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92 제38강(2) 멜빌 《모비 딕》

 

2024.02.27 문학 고전 강의 — 92 제38강(2) 멜빌 《모비 딕》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8강(2)

 

 

《문학 고전 강의》 모비 딕 제38강 내용을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다. 《모비딕》은 표면만 이렇게 읽어가면 굉장히 쉬운 책이다. 전체 구도를 보면 그냥 그대로 읽을 수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제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이 프롤로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지금은 여러분들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날이 되면 모든 것이 뚜렷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교도적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에이헤브라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모비 딕》이라는 작품을 기독교적인 내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예 애초에 모르고 있으면 극복할 생각도 안 들고 그게 자신에게 스며들어 있는 것들을 찾아낼 필요가 없는데, 멜빌이 이걸 쓸 때는 이미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 19세기 중반, 그때 이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미국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던 때이고, 여전히 서부 시대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진 미국인들에 대한 인상, 특징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서구적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그렇다. 남성성을 찬미하는, 거친 것들을 찬미하는 그런 것들. 하나의 미국, 사람 한 나라 사람들이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각기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나 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떤 그런 것에 얽매여 있을 때이다. 아무리 강하게 비극적 영웅으로서의 에이해브를 강조한다 해도 기독교적인 전통을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한, 그렇기 때문에 이 《모디 딕》의 전체 구조 자체가 기독교적인 편린들을 가지고 있다. 벌써 주인공이 에이해브와 이슈메일, 구약성서의 아합과 이스마엘이다. 구약성서에서 가져온 모티브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레이첼호은 라헬이다. 에이해브가 하는 행동은 페이건 히어로인데 구조나 모티브나 이런 것들은 성서에서 가져온 것이 위대한 점일까 아니면 멜빌이 금 모자라기 때문일까. 예전에 성북정보도서관에서 강의할 때는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 하고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요즘엔 추천하지 않는다. 이제 그런 책을 넘어설 만한 더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다. 하우저의 책들과 같이 항상 교과서로 쓰이는 책들도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멜빌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도 많이 나왔다. 

멜빌은 무역상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13살에 아버지가 파산 상태에 이른 후, 이때부터 흔히 말하는 인생의 고난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가 요즘에 읽고 있는 위르겐 오스트함멜의 《대변혁》, 거기 정말 19세기 한가운데를 살아간 사람이다. 1819년에서 1891년이니까 19세기를 꽉 채워서 살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사람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19세기에 미국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세계이다. 멜빌이 살았던 시대는 1861년~1865년에 미국 내전, 1865~1877년에 재건 시대. 이때는 19세기에 유럽의 나라들과는 또 다른 그런 시기이다. 전 세계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지만 미국은 특히나 조금 다른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시대가 멜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 멜빌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포경산업의 발전 정도겠다. 《모비 딕》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19세기에 포경산업 그리고 전 지구적인 선박, 항해, 이런 것들. 멜빌의 작품 시기는 '탈색된 진실의 시대' 그리고 '해부학의 시대', 해부학 시대가 《모비 딕》의 모티브를 만들었던 시대이다. 그러니까 멜빌은 크게 보면 힘들 때는 대중소설, 조금 먹고 살 만한다 하면 《모비 딕》 같은 소설, 그래서 1851년에 《모비 딕》을 내놓는다. 책 381페이지를 보면 "파우스트적 앎에 대한 욕구와 백과사전적 탐색이 나타나고, 《마디》에서 보였던 현실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라고 하는 이중적인 세계가 《모비딕》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대비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통일될 때야 비로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전체론적 진리관도 드러납니다." 이 부분은 딱 항상 기억을 해둬야 한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대비 이것들을 가지고 생각을 한다. 오늘날에는 이성과 감정으로 나눈다는 것은 무의미한 구별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감정의 항해》 이런 책들을 보면 이성은 감정이 추동을 한다는 것이 나온다. 그렇지만 이때만 해도 그것이 구별된다. 감정은 언표되지 않은 생각일 뿐이다. 우리가 이성의 영역에서 의식적으로 나와서 뭐라고 하는 것들은 언표된 생각이고, 규정적으로 언표된 생각이 이성이라고 불리는 기능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재료들이 있는데 규정적으로 언표되지 않으면 그것을 감정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니까 재료들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론적 진리관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이해할 때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고 그 밑에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들이 있고,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이 감정인 것이고 표면으로 드러난 부분이 이성인 것이다. 그 두 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멜빌이 《모비 딕》에서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은 전체론적 진리관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자신이 감정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재료들을 온전히 다 규정적으로 언표해가지고 내놓고 죽을 수는 없다. 말 못하고 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뭔가 있는데 이게 말로는 안 나오네 하는 것들이 있다. 굉장히 길게 말해야만 하는 그런 것들을 다 말로 하고 죽을 수는 없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모티브는 문학 작품에서 많이 나오는데, 겪는 이가 동시에 설명하는 이이고, 그가 세상에서 추방당한 이슈메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문학 작품의 주인공으로 아주 딱 드러맞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뭘 겪기는 어려우니까 이제 낯선 경험들이겠다. 세상에서 추방당한 사람은 세상 일을 겪는 게 아니라 세상 바깥의 일을 겪는 것이고, 세상 바깥의 일을 겪으니까, 한스 부르멘베르크의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책이 있다. 이런 저런 좋은 아이디어들은 많이 있는데 딱히 정리 정도는 잘 안 된 그런 책이다. 책은 얇아도 할 얘기가 많은 텍스트이다. 《모비 딕》을 보면 《난파선과 구경꾼》이라고 하는 그 모티브를 딱 가지고 있다. 구경꾼은 구경하는 사람이다. 구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에서 철학자의 개념이 나왔다. 고대 헬라스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렸는데 참가하는 선수가 있고 열렬하게 뭔가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멀거니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게 구경꾼이다. 그런데 이게 동시에 하는 건 어렵다. 겪으면서 동시에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을 세상 바깥에서 보면서 겪는 것을 설명하는 것, 그러니까 이슈메일은 간단하게 말하면 완전한 제3자, 완전한 제3자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그다음에 멜빌 책 중에 많이 읽히는 게 《필경사 바틀비》이다. 거기에서 나온 유명한 말도 있고 한데, 그냥 소심한 그런 책이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엄청난 감동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135개 장으로 이루어진 《모비 딕》의 전체 구도. 이슈메일 얘기는 무대가 땅, 2장에서 22장이고, 에이해브 이야기가 23장에서 45장, 무대는 바다이다. 그리고 바다에서의 삶이 46장에서 72장이고, 고래와 고래잡이가 네 번째 파트이고, 어찌 보면 46장에서 105장까지는 스토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중간에 이렇게 끼어들어 있다. 이슈메일이 무대 전체 구조를 설명하고 에이해브 나오고 그다음에 수색과 추적, 대파국 그리고 에필로그로 가는 것이다. 멜빌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재조명된 작가인데 아마 그 당시 이렇게 많이 안 팔리고 사람들이 주목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스토리가 중간에 바다에서의 삶이 어떻고 고래가 어떻고 그런 얘기들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저도 사실 《모비 딕》을 강의를 하거나 그럴 때는 바다에서의 삶과 고래와 고래잡이, 46장에서 105장까지 부분은 그냥 딱 필요한 만큼만 언급을 하고 말았고 《문학 고전 강의》에도 지금 그렇다. 그런데 한번 이 부분을 흔히 하는 말로 각 잡고 멜빌의 진리론, 수첩에 탐구해 볼 만한 주제로 적어놓긴 했다, 연구 주제는 아니고 한 번쯤 좀 꼼꼼하게, 세상의 구조, 진리를 발견하는 방식 그리고 고래, 여기에 담긴 사상들을 갈래를 분류해 보고 멜빌이 어디서 뭘 끌어다가 썼는가, 제가 추적해 볼 수 있는 한 최대한 이렇게 추적을 해보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전체론적 진리 이론으로 만들어내는가를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해봤는가 하면 한스 큉과 발터 옌스가 쓴 《문학과 종교》를 읽으면서, 문학과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을 전제로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한 것처럼 겪으면서 설명하면서 추방당한, 여기서 이 추방이라는 단어만을 살짝 빼버리면 완전한 제3자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완전한 제3자는 신이다. 개입되어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세상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세상 바깥에 있는 굉장히 모순적 존재가 신이다. 그러니까 이슈메일이 자기가 본 것을 적어놨다고 하지만 이건 사실 이슈메일의 진리론이다. 그럼 그 방법이 뭐냐 할 때 파트 3과 파트 4에 있는 부분이니까 《문학과 종교》를 읽으면서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종교는 신의 영역인데, 신의 영역과 인간의 겪음의 영역을 서로 연결한다. 그러면 신의 영역 과 인간의 겪음을 동시에 연결해서 인간처럼 보이는 신이 뭔가를 서술을 하면, 그것이 말하자면 신-인, 인-신, 신-인 문학, 인-신 문학이 될 거 아니겠는가. 그러면 반드시 신은 전체로서의 진리를 아는 자니까, 그러면 전체론적 진리관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될 테고, 전체론적 진리관이라고 하면 헤겔이 떠오를 것이다. 진리는 전체다Das Wahre ist das Ganze. 헤겔의 진리론을 가지고 멜빌을 얘기하면 좀 진부하긴 하니 이것을 한번은 해보려고, 공부를 했으면 또는 해야만 하는 그 주제로 적어놓긴 했다. 《문학과 종교》에서 거론하고 있는 작품들이 제가 안 읽어본 게 너무 많으니 내가 아주 좋아하고 잘 아는 텍스트로 예를 들어서 한번, 그러니까 《문학과 종교》에서 뭔가 구도를 얻고 방법론을 알아내는 것, 우리가 《문학과 종교》를 읽는 이유는 작품 분석을 하는 어떤 방법론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책 385페이지에 "넷째 부분은 멜빌이 주장하고자 하는 진리론을 담고 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멜빌은 본래 이런 진리론을 논하고 싶었는데 그것만 써놓으면 사람들에게 안 받아들여질 것 같으니까 앞뒤로 고래 잡으러 가는 이야기를 붙였다. 물론 헛된 상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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