣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프로그램 책자를 주의 깊게 살핍니다. 책자에 담긴 내용도 신뢰합니다. 곧 연주될 음악이 무척 좋다며 감탄을 일삼기까지 하면서도 정작 음악이 울려 퍼질 때 그의 귀에 들리는 건 단 한 구절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기표현이 이 우주 안에서, 우리는 작게나마 일정 부분을 감당하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저 사람처럼, 하느님의 웅장한 교향곡이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관념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풍부한 경험은 저런 세계와 음악이 있음을, 우리가 그 음악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보편적인 충동에 이끌려 우리 자신 너머에 있는 능력을 구하고 그 권능에 호소합니다. 이때 우리는 높은 곳을 알아차립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사랑과 용기, 위대한 소명과 값진 희생, 인격적 변화의 원천인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기도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신비입니다.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는 끊임없이 기도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만, 여전히 기도는 삶에서 그 고유한 힘으로 우리를 움직입니다. 심지어 아주 조잡하고 순진해 보이는 기도조차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계 너머로부터 오는 힘은 때로는 터무니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모습으로 들어와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힘이 이 세계가 가진 일시적인 질서를 뒤흔듭니다. 종교적 부훙의 역사를 공부하며 공감했던 이는 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모습은 산 정산이 갑작스럽게 드러나는 광경과 같습니다. 동시에, 황량한 들판에서 벚꽃이 피어나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아름다운 협주곡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감각 너머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다가오듯, 하느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저 아름다움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시가 내포하는 고통 또한 의식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성숙한 이는 고통이 닥쳐올 때 유전이나 환경, 기회, 스스로 세운 계획, 우연을 탓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결정적인 만남도 있고, 예기치 않게 길이 열리는 순간도, 그 길이 닫히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게 이끄는 힘처럼, 인격적이고 살아 있으며, 자유롭게, 때로는 우리의 의도와 욕망에 반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활동합니다. 그 힘은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 되어야 할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냅니다.


43 열한째 날

영원의 관점


  이 세상에서 우리는 창조하시는 성령의 대리인입니다. 영적인 삶에서 진정한 진보란, 이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일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잡지를 넘기며 멋진 기계들의 사진을 감상할 게 아니라, 작업복을 입고 일해야 합니다. 진정한 영적인 삶은 수직적인 만큼 수평적이어야 하며, 점점 더 그 폭을 넓혀야 합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 삶과 세상에 대해 넓고, 보다 충만하고, 보다 풍요롭고, 보다 관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져야만 합니다. 집안일과 같은, 우리 삶의 실질적인 일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가 속한 생명의 아버지께서 우리 삶을 봉헌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작고 볼품없는 사업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대신 하느님의 영이 주관하시는 광대한 사건에 작게나마 참여하려는 갈망에서 나옵니다.

  이제, 온갖 것들이 뒤섞인 일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삶은 집과 일터, 지하철과 비행기, 신문과 영화, 라디오와 텔레비전, 이것들과 뒤엉킨 문제들, 주장들, 요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일상생활이 갖는 소박한 한계 안에서 어떻게 그분의 뜻에 협력할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삶에 대해 영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영적인 관점에 따라 매일 매일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입니다. 영적인 관점이란 사물이나 사람, 선택을 영원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들을 재료로 삼아 그 안에서 성령이 일하신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관점이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의무에 대한 우리의 행동방식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읽는 신문, 우리가 지지하는 운동을 결정하며, 우리가 뽑는 공지자, 사회적, 국제적 정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 세계와 멀리 떨어져 살아가거나 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 얻기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일에 협력하는 차원에서, 영적인 관점에 따라 실천하며 그분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성과 정치가 무관하다는 일반적인 관념은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저 관념을 참다운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하느님과 이 세계에 대한 어떤 신념이란, 곧 우리 삶의 영적, 도덕적 명령입니다. 우리는 제한적으로나마 우리 손에 놓인 세상의 한줌을 살아가며, 이 신념, 이 명령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해야 합니다.


64 마흔째 날

세상의 빛

  칠흑같이 어두운 밤, 누구나 멀리서 다가오는 희미한 빛을 따라 걸어간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빛은 창가에 놓은 촛불 정도에 불과한 작은 빛이라 할지라도 어둠 속에서 당신의 길을 이끌기에는 충분합니다. 꼭 그처럼, 동방박사가 천국을 찾기 위해 난해한 계산을 접고 병을 따른 뒤에 그들이 얻은 것은 엄청난 수학적 결과나 우주적 정신의 계시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가난한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성장할 작은 생명체, 인간 생명이 지닌 신비, 가장 불행한 상황 아래 태어난 작은 아기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현명했고, 겸손했습니다. 이 역설! 누가 보기에도 부유한 동방박사가 가난한 아이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 앞에 그들은 그 때까지 쌓아왔던 모든 지식과 진리를 향한 노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마음 아래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마치 몰약처럼 소중한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모든 삶은 각자의 모습을 따라 거룩해집니다.

  고귀함에 도달한 인간은 하느님의 방법이 지닌 말할 수 없이 신비한 단순함 앞에 자신을 스스로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두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영적인 것들만 밝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만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은 황소와 당나귀, 참새와 꽃들에까지 닿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무한을 바라보면서도 난해하지 않으며, 자연적 존재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종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마태 18:5)입니다.

  삶에 관해 지나치리만큼 영리해지는 것은 별다른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때에만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은 쾌락, 갈등, 야망, 갈망, 좌절,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덧없는 것들의 묶음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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