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4-1

 

2023.10.04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4-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4강. mimēsis

일시: 2023. 10. 4.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오늘 수업하는 미메시스mimēsis는 철학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미학에 있어서 그리고 학습에 있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집중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미메시스mimēsis의 기본적인 것, 그런 것들에 덧붙여서 확장된 것까지 얘기하겠다. 일단 주해 19번은 외워야 된다. 주해 19번과 21번은 오늘 강의 들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기본 중에 기본이다. 

mimēsis라고 하는 말은 모방이라고 번역된다. 우리가 A가 있으면 A를 보고 모방한다고 말한다. A를 원형archetype이라고 하자.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게 완전한 것인지 완전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보고 모방을 하는데 모방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뭔가 내 앞에 상대해 있는 것, 내 앞에 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모방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베낀다는 말이다. 뭔가를 보고 베끼는데 기왕이면 진리를 베기는 것이다. 플라톤에서는 아주 간단하다. 참된 것을 보고 베끼는 것이다. 이를 모델model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mimēsis 이론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플라톤에서 참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형상 즉 에이도스eidos이다. 가령 좋은 책이 있으면 그 책의 내용을 자기가 베끼고 싶으면 필사를 하는 것이다. 필사도 베끼는 것이고,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베낄 수도 있다. 가령 자식은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라고 할 때도 자식이 부모를 보고 베낀다는 것이다. 

모방을 하기 위한 본本paradeigma이 있다. 플라톤에서는 그게 훌륭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다. 훌륭한 예술가 또는 탁월한 예술가는 참다운 아름다움을 본받아서 그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본이 있으면 중간에 본받는 사람이 있다. 본받는 사람은 바로 연극 배우이기도 하고 극작가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하고 음악가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본받기가 어렵다. 음악이라고 하는 게 미술보다도 더 상위에 있는 예술 장르라고 말하는 게 그런 것이다. 결국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감각적인 어떤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를 가지고 그것의 상하를 구별한다. 예술에서 진리는 아름다움의 등급이 있다. 더 예쁜, 더 안 예쁜 이런 것이 있다. paradeigma라고 하는 것은 위아래 등급이 있는 것이다. 영어로는 value, 도이치어로는 Wert이다.  Wert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위계질서hierarch가 있다. 착한 일에는 등급이 없을지 몰라도 아름다움과 진리에는 등급이 있고, Wert가 있다. 김소월의 시가 엄청나게 많아서 탁월한 게 아니다.  그냥 진달래꽃 하나로 끝난다.  탁월한 것은 단칼에 끝나는 것이다. 착한 일은 경중이 없다. 착한 일은 행동이기 때문에 모방하기가 쉽다. 진리와 아름다움은 쉽게 모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어보면 진리와 아름다움은 모방의 영역에서 살짝 뺀다. 

본받으려고 하는데 본받는 사람은 paradeigma를 아는 사람일 것이다. 본paradeigma을 알아야 본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본받는 사람은 본을 아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우리가 아는 사람知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sophos이다. sophia를 흔히 지혜라고 하는데, 참다운 앎이라고 말할 수 있다. sophia가 知고 sophos가知者이다. sophia를 좋아하는 사람은 philosophos인데, 철학자愛知者는 eros, 즉 아직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철학자philosophos는 sophos가 아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본받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sophos를 아는 사람도 있다. 내가 sophia를 알지는 못하는데 sophia를 알고 있다는 사람을 알 수는 있다.  그러면 sophia를 아는 사람을 아는 사람도 본받는 사람은 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본받는 사람은 반드시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또 아는 사람이 반드시 본받는 사람인 건 아니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구한테 '그런 짓 하면 나쁜 거야, 그런 짓 하지 마'라고 얘기를 할 때 그러면 그 사람이 '알아'라고 대답하면서도 나쁜 짓을 한고 있으면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인데 본받는 사람은 아니다. 철학의 역사 속에서 늘 거론되는 문제인 아는 것 아는 것과 사는 것, 앎과 삶의 문제 즉 이론과 실천의 문제가 여기가 붙어 있다. 안다고 해서 행하는 건 아니다. 

본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삶에서 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내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까 플라톤에서는 참다운 것을 본받는 것이 모방이라고 말할 때 모방은 행위이다. 그러면 모방 안에는 두 가지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자기가 참다운 것, 즉 paradeigma를 알거나 아니면 그것을 아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모방을 하려면 일단은 앎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모방을 하려면 그것을 자기의 삶 속에서 행해야 한다. 즉 철학적인 의미로는 참다운 것을 또는 선한 것을 또는 아름다운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모방이다. 알고도 안 하는 것은 모방 아니다. 그냥 아는 것이다.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피해서 나쁜 짓 하는 사람은 법을 안다. 그런데 법을 모방하지는 않는다. 법을 훼손violate한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적어도 참다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쁜 것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그걸 아는 것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소한 법 위반이라는 건 있을 수 있는데 아주 심각하게 법을 위반한다는 것 적어도 법을 모방하고 있는 건 아니다. 



주해 19번을 보자. "폭넓게 말하면 '연습'(meletē)이라 할 것이다." 아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모방의 방법은 연습meletē이다. 그러면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가. 문단 나누는 부분을 보면 품성상태hexis 개념이 있다. 지금부터 여기 나와 있는 개념을 중심으로 외워야 하는데, 연습meletē, 품성상태hexis, 책을 넘겨보면 '착함'이라는 상태diathesis, 여기서 품성상태와 상태는 조금 다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9번
폭넓게 말하면 '연습'(meletē)이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처럼 이렇게 이렇게 해서 알 수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을 것이다. 용감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용감한 일을 행할 거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감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라는 것은 해결이 안 나는 문제니까 그냥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용감한 행동이라 한다 라는 것을 보고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조폭 공동체에서의 용감함과 멀쩡한 인간들의 공동체에서의 용감함은 종류가 다르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공동체에 있어서 선함을 제1 정초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나 저나 누구나 다 올바름의 제1 정초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렇게 질문 세 가지만 해보면 그것이 정말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쉽게 합의하기 어렵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일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올바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제1 정초를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소거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건 아닌 것 같고, 이건 아닌 것 같고 해서 안 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지 이것을 해야만 한다 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실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초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개정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재판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판례라는 것을 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하려면 착한 일을 하는 습관이 있어야 하는데, 착한 일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려면 착한 일을 해야 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착함이라고 하는 것이 잘 정리가 안 되는 상태인데 이제 심각한 문제가 된다.  

diathesis는그냥 상태이고, hexis는 품성상태이다. diathesis는 어쩌다 한두 번 한 것이 그런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게 해서 연습을 시켜서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자리를 잡게 되면 hexis라고 한다. 그래서 'character가 뚜렷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의 character가 되고, 그것을 품성상태라고 말한다.  품성상태를 character라고 번역을 하는 게 과연 적당한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이 있다. 이를테면 성격파 배우, 연기파 배우라고 할 때 스 성격을 character라고 한다. 성격은 딱 굳어버린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성격을 타고났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diathesis를 우리는 기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어느 정도 타고난innate 특성을 기질이라고 한다. 그 기질에는 적합한 연습들이 들어간다.  meletē는 단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여기에 곁들여져 있는 선한 목적이라고 하는 게 있어야 한다. 선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본paradeigma이다. 그 기질을 파악하고 그 기질에 걸맞은 연습 코스가 있는데 연습이라고 하는 건 반드시 선한 목적을 위해서 개발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다 공부는 고시 공부하듯이 머리에 띠두르고 앉아서 해야 된다 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기 기질에 맞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공부하는 방법meletē도 달리 해야 한다.  여기서 그 사람의 기질에 적합하지 않은 연습 방법을 택했을 경우 그 사람은 공부하는 습관의 품성 상태를 못 갖추게 된다. 이 기질이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태diathesis라고 말했고 그다음에 품성 상태hexis로 하는 character이다. 다시 말하면 예를 들어 자신이 감독이면 배우 오디션을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이러한 역을 맡을 사람을 오디션 한다고 하면 전혀 아니게 생긴 사람한테 '연습하면 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그 배역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이면 할 것 같네'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데리고 그 배역을 시킬 게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 사람이 할 것 같네'라는 diathesis가 확인이 되고 그다음에 그 사람에게 meletē를 시켜서 그 character를 창조해 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걸 얘기한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는 훨씬 더 유연하게 사태를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표로 하는 상태diathesis를 전제하고 계속 해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우리가 원하는 character에 이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말하는 모방과 그것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정리하면 모방이라고 하는 것 결국 참다운 것을 본받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고 본받는 사람이 있는데 미학에서는 본받는 사람이 예술가이다.  그다음에 그것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거기까지 일단 기억을 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제 아까 나왔던 문제가 있다.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구나 다 이것이 올바름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공통적으로 누구나 예외 없이 이의 제기 없이 이것이 올바른 것이다 라고 동의할 수 있는 올바름은 세상에 없다. 그냥 공동으로 합의를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그것이 합의가 아니라 2 × 3 = 6 처럼 답이 딱 떨어지는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딜레마 문제들이 있다. 스토리를 보면 너무나 뻔한데 맨날 그 스토리의 영화나 그 스토리의 노래나 이런 것이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영화들 있다. 사랑이냐 불륜이냐 이런 것들이 딜레마의 문제이다. 그건 뭐냐 하면 참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정답으로 정초가 되지 않고 그때그때 계속 상황에 따라서 토론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사실 가치Wert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합의의 문제이다. 가치에 관한 이론theory of value 안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합의도 있지만 진리에 대한 합의도 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나는 개인의 자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내 얼굴에 마스크를 쓰냐 안 쓰냐는 내가 결정하지. 왜 나라에서 쓰느냐 못 쓰느냐를 결정해'라고 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선호의 문제political preference도 여기에 관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paradeigma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beauty의 문제도 있지만 political preference도 관여가 된다. 그러니까 가치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윤리학, 정치철학 이런 것들이 포괄이 되는 것이다. 철학은 크게 나누면 이론적인 문제와 실천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 실천적인 문제 안에는 반드시 preference의 문제가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preference와 맞물리는 단어가 관용tolerance이다. 관용이라는 말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게 아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걸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프랑스 사람들이 똘레랑스라고 말할 때는 똘레랑스를 하는 영역도 있지만 뭐든지 다 똘레랑스를 하는 게 아니다. 똘레랑스를 해주는 Wert의 종류가 다른 것이다.  속으로는 욕해도 겉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을 political correctness라고 얘기하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preference는 political correctness와 tolerance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가치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합의를 해야 되는 문제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개인의 취향 문제인가 아니면 공동으로 합의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사실 실천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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