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5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5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10점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1020_5

– ‘満蒙領有論’과 관련된 세 가지 전제

1) 시데하라 키주로(幣原喜重郞) 외교의 붕괴, 즉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라는 견해가 무너짐으로써 일본은 자력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두 개의 체제 사이에서 동요한 국민정부를 워싱턴 체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워싱턴 체제의 경제적 룰을 변용시켰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불간섭 정책을 취하는 시데하라 외교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2) 장작림을 통한 만주지배의 안정성.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퇴진함으로써 동삼성의 현지 정권을 통해 북만주를 개발하려는 노선이 무너졌다. “북벌군과의 전투를 위해 봉표를 남발하고 일본인 상공업자에게 타격을 입혔던 장작림 정권”을 배제하려는 시도가 등장

3) 총력전 시대의 전쟁 준비가 자국 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의 대두.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의 견해: “유럽식 국가 총동원형 총력전 준비는 일본의 경우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다…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해야 할 것’이며, ‘점령지’의 징세 물자 병기에 의해 출정군을 자활하도록 해야 한다.”

<국운 회전의 근본책인 만몽문제 해결안>(1929. 7. 5): “세계공황을 맞아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


– 국제연맹의 탈퇴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국민은 “속전속결로 중국을 타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 “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 이에 대응하는 논리가 고노에 내각의 ‘동아신질서(東亜新秩序)’ 성명(1938. 11. 3): “제국주의·식민지주의를 대신할 설명 형식의 필요성과 워싱턴체제적 협조주의의 부정이라는 모티브 사이에서 지식인에 의해 구상된 자기 설득의 논리”

– 이는 독일에 의해 제창된 ‘생활공간'(Lebensraum) 논리와 유사성을 갖는다.





1930년 일본은 처음에는 좀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침략에 열을 올리던 시기. 베르사이유 조약이 독일을 옥죄고 있었다면 워싱턴 체제가 일본을 구속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경제블록이다. 


지난번 만몽특수권익에 관해 이야기 했다. 이것을 둘러싸고 일본 내부에는 세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 육군의 입장은 옛날에는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둘째로 아리타 하치로의 입장이 있는데 "옛날에도 승인을 받은 적이 없었고 지금도 받은 상태가 아니다"라는 입장. 셋째로 요시자와 켄키치의 입장인데 "만주는 러일전쟁에 대한 보상"이라는 입장이다. 


일본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군사 엘리트들이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나아간 것이 출발점이다. 관동군 막료들이 만주와 몽고를 자기네들의 영토로 하겠다는 망몽영유론을 꿈꾸게 된 데에는 그때까지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체제를 안정시켜온 몇가지 전제조건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첫째로 시데히라 외교의 붕괴를 말한다. 즉,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었는데 이 견해가 무너졌다. 그러니까 관동군 막료들이 힘으로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그 다음이 장작링을 통한 망몽 지배의 안정성인데 이게 무너진 것. 그리고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면해야 할 전쟁 준비가 일본의 자원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등장했다. 그동안은 세 번째 견해만 가지고 설명을 해왔는데 저자를 통해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2 첫째로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며, 신4국 차관단 등에 의한 보증도 있으므로 누가 동삼성을 지배하든 누가 중국정부의 중심이 되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던 시데하라 외교이다.


82 두 번째로, 장작링을 통한 망몽 지배의 안정성이다.


83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면해야 할 전쟁 준비의 여러움이다.


상세하게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과 영국은 워싱턴 체제를 가동시키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경제봉쇄이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큰 범주에서 보면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경제적으로 압박이 가해지면 대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촉발원인만 기다리는 셈이다. 여기서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에 가는 과정에서도 워싱턴 체제를 통해서 미국과 영국은 중국 정부와 협조를 하게 되고, 그래서 시데하라 외교의 근간이었던 열강들과의 협조를 통해서 일본이 앞날을 지탱해 나간다는 전제조건이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일본은 자력으로 안전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 상황에서 "두 개의 체제 사이에서 동요한 국민정부를 워싱턴 체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워싱턴 체제의 경제적 룰을 변용시켰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불간섭 정책을 취하는 시데하라 외교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해서 강력한 경제적인 압박이 들어왔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98 두 개의 체제 사이에서 동요한 국민정부를 워싱턴 체제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워싱턴 체제의 경제적 룰을 변용시켰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불간섭 정책을 취하는 시데하라 외교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일본의 국제관계를 지탱하고 있던 핵심요인 중 하나였던 "장작링을 통한 망몽 지배의 안정성"이 무너지게 된다. "벌군과의 전투를 위해 봉표를 남발하고 일본인 상공업자에게 타격을 입혔던 장작림 정권, 남경의 국민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동삼성에서도 2.5%부가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장작림 정권에 대한 일본 측의 분노는 뿌리 깊었다."


112 벌군과의 전투를 위해 봉표를 남발하고 일본인 상공업자에게 타격을 입혔던 장작림 정권, 남경의 국민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동삼성에서도 2.5%부가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장작림 정권에 대한 일본 측의 분노는 뿌리 깊었다.


그리고 총력전 시대의 전쟁준비가 자국 내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 주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설명하는 중요 요소로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이시하라 칸지가 등장한다. 이시하라 칸지는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시하라는 "유럽식 국가 총동원형 총력전 준비는 일본의 경우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다, 러시아는 혁명 후의 권력 투쟁 중이며 아직 약체로서 북만주에서 물러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이 사람은 일단 전쟁을 벌여서 자원이 풍부한 땅을 빼앗고, 그 땅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생산해내면서 전쟁을 해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하며" "점령지의 징세 물자 병기에 의해 출정군을 자활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이 참 어이없지만 꽤 오래도록 유지되어 태평양전쟁에서도 이런 짓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시하라 칸지는 <국운 회전의 근본책인 만몽문제 해결안>이라는 것을 1929년 7월 5일에 제출하게 되는데, 여기서 "세계공황을 맞아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하게 된다. 핵심은 세계공항시기다. 그러니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하게 되면 지구전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을 국민에게 설득하게 되면 전쟁을 해 나갈 수 있다 라고 말하게 된다. 


120 유럽식 국가 총동원형 총력전 준비는 일본의 경우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다, 러시아는 혁명 후의 권력 투쟁 중이며 아직 약체로서 북만주에서 물러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두 가지에 이시하라 논리의 핵심이 있었다.


120 일본이 해야 할 전쟁은 나폴레옹의 영국전처럼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해야 할 것'이며, '점령지'의 징세 물자 병기에 의해 출정군을 자활하도록 해야 한다.


12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공황을 맞아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전쟁에 의해 전쟁을 양성하는 핵심적인 지역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만주와 몽고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은 워싱턴체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만주국을 건국하고 만주에 투자를 하고 전문가에 의한 만주경영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일본국민은 중일전쟁을 지지하게 된 것인데 이렇게 일본국민들이 중일전쟁을 지지하게 된 것은 우선 이시하라의 말빨이 먹혔다는 것, 즉 속전속결로 중국을 타도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전망이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쟁이 계속 이어지게 되고 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조작이 필요하게 된 시점. 그래서 이에 대응하는 논리가 바로 고노에 내각에서 나온 동아신질서 성명이다. 제국주의·식민지주의를 대신할 설명 형식의 필요했고, 또 워싱턴체제적 협조주의의 부정이라는 모티브 사이에서 지식인에 의해 구상된 자기 설득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 이는 유럽에서 히틀러가 내세운 논리와 비슷하다. 생활공간(Lebensraum) 논리와 유사성을 갖는다.


254 국민이 중일전쟁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타도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255 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리라.


255 그것에 대한 노고에 내각의 대답이 1938년 11월 3일의 '동아신질서' 성명이었다. 동아신질서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공공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 제국주의·식민지주의를 대신할 설명 형식의 필요성과 워싱턴 체제적 협조주의의 부정이라는 모티브 사이에서 지식인에 의해 구상된 자기 설들의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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