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만들어진 전통 - 10점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휴머니스트


- 한국어판 서문 

- 역자 서문 

[ 서장 ] 전통을 발명해내기 - 에릭 홉스봄 

[ 1장 ] 전통의 발명 :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전동 - 휴 트레버 로퍼 

[ 2장 ] 소멸에서 시선으로 : 낭만주의 시기 웨일스의 과거를 찾아서 - 프리스 모건 

[ 3장 ] 의례의 역사적 맥락과 그 의미 : 영국 군주정과 '전통의 발명'(1820-1977) - 데이비드 케너다인 

[ 4장 ] 빅토리아 시대 인도에서 권위의 표상 - 버나드 S. 콘 

[ 5장 ]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전통의 발명 - 테렌스 레인저 

[ 6장 ] 대량 생산되는 전통들 : 유럽, 1870~1914 - 에릭 홉스봄 

- 색인





- 역자 서문 

전통의 창조가 특히 국민국가 형성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것과 국가 및 민족을 둘러싼 거대 담론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전통의 창조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차이점들을 극복하고 '상상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공통분모를 형성해내는 데 기여한다. 여기서 왜 서로 다른, 때로는 반목하는 집단들이 자신들을 단일한 초월적인 민족적 소속감을 갖는 공동체로 믿게 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그 과정에서 '전통의 창조'와 '기억의 정치'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가 하는 역할을 분석할 필요성이 대두하는 것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많은 학자들이 현재 집단적 정체성, 특히 국민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전통이 그것에 작동하는 역할을 연구하고 있다. 베데닉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라는 개념을 유행시켰듯이, 이 책은 '전통의 창조'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 서장 ] 전통을 발명해내기 - 에릭 홉스봄 

20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용어는 광범위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확하지는 않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발명되고 구성되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전통들'은 물론이요, 그 기원을 쉽게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추정은 가능한 시기 - 대략 수년 사이 - 에 등장해 급속하게 확립된 '전통들'이 모두 포함된다. 


20 '만들어진 전통'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통산 공인된 규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의례나 상징적 성격을 갖는 일련의 관행들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들은 특정한 가치와 행위 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21 '전통'을 이른바 '전통적' 사회들을 지배하는 '관습(custom)'과 명백히 구별해야만 한다. 발명된 것까지를 포함하는 '전통들'의 목표와 특징은 공히 그 불변성에 있다.

  전통들이 준거하는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든 발명된 것이든 늘 반복되어 고착된 (보통 공식화된) 관행들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반면, 전통적 사회에서 '관습'은 추진기 역할을 하는 모터와 속도 조절 역할을 하는 플라이휠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갖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관습은 비록 사람들의 눈에 기존의 선례와 양립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동일시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제한을 받기는 하지만, 어느 한도 내의 혁신과 변화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22 무릇 '관습'은, 사회적 삶이 제아무리 '전통적'이라고 해도 고정불변일 수는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라도, 도무지 고정불변의 것으로 남을 수 없다. 관습법이나 보통법에는 실질적인 유연성과 선례에 대한 형식적인 집착이 동시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전통'과 '관습'의 차이도 바로 여기서 잘 드러난다. '관습'은 법관들이 하는 일이다. 그 반면에 '전통'(여기서는 만들어진 전통)은 법관들의 실질적인 행위를 감싸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머리장식이나 법복, 기타 공식적인 장식과 의례화된 관행들이다. '관습'이 쇠퇴하면 관습과 상습적으로 뒤얽혀있는 '전통'도 불가피하게 변화하게 마련이다.


23 '관습'과 '전통'의 차이에 비해 중요성이 떨어지는 하지만 구별해 두어야 할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전통'과, 그 자체 어떤 중요한 의례나 상징적 기능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부수적인 의미만 있을 뿐인 인습(convention)이나 관례(routine)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행은, 반복적으로 수행될 필요가 있는 한, 그 편의성과 효율성 때문에라도 일련의 인습과 관례를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23 산업혁명 이래 사회는 자연히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새로운 인습망과 관례의 망이 훌륭하게 작동해 습관이나 자동적인 일, 심지어 반사동작으로까지 변모하게 되면, 인습이나 관례는 일종의 고정불변의 것이 되어 부득이하게 다른 관행이 필요해질 때 뜻밖의 변칙적 불확실성에 대처할 능력을 저해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이 바로 일상화(rountinization)나 관료화(bureaucratization)의 잘 알려진 맹점이다. 이는 '하던 대로 하는게 제일'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하급 부서의 수준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런 인습망과 관례망은 '만들어진 전통들'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기능과 거기서 유래하는 정당화 양식이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25 전통을 발명해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가정하듯이 과거에 준거함을 특징으로 하면서, 다만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공식화되고 의례화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3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서로 중첩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첫째, 특정한 집단들, 실재하는 것이든 인위적인 것이든 공동체들의 사회 통합이나 소속감을 구축하거나 상징화하는 것들이다. 둘째, 제도, 지위, 권위관계를 구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들이다. 셋째, 그 주요 목표가 사회화나 혹은 신념, 가치제계, 행위규범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들이다.


35 낡은 관행과 만들어진 관행을 가르는 차이점 한 가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특정하고도 강한 구속력을 갖는 사회적 관행들이었던 반면에, 후자는 그것들이 주입하는 집단적 가치와 권리와 의무, 즉 '애국주의'  '충성' '사명'  '정정당당함'  '단결심' 등과 관련해 어지간히 불특정하고 모호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41 근대 민족과 그것에 수반되는 일체의 부속물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움의 정반대, 즉 아주 먼 고대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구성된 것의 정반대, 즉 너무도 자명해서 더 이상 정의할 필요도 없는 '자연적인' 인간 공동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 내적이든 역사 외적이든, '프랑스'와 '프랑스 인'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묻혀 있는 연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 누구든 이 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 바로 이 개념들 자체가 구성되거나 '발명된'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근대 '민족'을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 대부분이 그런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적합한 상징이나 혹은 알맞게 재단된 담론('민족사'와 같은)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민족적 현상은 '전통의 발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조사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전통의 발명에 대한 연구는 학제적이다. 그것은 역사가와 사회인류학자 그리고 기타 인문학 종사자들을 한데 묶어줄 뿐만 아니라, 그런 협력 없이는 적절하게 탐색될 수 없는 연구 영역이다. 본서는 주로 역사가의 연구 성과들을 묶어낸다. 다른 이들도 이런 작업이나 나름대로 쓸모 있는 것임을 알아주기 바랄 뿐이다.



[ 1장 ] 전통의 발명 :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전동 - 휴 트레버 로퍼 

50 독자적인 고지대 전통이 창출되고, 그러한 새로운 전통이 그 외형적인 표식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민족 전체에 부과된 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와서의 일이다. 그것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아일랜드에 대한 문화적 반란이 있었다. 아일랜드 문화를 찬탈하고 초기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다시 씀으로써 마침내 스코틀랜드 - 켈트 스코틀랜드 - 가 가 '모국'이고 아일랜드가 문화적 속국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고대적이고 독창적이며 특징적인 것으로 제시된 새로운 고지대 전통들이 인위적으로 창출되는 과정이 있었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전통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따로 갖고 있던 저지대 스코틀랜드, 즉 픽트 족과 색슨 족과 노르만 족으로 이루어진 동부 스코틀랜드에 소개되고 재차 적응되는 과정이 있었다.


60 킬트는 순전히 근대적인 복장이고, 그것을 최초로 고안하고 또 입은 사람은 잉글랜드 출신의 퀘이커 산업가였으며, 그가 이 옷을 고지대인들에게 만들어 준 것은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형, 그러니까 히스 황야로부터 공장으로서의 변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2장 ] 소멸에서 시선으로 : 낭만주의 시기 웨일스의 과거를 찾아서 - 프리스 모건 

194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해 왔던 웨일스는 정치적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웨일스 민중이 점차 그와 같은 국가를 갈망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문화적인 문제들과 과거의 회복 그리고 과거가 부재하는 곳에서 과거를 발명하는 일에 정도 이상으로 정력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정도의 발명이 필요할 만큼 과거의 생활방식은 쇠락하고 소멸했으며, 과거는 너무도 종종 찢겨져 나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낭만적인 신화학자들은 몇 가지 방식을 통해 웨일스적인 것이 황홀하고 매혹적일 정도로 진기해 보이도록 만드는 일에서 적잖이 성공을 거두었다. 고대적인 것들이 권위를 갖고 있는 한 이는 좋은 일이지만, 진보의 시대가 도래하자 곧장 나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웨일스다움'이 보존되고 미래로 전수된 것도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해 왔던 애국자들의 결정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96 웨일스에서 문화적 부활 및 신화 만들기 운동은 웨일스적인 생활의 위기, 그러니까 민족의 생명력 자체가 소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던 상황에서 싹튼 것이다. 웨일스의 과거는 폐막되고 종료되었으며, 웨일스 인들은 '기록의 서에서 지워졌으니' 분수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 웨일스 동포들이 자기들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면 소수 애국자들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 3장 ] 의례의 역사적 맥락과 그 의미 : 영국 군주정과 '전통의 발명'(1820-1977) - 데이비드 케너다인 

217 이러한 '두터운' 묘사를 염두에 두면, 영국 왕실 기념식에 대한 이미지에는 네 단계의 뚜렷한 발전 과정이 보인다. 첫째 시기는 1820년대부터 1870년대 이전까지는, 서툴게 진행된 의례가 압도적으로 지역적이고 농촌적이며 전(煎)산업화된 사회에서 거행되던 시기다. 둘째 시기는, 빅토리아 인도의 여제로 등극한 1877년부터 1차 대전의 발발까지로, 유럽 전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만들어진 전통'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과거의 의례들은 이전에는 부족했던 전문성과 호소력을 지니고 연출되었고, 새로운 의례들은 이러한 발전을 강조하도록 의도적으로 발명되었다. 그 후 1918년부터 195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에 이르는 기간은, 영국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은 언제나 의례를 잘 거행했다고 믿게 된 시기다. 이것은 대체로 왕실의례라는 분야에 있어서 영국의 경쟁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모두 군주정이라는 외피를 벗어 던져 영국만이 홀로 남았던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1953년 이래 영국이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여기에 텔레비전의 엄청난 위력이 결합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왕실의례가 갖는 '의미'는, 비록 새로운 시대의 윤곽은 아직 희미하게 인식되었지만, 다시 한 번 심대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222 이러한 상황에서 거창한 왕실 기념실들은 널리 공유되는 집단적인 행사였기는 커녕 다수의 계몽보다는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저 멀리 동떨어져 범접하기 어려운 집단 관례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224 빅토리아 초기 및 중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보의 지도자이자 문명의 선구자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입헌정부가 갖는 특성, 공식적 제국에 대한 초연함, 전시와 낭비와 기념식과 허식에 대한 혐오감을 자랑스레 여겼다. 그들은 권력에 대한 확신과 성공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으로 충천되어 구태여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253 화려한 마차를 타고 개선로를 통과하는 존경받는 군주는, 더 이상 그의 전임자들처럼 단순히 사회의 수반이 아니라, 이제는 국민의 수반으로 간주되었다. 유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산업 및 사회 관계에서의 전례 없는 발전과 황색 언론의 엄청난 증가로 인해, 새로운 방식인 모든 화려한 의례를 통해 국왕을 모두가 복종할 수 있는 합의와 연사적 연속성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가능해졌다. 게다가 국제 관계가 점차 경색되어 감에 따라, 기념식 경합으로 표현되고 승화된 민족적 경쟁으로서의 '전통의 발명' 더 한층 자극받았다.


291 '민족적 위신이 추락함에 따라 왕실을 고양시키려는 경향' 특히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왕실의례의 장엄함과 독특함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전후 영국에서 유별나게 두르러졌다.



[ 4장 ] 빅토리아 시대 인도에서 권위의 표상 - 버나드 S. 콘 

323 19세기 중반경 인도 식민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문화적인 면에서 영국적인 소수의 외래 지배집단과, 그들 영국인들이 효율적으로 통제한 2억 5,000만에 달하는 인도인들 사이의 뚜렷한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외래인들의 군사적 우월성은 1857년과 1858년에 북부 인도를 휩쓴, 인도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으로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 군사행동에 뒤이은 20년 동안에, 인도 사회집단들을 적절하게 규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영국 지배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특정한 이념과 가정들을 정당화하는 귄위이론이 집성되었다. 개념적인 견지에서 처음에 '아웃사이더'로서 군림한 영국인들은 1858년 8월 2일 인도 통치법을 통해 인도의 주권을 영국 군주정에 복속시킴으로써 '인사이더'가 되었다.


390 리튼과 그 협력자들의 의도와 의례의 집성 과정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판별하는 또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거의 배타적으로 영국식 권위의 구성과 그 표상들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러나 인도인들이 특히 민족운동 초기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통해 그들 자신의 공적인 정치적 용례를 발전시켰을 때, 그들은 어떤 용례를 사용했던가? 나는 그들이 실제 자신들의 전임, 곧 영국 지배자들이 채택했던 것과 똑같은 용례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 5장 ]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전통의 발명 - 테렌스 레인저 

416 유럽 인들은 아프리카의 사상과 행동을 변형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만들어진 전통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하나는, 몇몇 아프리카 인들이 식민지 아프리카의 지배계급의 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그런 아프리카 인들을 신-전ㅌ총주의적 방식으로 훈육하는 것이다. 두 번째 - 더 일반적인 경우-는,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데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들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노려 이를 활용하려는 시도였다.


421 대다수 유럽 인들이 아프리카 인들과의 관계에서 선호한 이미지는 가부장적 주인과 충직한 하인의 이미지였다. 이는 산업적 고용관계에도 쉽사리 옮아갈 수 있는 그런 이미지였다.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아프리카 인 피고용자들은 노동자로 규정되는 대신에 주인-하인 관계법을 통해 통제받고 훈련되었던 것이다.



[ 6장 ] 대량 생산되는 전통들 : 유럽, 1870~1914 - 에릭 홉스봄 

509 1860년대 후바부터 온건한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주요 정치 현안의 본질('왼쪽에는 더 이상 적이 없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공화국의 권력을 굳건하게 거머쥐자마자 문제 해결에 나섰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이와 관련해 전통의 발명이라는 견지에서, 특별히 의미심장한 세 가지의 주요한 혁신들이 있었다. 첫번째는, 혁명적•공화주의적 원리들의 색체가 가미되고 사제의 세속적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 교사들(instituteurs) - 그들이 대체로 빈곤했음을 고려하면 사제라기보다는 차라리 탁발 수도승의 세속적 등가물이라고 해야 더 알맞을 - 을 통해 진척된, 교회의 세속적 등가물이라고 할 만한 초등교육의 발전이었다.


510 두 번째는 공적 의례들의 발명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기원이 정확이 18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스티유 함락기념제다. [..] 일반적인 추세는 혁명의 유산이 국가 권력의 과시와 시민적 향응의 표현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510 세 번째는 이미 주목한 바 있는 공공 기념물들의 대량 생산이었다.


521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혁신들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둘다 새로운 체제가 건국되는 계기들로서, 가령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명백한 일화(바스티유 함락)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그 반면에 독일은 보불전쟁을 강조했다. 독일제국이 역사적 회고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했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혁명이라는 역사적 준거점을 제외하면 정도 이상으로 역사적 회고를 꺼렸다.


529 영광과 위대함, 부와 권력은 충성과 충성을 표현하는 의례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도 상징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요컨대 권력이 거대할수록 부르주아적 군주정이라는 대안은 그 매력이 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는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 프랑스와 스위스를 제외하면 - 유럽에서는 군주정이 보편적인 국가 형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58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예외로 하면 국제 스포츠에서는 아마추어리즘 - 다시 말해서 중간 계급 스포츠 - 이 지배적이었다. (...) 그런 만큼 외국과의 경기를 통해 이렇게 민족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살피는 시기에서만큼은 일차적으로 중간계급 현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559 가장 넓은 의미로의 중간계급들은 주체적인 집단적 일체성을 느끼는 데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559 중간계급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분리된 거주지에서 살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상한' 생활양식과 가치들, 또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하게 고수함으로써 스스로와 하위층을 분리시키는 것이 쉽다고 느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간계급들은 외부적 상징들을 통해 소속감을 확립하는 게 더 한층 쉽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적 상징들(애국주의나 제국주의)이 아마도 가장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560 분명한 것은 민족주의가 민족 교회, 왕가나 기타 통합적 전통들, 혹은 집단적 자기 표현, 새로운 세속 종교를 통해 사회 통합의 대용물이 되었다는 점이며, 나아가 그런 통합약식을 가장 필요로 했던 계급은 바로 성장하는 새로운 중간계급, 혹은 적어도 다른 형태의 통합력을 뚜렷이 결여했던 광범위한 중간대중이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정치적 전통들의 발명이 사회적인 전통들의 발명과 일치하게 된다.


561 우리가 살피는 시기에 '전통의 발명'에 존재하는 세 가지 국면들에 대해서는 짤막하게라도 결론 삼아 논평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내구성을 입증한 그 시대의 새로운 관행들과 그렇지 못한 관행들이 엄연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이다. 


564 두 번째 국면은, 국가나 '민족'처럼 계급을 가로지르는 더 광범위한 집합체들의 성원과는 구별되는 특정한 사회계급이나 계층과 동일시된 관행과 관련이 있다.


566 마지막 국면은 '발명'과 '자생적 확산', 계획과 성장 사이의 관계다. 이는 근대적 대중사회의 관찰자들을 끊임없이 당혹스럽게 만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 기능들이 있는데, 만일 그런 기능들이 없다면 아마도 '만들어진 전통들'은 나타나지도 않았거니와 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얼마만큼 조작될 수 있었는가? 조작을 위해 그런 전통들을 사용하고 실제 발명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정치에서든 그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에서든, 그러했던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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