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2 - 약속된 장소에서


약속된 장소에서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문학동네


목차

머리말


인터뷰

가노 히로유키: 어쩌면 그것은 정말로 옴진리교가 했을지도 모른다

하무라 아키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맞춰 인생계획을 짰습니다.

데라하타 다몬: 나에게 존사는 의문을 최종적으로 풀어줄 사람이었습니다.

마스타니 하지메: 그것은 거의 인체실험에 가까웠죠

간다 미유키: 사실 저는 인생에 남자였어요

호소이 신이치: 그때 여기 남아 있다간 틀림없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쿠라 하루미: 아사하라 씨에게 성적인 관계를 강요당한 적이 있었어요.

다카하시 히데토시: 재판받는 아사하라의 언동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납니다.


가와이 하야오 씨와의 대담

'언더그라운드'와 관련하여

'악'을 품고 살아가다


후기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2 - 약속된 장소에서

머리말

9 1997년 3월(사건이 일어난지 정확히 이 년 후)에 나는 지하철 사린사건의 피해자 및 유족의 증언을 엮은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발표했다. 머리말에서도 밝혔지만, 애초에 그 책을 쓰기로 결실한 것은 지하철 사린사건의 일반피해자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이 너무나 적고 ― 게다가 세간에는 거의 똑같은 단면만을 다룬 정보로 발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는 절실히 그렇게 느겼다.


17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와 그들이 종교를 희구하는 행위 사이에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굉장히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가지 영위營爲의 뿌리가 완전히 같다고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유사성과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개인적으로 흥미가 끌린 이유도 그 점 때문이었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 갑갑함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도 그런 점 때문이었다.


18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일 년간에 걸쳐 [언더그라운드]를 취재한 사람으로서 지하철 사린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신자 당사자들(실행범 및 여러 형태로 그 사건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 지금도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 사건으로 피해를 입어 지금도 여러 가지 형태로 고통받는 분들을 실제로 만나보았고, 사랑하는 이의 생명을 영원히 빼앗긴 분들의 끝없는 고뇌를 실제로 접했다.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으며, 어떤 동기이든 어떤 사정이든 그런 범행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84 ― 종말이란 결국, 현재 여기 있는 시스템이 전부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리셋이죠.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에 대한 동경. 아마도 저는 그런 것을 그려봄으로써 카타르시스나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미야자키 쓰토무 사건에 관한 초등학생 인터뷰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거기에 "미야자키라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인간이 마지막에 다다를 곳을 알았기 때문에 뭘 해도 좋다고 생각한 거겠죠"라고 말을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아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싶었죠. '이런 세상은 오래가지 못해' 라고 마음속으로 느끼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아이들 중에요.


101 ― 데라하타 씨에게 존사 아사하라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한다미로 구루니 멘토니 해도, 신자 개개인이 가진 이미지는 조금씩 달랐겠죠.

저에게 존사는 정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예언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불교적인 가르침의 면에서 말하자면, 저의 의문을 최종적으로 풀어줄 사람이었습니다. 해석해준다는 뜻이죠. 불교라는 것은 제아무리 원전을 읽는다 한들 어디까지나 글자에 불과합니다. 혼자서 아무리 꼼꼼히 원전을 독파해도, 야호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멋대로 왜곡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럴게 아니라 올바른 수행을 통해 한 단계씩 정확하게 이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한 단계 올라가면 멈춰 서서 여러 가지를 재검증하고, 아, 나는 이 정도 걸어왔구나, 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의 반복이죠. 그리고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수행을 이끌어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수학 공부나 마찬가지죠. 어느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선생님이 하는 말을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이 공식을 익히고, 다음에는 이런 수식의 사용법을 익혀나가는 식이죠.


145 물론 열여섯 살에 교단에 들어가 순수 배양되었다고, '유괴나 세뇌' 같은 형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이런 사람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굳이 '현세'에서 부대끼며 절박하게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도 뼈를 깎는 진지함으로 임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있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네트워크가, 아사하라 쇼코가 이끄는 옴진리교 교단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네트워크가 우연하게도 거대한 악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결국 낙원 같은 건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217 ― 이사가키 섬이라는, 격리된 특수 상황에 놓였던 영향도 있었을까요?

으음, 그것뿐만은 아니고, 출가는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일이 없었어도 결국에는 이끌렸을 거예요.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결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아무래도 영향이 컸어요. 그냥 맡겨두면 되니까요. 지시가 내려오면 그 지시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그 지시는 해탈했다는 아사하라 씨한테서 온 것이니, 모든 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겠죠.


249 ― 다카하시 씨는 혹시 무라이가 '사린을 뿌려라'라고 명령했다면, 도망쳤을까요?

도망쳤을 거라 생각하지만, 도망치는 방법에도 상당한 요령이 필요하죠. 실행범들은 좀처럼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그리고 인해 허를 찔리는 방식으로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 무라이의 방으로 모두 불려갔는데 난데없이 "오늘 얘기는 실은..." 하고 말을 꺼내는 겁니다. 다짜고짜 처음부터 그렇게요. 그리고 "이건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야"라고 하죠. 마치 무슨 마법의 주문 같은 겁니다. 실행범으로는 그 당시 매우 진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자네들은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사명감에 호소하는 거죠. 더는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나서 명령을 내립니다. 귀의는 옴진리교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 이름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꿰어 맞춰집니다. 거기 당해버린 거죠.


가와이 하야오 씨와의 대담

'언더그라운드'와 관련하여

274 하루키: 저도 그런 걸 느꼈습니다. 자하철 사린사건, 옴진리교 사건을 좀처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악인가 아닌가'하는 정의를 내리기 힘들기 때문이죠. 사린을 뿌려서 많은 사람을 죽인 행위 하나만을 좁혀 말한다면 그것은 물론 악입니다. 논의의 여지가 없죠. 그런데 옴진리교의 교의를 따라 해석해보면, 그것이 어쩌면 절대적인 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논리도 세워집니다. 어디까지나 해석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 괴리 같은 게 있습니다. 그 괴리를 파고드는 것도 물론 매력적인 접근이겠지만,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 역시 위험할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풀어나가려면 결국 땅 위에 좀더 굳건히 발 디디고 있는 '본능적인 커먼센스' 같은 것이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합니다.


282 하야오: 일본일은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경향이 굉장히 강하니까요. 좀더 날카롭게 지적하자면, 옴진리교에 대한 세간의 적대감이 피해자에게로 향하는 겁니다. 피해자까지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해버리는 셈이죠. 옴진리교를 괘씸하게 여기는 생각이 '그런 걸로 뭘 아직까지 투덜거리느냐"며 피해자쪽으로 향해버리는 겁니다. 그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도 많을 겁니다.

하루키: 지진 재해 때도 그랬습니다. 맨 처음에는 흥분이 있고, 그것이 동정 비슷한 것으로 변하고, 그것도 지나면 "아직도 그 얘기야"라는 식으로 변해버리죠. 단계적으로.


'악'을 품고 살아가다

294 하루키: 대화를 나누다가도 종교적인 얘기가 나오면, 그들의 언어는 무척 편협해졌습니다. 대체 왜 일까, 이유가 뭘까, 저는 줄곧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결국 생각해냈는데, 우리는 세계의 구조를 지극히 본능적으로, 차이니즈 박스 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듯 합니다. 상자 안에 상자가 있고, 그 상자 안에 또다른 상자가 있고... 하는 식으로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한 겹 바깥에는, 혹은 한 겹 안쪽에는 또 하나의 다른 상자가 있을 거라고 잠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런 이해가 우리 세계에 형체를 부여하고 깊이를 주는 겁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배음(倍音, 하모닉스) 같은 것을 부여해주죠. 그런데 옴진리교 사람들은 입으로는 '다른 세계'를 희구하지만, 실제 그들의 세계의 성립 방식은 기묘하게 단일하고 평면적입니다. 어느 부분에서 전개가 멈춰버렸어요. 상자 하나의 분량밖에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96 하야오: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드는 건 대체로 '좋은 사람'이죠. 나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일을 저지르지 못해요. 나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대개는 선의를 가진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악의에 근거한 살인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 수는 헤아릴 수 있지만, 정의를 위한 살인은 어마어마한 대량살상이죠. 그렇게 때문에 좋은 일을 한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겁니다. 그리고 그 옴진리교 사람들 역시 여하튼 '좋은 일'에 사로 잡힌 사람들이니까요.


308 하루키: 공처럼 생긴 집합체라 바깥쪽은 부드럽지만, 조금 전에 말했듯이 중심점에 열이 집중되어버리죠. 그런데 바깥쪽에서는 그걸 알아채지 못해요.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바퀴벌레 한 마리도 안 죽이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을 죽입니까?" 라고.


321 하루키: 결국 시스템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좁은 의미의 명령을 집약적으로 부여하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시스템은, 크든 작든 자연히 만들어지게 마련이죠. 그것은 저에게 몹시 무서운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노하우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고착되는가, 그것이 수수께끼입니다. 그런 존재를 원하는 힘이 자연적으로, 혹은 지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후기

326 그러나 내가 옴진리교 신자와 옛 신자들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실감한 것은, '그 사람들은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문맥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이기 때문에 그쪽으로 쉽게 넘어간 게 아닐까'하는 점이었다.


327 문제는 거기에 중대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만주국의 경우, 그 무언가가 '올바르고 입체적인 역사 인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수준으로 언급하자면, 거기에 결여되어 있던 것은 '말과 행위의 동일성'이었다.


328 많은 이과 계열, 기술 계열 엘리트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버리고 옴진리교로 달려간 이유는 개인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던 것은 자기들이 몸에 익힌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좀더 깊이와 의미가 있는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대자본과 사회 시스템이라는 비인간적이고 공리적인 밀mill 속에서, 그런 자신들의 자질이나 노력이 ― 그리고 그들 자신의 존재 의미까지도 ― 허무하게 으깨지고 깎이는 것에 깊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하철 지요다 선에 사린을 뿌려 두 사람의 에이단 지하철 직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하야시 이쿠오도 분명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는 '환자를 생각하고 성실하고 우수한 외과의'로 주위의 높은 평가를 얻었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여러 모순과 결함을 품은 현행 의료제도에 차츰 깊은 불신감을 품게 되었고, 그 결과 옴진리교가 제시하는 실행력 있는 정신세계(티끌 하나 없는 강렬한 이상향)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330 그러나 사실 우리가 하야시 의사에게 해줘야 할 말은 원래는 굉장히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란 본래 혼란과 모순을 내포하고 성립하는 것이여, 혼란이나 모순을 배제해버리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견 정합적으로 들리는 말과 논리에 따라 교묘하게 현실의 일부를 배제했다고 믿어도, 그 배제된 현실은 반드시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당신에게 복수할 것이다"라고.


331 과연 어느 누가 '난 별볼일 없는 인간이니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서 소모되다 죽어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는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가는 의미를, 그리고 머지않아 죽어 사라져가는 의미를 가능하면 자기 손으로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답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특별히 비난받을 까닭이 없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치명적인 '단추 잘못 끼우기'가 시작된다. 현실의 상이 조금씩 왜곡되기 시작한다. 약속되었던 장소는, 퍼뜩 정신이 들고 보니 스트랜드가 시에서 읊었듯이 그곳에서는 "산은 더이상 산이 아니며, 태양은 더이상 태양이 아닌" 것이다.


332 그들은 매사를 좀더 성실하게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조금쯤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할 수 없어 약간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표현 수단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해 자존심과 열등감 사이를 격렬하게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위험성을 내포한 컬트 종교 사이에 가로놓인 한 장의 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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