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2-2

 

2023.09.13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2-2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2강 플라톤의 미학

일시: 2023. 9. 13.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에로스를 찾아서》 88페이지를 보면 "플라톤에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다." 플라톤이 아름다움 자체라고 하는 것, 초월적인 것, 앞서서 초월적인 것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말했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것에 대해서 얘기할 때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일단 이것이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는 1번 방식이다. 이것을 철학 용어로 양상이라고 한다.  존재의 양상. 양상의 순 우리말로 하면 꼴이다. 어떤 사람은 양상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순 우리말로 철학 용어를 쓰자고 하면서 꼴이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상스러운 말 같아서 권하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꼴이라는 단어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경우에 쓰이는 경우는 없다. 안 좋게 쓰이는데 왜 고상한 철학에다가 왜 이런 말을 쓰는가. 영어로 mode, 라티움어로 modus로 덧붙여주면 된다. modus vivendi이라고 하면 삶의 양상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의 부제가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인데 삶의 방식이 modus vivendi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플라톤에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다. 플라톤은 그것이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향연》에서 이야기하는,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210e)이 그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사물들과 자신을 조금도 나누어 갖지 않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제이며, 그런 까닭에 얼핏이라도 이것을 보았다 해도 인간은 이 실재를 완전하여 재현할 수 없고, 이 실재를 본으로 삼아 모방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초월적인 것의 존재 양상이 어떠한 지를 물어본다. 우리의의 존재 양상은 어떠한가. 특수한 개인individual으로서 존재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낯간지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을 낯간지럽게 생각하면 영원히 철학으로 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단어가 우리 사유에 쌓여서 우리의 사유를 명료하게 해준다. 특수한 개인으로서 또는 독자적 개인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때 그걸 갖다가 개인이라고 한다. 그러면 초월적인 것의 존재 양상은 무엇인가. 거기서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라고 할 때 일단 현상 세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세계이다.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세계에 "분리되어서"라고 했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원래 초월적인 것은 현상 세계의 사물들로부터 등장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긴 한데 어느 정도 영역에 가면 분리되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것의 존재 양상의 1번은 현상과 분리되어서 존재한다.  현상과 분리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향연》에서 이야기하는,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존재 양상을 알게 되는 방법은 직관이다. 직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고도의 앎이 아니라 그냥 우연한 계기에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계기를 만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것은 과학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떠한 놀라운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사물들과 자신을 조금도 나누어 갖지 않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제"이다. 지금 거기 조금 더 나누어 갖지 않는, 즉 분유이다.  존재 양상의 두 번째는 분유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존재양상은 완전히 분리되어서 존재하기도 하고 나누어 갖기도 한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엑기스가 여기에 살짝살짝 섞여 들어가기도 한다는 말이다. 나눠 갖는다는 것은 반드시 초월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인가. 항상 현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갖고 오는지 물어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제 플라톤이 옹색하게 나누어 갖기도 한다고 땜빵 이론을 갖다 내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아주 복잡한 논의가 많은데 이건 《철학 고전 강의》를 참조하면 된다. 그런데 아무리 나누어 갖고 있다고 해도 이것은 이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다. 완전한 것이니까 결국 나누어 갖는다 해도 그것의 진짜배기는 아니다. 그러니 결국 이 초월적인 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우리의 감각적인 세계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배끼기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즉 미메시스가 된다. 아름다움을 현실 세계에서 감각 세계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미메시스다.   

"모든 형상形相(eidos)은 각각이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하나라는 것은 이제 불변의 것이다라는 것이다, "여러 행위 및 물체와의 결합(교합, 관여: koinōnia)에 의해서", koinōnia는 영어로 말하면 community와 같은 것으로 공동의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 상호 간의 결합에 의해서 어디에나 나타남으로써, 그 각각이 여럿으로 보이네." "형상은 현상과 분리되어 있으나 현상에 관여하고 물체와 결합하여 물체에 내재되기도 한다." 그러면 관여라는 말이 그 앞에 나온다. 교합, 관여, 결합, 그렇다면 분유라는 말도 교합, 관여, 결합에 해당하겠다. 나눠 갖는다, 나눔을 갖는다.  그러면 플라톤에 있어서 초월적 미의 존재 양상은 현상과 분리되어 존재하기도 하고 현상과 분유하기도 하는데 분유라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교합, 관여, 결합 이렇게 된다. 이게 바로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는 것에 가장 core knowledge에 해당하는 것으로 외워야 한다. 플라톤은 자꾸 가까이 가서 접촉해야 이것에 관여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나쁜 데 쓰는 말이지만 동양 미학에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방을 하려면 일단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이라도 해야 한다. 자꾸 그것을 본받아서 뭘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모든 형상形相(eidos)"은 "각각이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여러 행위 및 물체와의 결합(교합, 관여: koinōnia)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 상호 간의 결합에 의해서 어디에나 나타남으로써, 그 각각이 여럿으로 보이네"(《국가》, 476a). 형상은 현상과 분리되어 있으나 현상에 관여하고 물체와 결합하여 물체에 내재되기도 한다. 


89페이지를 보면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思考(마음상태: dianoia)는 '아름다움(아름다운 것) 자체'(auto to katon)의 본성(physis)을 [알아]볼(idein) 수도 반길 수도 없을 걸세."  지금 거기서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향연》을 가지고 하겠지만, 내면의 사고 상태 dianoia를 가지고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알아보거나 반기려면 일단 듣기도 좋아하고 구경도 좋아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일단 그건 배제한다. ebook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닿는 물건이 아니다.  ebook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뇌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감각 영역의 어딘가에 들어오고 있다.  책은 우리 인류가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서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심지어 냄새도 맡아보는 과정을 통해서, 이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물리체body를 통해서 책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된다. 플라톤은 지금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얘기하면서 그걸 완전히 배제할 것을 얘기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이런 걸 읽을 때는 이 사람이 자기의 이론적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뭔가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도 꼭 고려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향연》에서는 일단 물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라고 나온다. 《향연》에 나오는 에로스의 사다리가 가장 정교한 이론이고 가장 포괄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감수성이 민감하고 자신이 뭔가 정신적으로 허기지고 그럴 때는 미술관을 가서 감상을 해야 한다.  그게 안 된 상태로 이게 감성적인 것이 굳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저는 항상 물체가 있는 책,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는 어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늘 얘기한다.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어떤 물체적인 것들이 우리 인간의 진화 과정 속에서 우리의 감각을 구성하고 그렇게 구성된 감각들이 초감각적인 것,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 낸다. 그럴 때는 감각이 아니라 이제 어떤 지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지향성이 없는 사회 그런 지향성이 없는 사회는 굉장히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사회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思考(마음상태: dianoia)는 '아름다움(아름다운 것) 자체'(auto to katon)의 본성(physis)을 [알아]볼(idein) 수도 반길 수도 없을 걸세(《국가》, 476b). 

 

플라톤은 《필레보스》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호메로스를 읽는 것들을 그만하고 고상함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플라톤 시대에는 소포클래스의 비극이나 이런 걸 보지 말라는 얘기겠다.  그러니까 고상함에 대해서 자기가 자꾸 고상함을 가까이하고 자기의 몸과 자기의 정신을 보상함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고상함과 결합되고 관여하고 교합하고 모방을 해야 그게 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는 그 고상함 자체를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이라도 알게 되지 않겠나. 그런 사람을 에로티코스erōtikos라고 한다. 그러면 이것은 그냥 미술책 좀 들여다보고 미술관 구경 가고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존재 양상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시간에 말한 것처럼 미감적 생을 산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명품 가방을 산다고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삶을 전면적으로 고상함과 고귀함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그다음에 90페이지 보자. "그가 이를 아는 방식은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 《향연》에서 논의된다.  특히 '디오티마의 사다리'라 불리는 부분(209e~212a)은 에로스의 상승하는 힘과 각 단계를 에로스가 산출하는 것들에 대응시키면서 상세한 서술을 제시한다." 다음 시간에 《향연》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하겠다. 플라톤의 미학은 초월적인 것이다 그다음에 그 초월적인 아름다움은 현상과 분리해서 있기도 하지만 현상 세계와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서로 분유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경우에는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그것에 관여하고 그것과 결합되기도 하고 그것과 교합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에로티코스erōtikos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런 것들을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더럽고 치사한 것도 봐야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 자체를 항상 아름다움 자체를 향하도록 방향을 딱 맞춰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그가 이를 아는 방식은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 《향연》에서 논의된다.  특히 '디오티마의 사다리'라 불리는 부분(209e~212a)은 에로스의 상승하는 힘과 각 단계를 에로스가 산출하는 것들에 대응시키면서 상세한 서술을 제시한다.  


본문 6페이지를 보자. "소동파은 노래를 노래하였다. 계수나무 노아 목란 상앗대로 투명한 강물을 치며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아득히 멀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 그럼 소동파는 노래를 노래하였다 라는 것에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게 적벽부의 한 구절이다. 이 적벽부의 한 구절인 "계수나무 노아 목란 상앗대"는 아주 오래된 초나라의 무속 샤만들이 점칠 때 사용하던 것들이다. 뒤에 주해 3번을 보면 설명이 있다.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는 초 지역의 무격巫覡이 하늘에 기도할 때 사용하던 나무로 만든 것들이다. 이 나무들은 신목神木인 것이다." 소동파는 일반적으로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소동파였다고 하는데 소동파라고 하는 사람은 유교 유학자이기도 하지만 도가에도 조예가 깊었고 스님들하고도 교류가 있던 사람이다. 소동파의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 하늘 한 구석이 미인을 바라본다. 저는 여기서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라는 것이 적벽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을 이 챕터의 제목으로 삼았다.    

《에로스를 찾아서》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소동파은 노래를 노래하였다. 
"계수나무 노아 목란 상앗대로 투명한 강물을 
치며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아득히 멀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

 

그다음에 소동파와 손님이 주고받은 얘기는 시경과 서경의 구절들이다. 즉 예로부터 불리던 노래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적벽부는 동파 자신의 창작이 아니다. 시경과 서경에 있던 얘기들을 가져다가 말하자면 리바이벌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동파의 적벽부는 인류 역사에서 명시를 100개만 골라봐라 하면 그 안에 반드시 들어갈 그런 시이다.  그건 표절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아는 구절을 가져다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재구성해가지고 제시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은 위대한 작품인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참주 오이디푸스도 그냥 원래부터 있던 옛날 신화이다. 신화를 재창작한 것이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창밖, 빗물 다 있던 얘기이다. 그것을 갖다가 그 가수가 불러서 새로운 센티멘트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일회적 현존이라고 하는 아우라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순간 그것을 할 때 센티멘트가 나온다. 그러니까 아우라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을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 적절한 순간에 있던 것을 재조합해서 딱 집어넣으면서 아우라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소동파가 얘기하고 있는 적벽부라고 하는 것이 시경과 서경 이런 것들이고 그다음에 옛날의 전장, 수많은 생명들이 소멸된 것이고 그런 것이 강물과 적벽은 자연물이고, 그 위에 떠다니는 배와 술잔은 인공물인데, 놀이를 하면서 자연물과 인공물을 무형의 시로 만들어낸다. 그 부분이 포인트이다.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인공물만이 아닌 자연물도 찬미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자연물과 인공물을 놀이를 통해서 시로 만들어내는데, 그 놀이라고 하는 개념은 주해 2번을 보면 되는데, 바로 그 놀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넓은 의미로 말하는 창작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영재학교를 다니고 과학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가서는 창조자가 될 수는 없다. 놀이를 안 해봤으니까 그렇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자기 혼자 꿈지럭 꿈지럭거리면서 놀아본 사람이 창조자가 되는 것이고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강물과 적벽은 자연물이고, 그 위에 떠다니는 배와 술잔은 인공물이다. 그들과 그것들은 놀이를 하면서 자연물과 인공물을 무형의 시로 만들어낸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면 "그 미인은 하늘 한구석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미인은 없는가" 이 세 개의 물음이 있다. 하늘 한 구석에 있지 않은 건 분명하다. 미인이 저 하늘에 떠 있을 리가 있나 그건 귀신이다. 마음속에 있는 건 주관적 심상 이미지일 뿐인데 소동파가 어디선가 봤어야 될 거 아닌가. 미인도라도 보고 왔어야 될 거 아닌가. 그러면 이 소동파가 말하는 미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플라톤이 말한 것과 같은 하나의 자기가 보았던 아름다움이라고 여겨진 것들을 다 모아서 하나 메타포를 만들어서 가지고 있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것이 저기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소동파가 사기치는 것이다. 자기가 수없이 많은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 뭔가 메타포를 만들어서 에이도스를 만든 건데, 그게 마음속에 있는 것인데 저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객관적으로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소동파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인데 그게 객관적으로 있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적벽 아래에 가서 배를 띄우고 손님과 더불어 술을 마셔야만 하겠는가.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일회적 현존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겠는가를 한번 물어봐야 되겠다. 

《에로스를 찾아서》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미인, 동파와 손님이 바라보는 미인, 그 미인은 하늘 한구석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미인은 없는가. 


그러니까 첫 번째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는 《에로스를 찾아서》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아름다움이라는 게 어디 있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0페이지를 보면 "동파를 읽고 있는데, 동파에게 떠올랐던 초나라의 주술사가 나타나고, 좁은 방에 물이 흘러 들어 적벽 아래 강물이 된다. 그러면서 가볼 일도 없을 장강長江이남의 땅들을 상상한다. 마음 가는 대로 붙잡는다. 우리 안에서 심상心象이 생겨나는 대로 곧바로 시상詩想과 영상影像이 된다. 여러분들 그 상자 돌림 글자가 단어가 3개나 있죠 심상이 생겨난다." '상'자 돌림 단어가 3개나 있다. 심상心象이 생겨난다는 것은 마음에서 어떤 statue가 생겨나는 것이다.  상象 옆에 사람 인변 亻가 없다. 그건 실체가 있는 걸 가리킬 때 쓰는 한자이다. 그건 마음에서 생겨난 statue이다. 이건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이다. 속에 응어리진 게 있어, 맺힌 게 있어 하는 것이 심상이다. 그래서 저는 image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image라는 말을 써버리면 헛것처럼 여겨지니까 그렇다. 맺힌 게 있고, 열받은 거 있다. 그게 심상이다. 소동파를 읽으면 그게 느껴져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곧바로 시상詩想, 시에 대한 생각이다. 그다음에 영상影像, 그림자 영影에다가 사람인변 亻이 있는 상像이다. 그것이 바로 imagination 할 때 상像이다. imagination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 상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판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그게 놀이를 가리키는 말도 있다.  그러니까 그게 각각이 다른 것이다. 신상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시상은 에이도스로 추상화되어 있는 것이고, 영상은 그것의 반영물이다. 그 뒤로 갈수록 구체적인 실체성은 떨어진다.  이것은 아주 명료하게 여러분들이 기억해둬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하늘 한 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동파를 읽고 있는데, 동파에게 떠올랐던 초나라의 주술사가 나타나고, 좁은 방에 물이 흘러들어 적벽 아래 강물이 된다. 그러면서 가볼 일도 없을 장강長江이남의 땅들을 상상한다. 마음 가는 대로 붙잡는다. 우리 안에서 심상心象이 생겨나는 대로 곧바로 시상詩想과 영상影像이 된다. 아득하게 열린 심상계心象界와 질료계質料界가 무질서하게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 재현이 일어나는 듯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발생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근원적인 재형성이다. 우리에게 만들어진 것은 기억 속에 있었으나 기억 속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다. 

그다음에 "아득하게 열린 심상계心象界와 질료계質料界가 무질서하게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 우리가 이제 동파의 시를 읽으면서 아 이렇구나 하고 뭔가 심상이 생겨나고 시상과 영상이 되었는데 그걸 보면 그걸 그대로 베낀 것 같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제멋대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동파가 애초에 적벽부를 쓸 때 이런 식으로 상상해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 재현이 아니라 하나의 창작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여기서 적벽부를 읽고 라고 하는 글을 하나 썼다면 그것은 우리의 창작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만들어진 것은 기억 속에 있었으나 기억 속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다." 이게 바로 창작의 원리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작을 하려면 아무것도 보면 안 돼 라고 하면 바보가 된다. 많이 봐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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