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3 청일·러일전쟁 3


청일.러일전쟁 - 10점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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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철도와 일본

– 이나가키 만지로(稻垣滿次郞, 1861-1908), 東方策: 지정학적 관점에서 서술된 국제정치론

– 구가 가쓰난(陸羯南, 1857-1907): “메이지 24년(1891)은 실로 우리 동양 문제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대”(1894년의 언급)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의견들

1) 군사의견서(1888년 1월): 시베리아철도 계획 발표 3년후.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캐나다의 태평양철도, 시베리아철도

2) 외교정략론(1890년 3월):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이 곧 조선에서의 多事가 일어나는 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군비의견서(1893년 10월)

4) 군비확충의견서(1895년 4월 15일)

5) 북청사변 선후책(1900년 8월 20일)

6) 동양동맹론(1901년 4월 24일>

1),2),3): 일본의 적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선언 — 아시아에서 일본과 이익을 다투는 서구 열강들

4): '동양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 군비를 확충할 것을 촉구

5),6): 의화단 사건 이후의 대응책

– 영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과 새로운 조약 추진: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 항해조약' 조인 이후 1897년까지 새로운 조약 체결

– 군사조직 개편: 4개 鎭臺를 6개 진대로, 다시 연대, 사단으로 개편. 이로써 지역단위 부대에서 전략 단위로 움직이는 기동성 확보. 대륙침략을 염두에 둔 조직 개편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연설

1890(메이지 23)년 12월 6일 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 “국경인 ‘주권선’뿐만 아니라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인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빈(Wien)대학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의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바꾼 개념으로 소규모 국토방위 구상을 배제하고, 外征을 가능케 하는 규모의 군비확장 노선을 명확히 내세움. 北守南進論 성립




이번 주에는 시베리아철도와 일본이라는 주제와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서 생겨났던 주요한 전략적 개념 중 하나인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살펴보려고 한다. 시베리아철도와 일본은 참 흥미있는 주제이다. 이 주제는 지금 다루고 있는 이 책 이전에 몇 가지 주목할만한 의견들이 일본에서 나왔는데 이나가키 만지로라는 사람이 내놓은 동방책(東方策)이라는 것 있다. 동방정책이라는 말이다. 이 책은 지정학적인 시점에서 국제정치를 논한 책이다. 그 다음에 구가 가쓰난라는 사람이 쓴 것이 있는데 중요한 얘기가 "메이지 24년(1891)은 실로 우리 동양 문제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대다"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게 1891년이 시베리아 철도가 착공된 해이다. 


청일·러일전쟁 책을 보면 야마가타 아리토모라는 사람이 내놓은 의견서, 정략론들이 6개가 정리되어 있다. 이것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 47-48페이지에 걸쳐 있는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앞으로 계속 나오게 될 사람. 1890년에 수상이었고 그 전에는 1871년(메이지 4년)에는 군비의견서를 제출한다. 이 사람이 내놓은 여섯 가지 의견서나 정략론을 보면 1981년에 시베리아 철도가 착공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상응하는 일본의 군사정책들 또는 더 나아가서 동양의 정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나오고 있다. 먼저 1888년 1월에 내놓은 군사의견서를 보면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고, 캐나다에서 태평양철도가 부설되고 있고, 시베리아철도가 부설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서 철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다음에 1890년 3월 외교정략론에 다르면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이 곧 조선에서의 多事가 일어나는 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이익선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익선과 주권선이라는 말은 나중에 보충설명을 하겠지만 중요한 개념이다. 지금 현재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일본, 미국, 중국 이른바 주변 열강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들이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모두 주권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디를 확보해 두어야 이익을 지킬 수 있는 것인가, 이익선이라는 개념,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이 개념을 오스트리아의 학자 로렌초 폰 슈타인에게 배워서 온 것이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일본은 항상 주권선이 일본 열도고, 한반도를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선인 이익선의 초점으로 보는 외교정책을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0년에 내놓은 개념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다음에 1893년에 야마가타가 군비의견서를 내놓는다. 시베리아 철도 부설이 러시아가 침략을 가속화하기 위한 것이고, 그에 따라 동양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군비 의견서를 내놓는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1985년에 군비확충의견서, 1900년에 북청사변 선후책 이런 것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놓은 것이 1901년 동양동맹론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3년 전이다. 러시아가 만주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여순, 대련 등을 영구 점령하려고 한다는 것, 이것이 러일전쟁의 핵심적인 전투지역으로 떠오르는 지역이다. 벌써 시베리아철도가 부설되면서 일본에서 그것을 유념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여섯개, 군사의견서, 외교정략론, 군비의견서, 군비확충의견서, 북청사변 선후책, 동양동맹론을 다시 나누어 보면 첫째 군사의견서, 외교정략론, 군비의견서는 일본의 적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선언하고 있다는 것, 일본의 적국이라는 것은 동아시아에 일본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는 것. 막상 영국이나 프랑스나 전쟁이 나면 일본이 이길 힘은 없었다. 이익선의 초점이 조선에 있으니 조선을 둘러싼 이익 쟁탈전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주요한 상대국으로 떠오를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쟁의 승리였던 것은 아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러일전쟁의 승리가 일본에게 속된 말로 간땡이를 키워준 사건인데 러일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서 그게 아시아·태평양전쟁까지 가게 된다. 


군비확충의견서는 자신들이 '동양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북청사변 선후책, 동양동맹론은 의화단 사건(북청사변) 후의 대응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이 시베리아 철도의 진행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 당시 세계 정세를 보면 영국이 단연코 국제정세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고, 그것에 대응하는 상대가 러시아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 49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소제목을 보면 영국의 권익과 러시아의 진출로 되어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이 와중에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국가의 주권을 어떻게 지키고 이익은 어떻게 확충할 것인가가 주요한 관심사. 


47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구상을 일찍부터 경계하였고, 그 완성은 일본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인식을 지속적으로 확대시키고 있었다.

  1) 군사의견서(1888년 1월): 현재의 세계 정세를 생각해 보건대, 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해서 동양에 일대 파란이 일어나기까지 수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절박해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캐나다 태평양철도와 시베리아철도의 부설로 인해, 영국의 동양 항로가 단축되고 러시아 군대의 동방으로의 이동이 신속해지는 것이 그것이다.

  2) 외교정략론(1890년 3월): 우리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이 곧 조선에서의 多事가 일어나는 날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군비의견서(1893년 10월): 러시아가 침략을 대외정책으로 삼아 사대에게 틈만 있으면 곧 이에 편승하려 한다. (중량) 시베리아 철도의 부설도 이를 위한 것으로 공사의 진척은 실로 동양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4) 군비확충의견서(1895년 4월 15일): 현재 시베리아철도는 공사가 점차 진행되어 준공까지 수년을 앞둔 상황이 되었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 북청사변 선후책(1900년 8월 20일)

  6) 동양동맹론(1901년 4월 24일): 러시아가 만주를 노린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동양 철도의 부설, 여순 대련의 경영 등은 모두가 영구 점령을 염두에 둔 것이다.


48 시베리아 철도 계획이 발표된 지 3년 후에 최초의 지적이 있었고, 착공 전에 모두 두 차례에 걸쳐서 그 완공이 조선 등에 '다사'(전쟁을 말함)를 일으킬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①, ②). ③에서는 일본의 적국은 청이나 조선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라고 하였으며, 청일 전쟁 후인 ④에서는 '동양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한층 더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⑤, ⑥은 의화단 사건(북청사변) 후의 대응을 정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야마가타의 의견서에는 주요 정세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시베리아 철도의 진행 상황이 고려되어 있었다.


그래서 에노모토 외상은 에노모토 외상은 '시베리아 철도는 영국이 동양에서 보유 중인 특권을 박탈하는 무기'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영국이 동아시아 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이익을 박탈하기 위해서 러시아가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였고 그에 따라서 일본도 국가전력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 이 대립이 바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 거문도 점령사건이다. 


49 에노모토 외상은 '시베리아 철도는 영국이 동양에서 보유 중인 특권을 박탈하는 무기'라고 보았다.


시베리아 철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19세기 말 20세기초에 이르는 시베리아 철도는 유념해서 봐야 할 부분. 항상 한반도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주변에 있는 열강의 이익선에 쟁탈전이 벌어지는 주요한 초점이 되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가지 부수적으로 볼만한 것은 이 책 51페이지의 사진이다. 서베를린을 경유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배와 차(철도). 이를테면 자유이용권 같은 것. 사진 설명을 보면 1911년에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신바시-오사카-시모노세키-부산-하얼빈-리가-베를린 등을 연결하는 한 장짜리 표를 발매하게 된다. 1900년대 초에는 지금 현재 우리가 유럽을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방법으로 육로로 유럽을 갈 수 있었다는 것. 그것도 오사카에서 파리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 육로로 연결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화물이 가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경제적인 효과가 있다.



51 1911년에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신바시-오사카-시모노세키-부산-하얼빈-리가-베를린 등을 연결하는 한 장짜리 표를 발매하게 된다.


51 1893년 10월 19일 러시아 정부의 시베리아철도위원회는 시베리아철도의 완성으로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이 증대될 것에 주목하여, 중국과 일본에 대한 무역 확대 계획안을 만들어 위원회에 제출할 것을 장상에게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신문은 '시베리아 철도가 러시아 상공업의 중심지와 동아시아의 풍요로운 나라들을 접근시켜, 우리나라 상공업에 큰 공헌을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처럼 시베리아 철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주변 정세를 파악하면서 일본 내부에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작전을 세운 것. 그런 다음에 1894년 이후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주요한 열강의 두 각축세력이 되었고, 영국과 조약개정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때부터 1897년에 걸쳐서 구미각국과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일본이 대외적으로 맺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의미가 있다.


72 영국은 일본이 친영 정책을 전개한다고 판단하고 이번 기회에 매듭짓기로 하였다. 일본 정부도 타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양국의 타협은 성립하여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다.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890(메이지 23)년 12월 6일에 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밝힌 것이다. 이미 이때 일본은 군사조직을 개편해서 원래는 지역방어 위지로 군사조직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방식인 연대, 사단 즉 지역 단위에서 전략 단위 부대로 움직이는 기동적인 부대로 전환하고, 이것은 바로 대륙 침략을 위한 조직 개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야마가타 아리모토 수상가 제국의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경인 '주권선'뿐만 아니라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인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가령 오늘날 미합중국 같은 경우는 전세계가 이익선이다. 그래서 전세계에 항공모함을 띄우는 것. 그런데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이런 개념을 알게 된 것은 빈(Wien)대학의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에게서 배운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권세 강역이 주권선 개념이고, 이익 강역이 이익선 개념이다. 이것이 군비확충에 곧바로 연결된다. 이익선 보호라는 것은 자기네 나라 바깥이다. 곧 조선인데 그러려면 군사조직을 개편해야 한다. "소규모 국토방위군 구상을 배제하고, 외정을 가능케 하는 규모의 군비 확장 노선을 명확히 내세운" 것이다. 


78 1890(메이지 23)년 12월 6일 야마가타 아리모토 수상은 역사상 최초로 열린 제국의회에서 시정 방침 연설을 하였다. 15분 정도의 짤막한 연설로 추정되는데 '주권선' '이익선'이라는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경인 '주권선'뿐만 아니라 '주권선의 안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구역'인 '이익선'을 보호해야 한다. '예산에 반영시킨 것처럼 거대한 금액을 할애해서 육해군 경비에 충당'한 것은 바로 그러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두 개념은 1889년 6월, 빈(Wien)대학의 교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에게서 배운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78 민당이나 퇴역 장관 중 일부가 주장하던 소규모 국토방위군 구상을 배제하고, 외정을 가능케 하는 규모의 군비 확장 노선을 명확히 내세운 점에서, 야마가타의 연설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익선 개념에 긴밀하게 붙어있는 것이 북쪽을 지키고 남쪽으로 진출한다. 즉, 북수남진론이 함께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 이 주권선, 이익선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국가전략이 나오고 외부침략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청일전쟁으로 나아가게 된 전략적인 구상이다. 그래서 청일전쟁을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면 안된다. 


79 청일전쟁을 통해 '이익선'은 북쪽으로는 조선, 남쪽으로는 대만의 대안인 복건성으로까지 확대되어 두 개의 이익선을 갖게 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1895년 제국 일본은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이익선’ 개념을 명확히 채택하고,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나아간다. 그 전환점은 청일전쟁이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주권선, 이익선 개념을 가지고 외교전략을 세우는지는 모르겠다. 워낙 아시아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에 반세기가 넘도록 반성없이 지내왔기 때문에 이 개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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