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3 청일·러일전쟁 4


청일.러일전쟁 - 10점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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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제국 일본은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이익선’ 개념을 명확히 채택하고,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나아간다. 그 전환점은 청일전쟁이었다.”

– 청일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의 적극적인 침략의지가 일관된 계획 속에서 전개되고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일본의 ‘팽창주의’는 승인하되 적극적으로 준비된 침략임은 배제할 것인가.

– 청일전쟁의 이데올로기: ‘문명의 義戦’이라는 이데올로기, “전투와 살육을 정당화하는 의식 조작”


– 청일전쟁의 後果

1) 국제관계: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

2) 戰爭特需, 戰後經營 체제: 전쟁에 따른 호황이라는 말의 등장, 도시하층민의 삶에 까지 식민지의 경제구조가 편입됨, 군비확장을 최우선 순위로, 발판을 산업육성과 식민지 경영에 두며, 이를 위한 국가 재정을 총동원한다.

3) ‘國民’의 형성에 이어 ‘國語’의 이념 등장

4) ‘外地’의 탄생: 1920년대 말부터 사용되었으나 맹아적 형태로 등장. 2개의 시간축을 갖는 제국, “비뚤어진 더블스탠다드 국가”

5) 아시아 은 이용권 붕괴: 1897년 일본의 금본위제 채택, 세계경제로의 편입, 금융종속 강화

5) 서구의 불황극복 계기: 서구는 아시아의 긴장이라는 사태에서 불황극복의 계기를 발견,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 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 독일, 영국, 미합중국 등이 차례로 1874년의 불황을 극복




지난 주에 이익선, 주권선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책을 보면 79페이지에 이런 말이 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이익선'은 북쪽으로는 조선, 남쪽으로는 대만의 대안인 복건성으로까지 확대되어 두 개의 이익선을 갖게 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1895년 제국 일본은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이익선’ 개념을 명확히 채택하고,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나아간다. 그 전환점은 청일전쟁이었다." 전환점이 청일전쟁이고, 청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내놓은 전쟁논리/전략이 야마가타의 이익선 그리고 주권선 개념이다.

79 청일전쟁을 통해 '이익선'은 북쪽으로는 조선, 남쪽으로는 대만의 대안인 복건성으로까지 확대되어 두 개의 이익선을 갖게 되었다. 북진론과 남진론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1895년 제국 일본은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이익선’ 개념을 명확히 채택하고, 식민지 대만과 세력권 조선을 발판으로 이후의 50년 동안을 군사력 확대와 전쟁으로 나아간다. 그 전환점은 청일전쟁이었다.

그러면 이 청일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다. 이 청일전쟁으로부터 일본이 적극적인 침략의지가 일관된 계획 속에서 전개되고 실현되었다 라고 말하는 입장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팽창주의는 인정을 하되 적극적인 침략은 인정하지 어렵지 않나 하는 입장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대체로 보아 후자의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역자의 후기가 밝혀 주고 있다. 80페이지를 보면 "지금까지의 경과를 고려하면 일본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침투를 도모하지 않는 한, 청일 개전의 가능성은 낮았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도 청일전쟁을 놓고 어떻게 이것을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분분하다.
80 지금까지의 경과를 고려하면 일본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침투를 도모하지 않는 한, 청일 개전의 가능성은 낮았다.

만약에 적극적인 침략의지가 있고, 그것을 일관된 계획 속에서 전개시켰고 실현시켰다는 입장을 갖지 않는다면 일본의 개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의 논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인데, 우선 이토 히로부미의 파병 결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책에서는 국내 정치에 쫓기고 있던 이토 내각이 이것을 타개할 방책을 마련하는 형편이었는데, 다시 말해서 내부정치에서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천하의 인심을 집중시키는 국사로서 조선 문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본의 팽창주의는 승인은 하되 적극적인 침략임은 배제하려는 입장을 밀고 나가고자 한다면 이런 식으로 일본의 개전을 설명한다.
84 국내 정치에 쫓기고 있던 이토 내각은 이를 타개할 방책 마련에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의원에서는 제5의회의 해산을 '도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일'이라고 공격하는 내각 탄핵 상주안이 가결되어 있었다. 야마가타 후밀원 원장은 의회가 '망언과 폭언으로 더할 수 없는 본란을 일으켜서', 의회와 '국사를 논의하는 일은 도저히 바랄 수가 없다'고 이토에게 서간을 보냈다. 이에 '천하의 일심'을 집중시키는 '국사'로서 조선 문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것도 일견 논리적으로 설명이 맞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일본전시대본영을 설치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일본에서 청일전쟁을 할 때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야 하는데, 예전에 히틀러의 나치독일이 생활공간 얘기를 했다. 그런 것처럼 청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일본은 문명이고, 청나라는 야만세계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등장하고, 문명의 의로운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한다. 지난번 《막말•유신》을 얘기할 때 메이지유신에서 문명론이 나왔다고 말한바 있는데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자기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는 것. 전투와 살육을 정당화하는 의식조작이 있었고, 자기 견해와 다른 문화와의 충돌을 발생시키게 되는데 일본사람들이 처음으로 겪게 된다.

따라서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을 일본 근현대사에서 살펴볼 때는 구체적인 역사적인 내용으로는 먼저 전략으로서 주권선, 이익선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이토 내각의 파병결정이 어떤 요소들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는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문명의 의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런 다음에 청일전쟁을 개시를 했다. 거류민을 보호하고 여러가지 명분을 가지고 들어왔다. 더군다나 이때는 동학 이른바 농민의 난이 일어났다. 그래서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이 되어버렸다. 일본이 여단급의 군대를 파병을 했는데 머물러 있을 명분이 없어져버렸다. 그래서 이때 나타난 사건이 말하자면 1894년 경복궁 침령 사건이다. 그래서 나카츠카 아키라,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이 책이 그것만을 상세하게 다룬 책이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와 긴밀하게 붙어있는 부분이 많아서 다뤄볼 만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 책은 역사책을 어떻게 서술하는가, 일본에서 어떤 식으로 역사를 대해왔는가를 보는데 필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일본에서는 청일전쟁이 개전되면서 여단급의 군대를 파병했다. 그런데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던 것. "91 농민군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해산했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 4천 명을 계속 주둔시킬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졌다. 오토리 공사는 구미 제국 공사의 의혹과 압박 속에서 청국과 조선의 철병 요구를 받았다. 오토리 공사가 계속 파병 중지를 요청하자, 6월 13일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다. 정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본이 지속적인 전략을 갖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청일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서 일본의 적극적인 침략의지가 일관된 계획 속에서 전개되고 실현되었다라고 봐야 한다는 얘기가 등장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준비된 침략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무슨 일'인가를 할 것이 바로 경복궁 침범사건이다.
91 농민군은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해산했기 때문에 일본은 군사 4천 명을 계속 주둔시킬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졌다. 오토리 공사는 구미 제국 공사의 의혹과 압박 속에서 청국과 조선의 철병 요구를 받았다. 오토리 공사가 계속 파병 중지를 요청하자, 6월 13일 무쓰 외상은 '만약 무슨 일도 하지 않은 채 또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끝내 그곳에서 허무하게 귀국하게 된다면, 몹시 체면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책이 달성되지 못한 것'이라면서, 한성에 진출한 군대가 ‘무슨 일'인가를 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청일전쟁을 얘기할 때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합전쟁이라고 말한 것. 7월 23일도 대조선 전쟁이라고 봐야 한다. 네 개의 조그마한 전쟁을 묶여서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복잡전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7월 23일의 전쟁을 통해서 일본은 드디어 본격적인 청일전쟁이 시작된 것.

청일전쟁의 경과는 95페이지부터 얘기가 된다. 전쟁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황해에서 해전 이후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대만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청일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겠다. 첫째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청나라가 일본에 졌다. 청나라가 아시아에서도 약한 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폭로하게 되었다. 즉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로서 열강이 아시아를 다시 침략하게 되고, 19세기말 이후 아시아의 위기가 다가온다.
122 청일 전쟁은 청의 군사력이 약체라는 사실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아시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말았다. 이후 열강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재개한다. 식민지 대만을 확보함으로써 '대일본제국'으로서 아시아에 등장한 일본도 이들과 연동하면서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확대해 간다. 19세기 말 이후에 찾아온 아시아의 위기는 청일전쟁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일본사람들의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살기가 좋아졌다. 전쟁특수가 있었다. 전쟁에 따른 호황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떤 의식을 갖고 있던 간에 일본에서 평화를 옹호하고 평화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과 힘을 합해야 한다. 일본국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을지언정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평화를 옹호하는 사람이 많다. 국가는 항상 국가의 논리가 있어서 사람을 동원해서 사람을 죽인다. 생명체가 없는데 생명을 잡아먹는다. 국가라고 하는 것이 객체화된 실체가 되어서 사람을 잡아다가 잡아먹는다. 살아있는 국민의 살과 피를 먹는 괴물이다.

일본에서는 도시하층민의 삶에 까지 식민지의 경제구조가 편입된다, 도시하층민이면서도 다른 나라의 식민지 정세에 민감하게 된다. 식민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식민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제국 본국의 하층민들도 서로 상반된 의식이지만 그런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청일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의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된다.

세 번째로는 저널리즘에 의한 전쟁보도가 계속됨으로 해서 일본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제국 국민이다 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리고 사무라이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 다음 식민지가 생겨난다. 일본사람들은 외지外地라 부르는데 외지가 생겨나는데 내지와 외지의 두 개의 시간축을 갖는 제국이 된다. 특히 이때 대만이 식민지가 되었는데 본토/내지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이어지게 되고, 식민지는 여전히 식민지가 된다. 저자는 이때부터 "비뚤어진 더블스탠다드 국가"라는 말을 쓰게 된다. 1920년대 말부터 외지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개념이 형성되는 맹아는 이때부터 있었다. 그리고 국민이 형성되고 있었고 동시에 국어의 이념도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전후경영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산업이라고 하는 것도 군비확장을 우선으로 하는 산업육성이 된다. 그런 다음 1897년에 일본이 금본위제를 채택한다. 금본위제가 당시 세계 통화제도였다. 그렇게 해서 세계경제로의 편입되면서 금융에 있어서도 이른바 글로벌스탠다드로 나아간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
154 1897년에 [광일본문전] 전 2권을 간행했을 때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그 나라의 국어'라 한다고 설명함으로써, '국어' 용어와 개념을 선보였다. 청일전쟁이 가져온 '국민' 개념은 이념으로서 '국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156 국어와 국자 문제를 논의하는 국어조사위원회는 191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논의는 국어 교육과 신문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서 이윽고 1930년대에는 '대공아공영권어'를 추구하는 가운데 일본어 간이화론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는 서구여러나라들은 아시아에서 긴장상태가 계속되니까 자기네 나라들의 불황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 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라고 말을 한다. 이때부터 세계경제가 본격적으로 글로벌경제가 된다. 1873년 대불황이 있었으나 독일, 영국, 미합중국 등이 차례로 극복하고 호황국면으로 들어선다. 청일전쟁의 경과도 중요하지만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 내부에서 국제관계에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떤 결과들이 나타났는가를 알아두어야 한다.
164 아시아를 구미 기준의 금이용권, 즉 세계 경제에 편입시켰으며 금융적 종속도 강화시켰다. 아시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면서 '탈아입구'를 강제하는 금융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66 청일전쟁의 열매를 가장 잘 맛 본 것은 대영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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