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휘: 양반의 사생활


양반의 사생활 - 10점
하영휘 지음/푸른역사


목차

머리말 

조병덕은 누구인가? 

프롤로그 


1장 조병덕의 가계와 학맥 그리고 생애 

2장 일상공간으로서의 삼계리와 청석교 

3장 생계로서의 도덕경제 

4장 19세기 조선의 정치 그리고 사건들 

5장 왕래망 사회 

6장 변괴가 가득한 세상 


조병덕의 일생과 편지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하영휘: 양반의 사생활


22 조병덕 편지는 우선 그 양이 많다. 남아 있는 편지만으로 대략 계산해 봐도, 그는 6일에 한 번씩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삼계리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지만, 수신자 조장희는 과거공부와 과거시험을 위하여 서울에서 생활한 기간이 꽤 길었다. 아들이 서울에 머물 때도 그의 편지는 끊임없이 아들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보낸 편지 1,700여 통이 아들에게 쌓이게 되었다. 조선시대 개인의 편지가 이처럼 많이 발굴된 예는 아직 없다. 조선시대 편지는 문집이 간행된 인물의 경우에 극히 일부가 문집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최근 각 연구 기관에서 옛 편지를 정리한 자료집들을 출판하고 있으나, 양적으로 조병덕의 편지에 비교될 만한 편지는 없다. 게다가 아버지가 한 아들에게만 이렇게 많은 편지를 사례는 앞으로도 발견되기 어려울 것이다.

  동시에 조병덕의 편지는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의 편지를 읽어나가다 보면, 조선시대의 관혼상제, 과거, 종계, 가계생활, 음식, 농사, 생활도구, 교통, 통신, 탈것, 서적, 조면, 문방구, 부채, 역, 질병, 의약, 민간처방, 지방행정, 마을, 화폐, 고리대 등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242 조병덕은 노론 화족의 후손이었다. 그의 조상은 11세 조존성으로부터 17세 그의 증조부 조창규에 이르는 7대 동안 화려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조부 조진대, 부 조최순, 조병덕 3대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최순은 서울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낙향하여 살게 되었고, 조병덕에 이르면 경제적으로 몰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벼슬자리가 없이는 물가가 높은 서울에서 살 수 없어 낙남했고, 낙남해서 농사를 지었으나 농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없어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양반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쓰임새는 줄이지 못했다. 결국 토지를 팔아 씀으로써 조병덕은 경제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243 동시에 조병덕가는 분열된 모습도 보여주었다. 서울에서 백여 명의 식솔들이 함께 생활했고, 삼계리에 낙남한 후에도 어른만 21명인 대가족이 노비 80명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이제 뿔뿔이 흩어진 자제들은 조병덕의 아버지 제삿날에도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다. 


244 이러한 자신의 가家와 당堂의 모습을 조병덕은 '세상의 변괴'라고 했다. 이 변괴가 19세기 기호지방 양반가의 보편적 모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조병덕을 통하여 살펴본 19세기 조선사회는 더 이상 유교적 도덕이 실현되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병덕은 곳곳에서 강한 신분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신분의식은 그가 사용한 호칭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농사일을 하며 평범하게 사는 보통의 상민常民을 평민平民이라고 한 반면, 양반을 능멸하거나 투전이나 잡기를 하는 상민을 그는 상놈常漢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서얼이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양반을 지칭할 때는 이름 앞에 '소위所謂'라는 접두어를 붙였다. 또 그는 남포와 그 인근의 토착 양반들을 향족, 향품, 행배, 향곡잔반 등으로 멸시하며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양반, 서얼, 평민, 노비 등으로 신분이 구분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분수分數의 영역에 속했다. 거기다가 그는 도덕적인 잣대를 더하여 사람을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분수를 잘 타고 난 도덕적인 양반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분차별에 엄격했다.


248 양반이라는 신분만으로는 더 이상 평민을 억압할 수 없는 상황을 조병덕은 말하고 있다. 점차 허물어져가는 기존 질서를 끝까지 유지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조병덕도, 대세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그에게는 '세상의 변괴'였다.


249 그는 지방의 유림과 전혀 왕래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중앙의 정치력을 동원하여 사건을 해결했다. 그는 철저히 중앙지향적이었다. 

  교졸돌입사건 당시 충청감사 김응근은 김수항의 후손이었고, 남포현감 민변호는 민정중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조병덕과 함께 대표적인 노론 가문의 후손들이었다.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기 전, 노론의 담합이 공고하던 시절이었다면 애초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김응근과 민병호는 조병덕을 무시해버렸다. 더욱이 남포현감 민병호는 조병덕의 항의 편지를 고의로 받지 않고, 관가의 하인을 보내어 조병덕을 개유하게까지 했다. 조병덕과 그들 사이에 같은 노론이라는 동류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노론'이라는 당색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노론 세력이 공유하던 권력을 장동 김씨 일족이 세도정치를 통하여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조병덕에게는 변괴였다.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한 조병덕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경제생활에서 현실감이나 긴장감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무기렸했을 뿐이다.


250 돈에 쪼들려 편지마다 돈타령을 하면서도 오랑캐의 돈을 쓰기 싫어서 가려낸다는 말을 하고 있다. 쓰는 돈에까지 춘추대의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고서 농장인들 경영할 수 있었겠는가? 농지는 줄어들고 지출은 늘어났다. 그는 그 부족분을 선물과 증여로 메울 수 밖에 없었다. 수령으로 나가는 자제배는 예목전, 제주전, 요전을 비롯한 각종 명목전을 종계와 조병덕에게 바쳐야만 했다. 수령의 가렴주구를 비난하면서도 그는 자제배가 보내주는 선물과 증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251 조병덕은 지필묵 육촉, 부채, 역 등의 일용품을 누구 못지 않게 많이 사용했다. 이 일용품들의 조달 방법을 살펴보자. 종이는 사서 쓰기도 했으나, 주로 선물을 받았다. 붓은 선물로 받거나, 필공이 와서 공임을 받고 메었다. 조병덕이 쓴 진묵은 시장에서 구할 수 없어 선물에 의존했다. 육촉은 시장에서 산 적이 없고, 선물로 받거나 주로 만들어 썼다. 부채는 전적으로 선물에 의존했다. 역은 선물로 받았고, 시장에서 사기도 했다. 단, 시장에서 산 역은 선물보다 질이 떨어졌다.

  19세기 양반 유학자의 일용품은 대부분 선물에 의하여 조달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시장에서 구입한 것은 단 두 가지 종이와 역인데, 그것도 선물에 비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생활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선물, 이른바 '도덕경제'가 시장경제의 발달을 강력히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251 조선시대 양반의 삶은 공과 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학문, 벼슬살이, 사회생활은 공에 속했고, 가정생활은 사에 속했다. 그들의 공은 훤히 드러나 있었던 반면, 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에 늘 공을 앞세웠기에, 평소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공에 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감정까지도 공과 사로 구분하고 있었다. 혹 사적인 감정이 드러날 경우, 반드시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였다.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적으로' 슬펐고,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사적으로' 기뻤다.


252 조선 양반의 내밀한 편지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병덕의 편지만큼 발견된 예는 없다. 이 편지의 내용은 어떠한 자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조병덕의 문집이 있지만, 거기에는 집안의 갈등이나 빚에 쪼들리는 이야기는 없다. 편집과정에 사적인 부분은 모두 삭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집은 모두 학문적이고 사교적이며, 고매하고 점잖은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조병덕의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19세기 양반가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쫓아내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을 것이며, 19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밤낮 빚 걱정에 시달리는 모습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252 조병덕의 눈을 통하여 본 19세기 조선 사회가 암울하고 변괴로 가득한 사회였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조병덕이 그토록 지키려고 애쓴 '유교적 도덕이 실현되는 가부장적 사회'는 더 이상 연명할 힘도 존재할 필연성도 없었다. 역사의 흐름은 이미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조병덕의 반대편에 서서 19세기 조선 사회를 바라본다면, 조병덕이 '세상의 변괴'라고 한 갖가지 모습은 바로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새로운 몸짓에 다른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몸짓은 그 전 시대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음을 조병덕의 편지는 말해주고 있다. 바로 거기에 조병덕 편지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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