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93 제39강(1) 멜빌 《모비 딕》

 

2024.03.02 문학 고전 강의 — 93 제39강(1) 멜빌 《모비 딕》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9강(1)

 

 

《모비 딕》을 읽는 《문학 고전 강의》 제39강이다. 오늘 제39강을 먼저 조금 하고 그다음에 다음 주 화요일에 39강을 마져하고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에 제40강을 하고, 제40강 이후에 마지막 시간이 있는데 마지막 시간은 여러분들이 그냥 읽어보면 될 것 같다. 거창하게 시작을 했는데 희미하게 끝나는 것 같아서, "어렴풋이 보이는" 상황으로만 끝나는 것 같다. 뇌과학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의 두뇌는 게을러서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낯선 상황들이 닥치면 당황한다고 하는데 언제든 우리는 낯선 상황이 닥칠 것을 각오하고 살아야 되지 않나 한다. 

제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은 작품 전체의 프롤로그이다. 그리고 첫 문장이 "call me ishmael"이다. 널리 알려진 문장이고 번역자는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이스마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방랑자',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창세기〉 16장 11-12절에 보면 "너는 아들을 배었으니 낳거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여라. 네 울부짖음을 야훼께서 들어주셨다. 네 아들은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 닥치는 대로 치고 받아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리라." 저주일까, 들나귀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나귀는 길들여야 되는데 들에 있으니까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자랑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닌 그런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할 때,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사람은 많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남들도 그렇게 등지고 사는 건 아니다. 그것 또한 낯선 일이다. 어찌 보면 골육의 형제는 한 부모에게 낳았지만, 이복동생도 있고 이부동생도 있지만, 어찌 보면 형제라고 하는 존재가 굉장히 우연이다. 같은 환경에서 사니까 형제끼리 닮을 수는 있겠지만 형제끼리 닮지 않을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산다는 것은 쓰라린 것 같지만, 그만큼 아무래도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근본 원리를 새삼스럽게 설득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것이라서,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바탕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한다는 것에서 유가가 현대사회에서 적응하기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수신제가가 아닌 추상적 원리가 필요한데 그런 추상적 원리만 가지고는 또 안 된다. 여기서 이스마엘은 추방당한 자이고 세상 바깥에서 살아가는 자이고 경계선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러니까 스스로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나 이런 사람이라고 해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치자' 그런 말이다. 내가 알아서 이스마엘이 스스로 되겠다 라고 얘기했다. 단테가 《신곡》 지옥편 제1곡에 처해 있는 상황은 스스로 그렇게 처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 라고 하는 뜻도 강한데, 그 단테보다도 훨씬 더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강력한 자기 규정의 의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골육의 형제와 등지고 살아가겠다 라는 의지의 표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call me ishmael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이고, 지금 《모비 딕》 전체의 화자는 이스마엘이니까 이스마엘이 불러달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맨 마지막에 〈욥기〉 1장의 하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욥기〉 1장의 하인들은 그 고난을 겪지 않았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그 고난을 겪은 사람이다. 〈욥기〉 1장의 하인은 정말 말 그대로 구경꾼이고 이스마엘은 구경꾼만은 아니다. 구경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겪은 자이기도 하다. 하인들은 그것을 겪지 않고 이스마엘은 겪었다는 그런 큰 차이가 있지 않나 한다. 어쨌든 이스마엘은 겪고도 살아남았고 말해주는, 문학 작품에서 그런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인도자도 없다. 단테는 그걸 베르길리우스나 베아트리체나 또는 베르나르두스가 이렇게 인도해 준다. 베르길리우스가 연옥까지 인도해주고 그다음에 베아트리체가 해주고 베르나르두스가 이끌어주고 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정말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불굴의 사나이이다. 어찌보면 에이해브보다도 살아남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겪고 살아남았는데, 그럴 것 같으면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마련일텐데 이스마엘은 그것을 싹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전에는 에이해브가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이번에 이렇게 읽으면서 보니 이스마엘 같은 사람을 본받아야겠다 생각된다.  

조용히 배를 타러 간다. 땅에서 벗어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난을 겪으러 간다. 오뒷세우스가 그렇게 가는데, 오뒷세우스는 자기가 알아서 간 건 아닌데 이스마엘은 그냥 알아서 간다. 정말 페이건 히어로 중에서 이스마엘 같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들"은 '굴러가는 운'을 만들어내는 튀케tykhē이다. 이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얘기했던 바가 있다. 그러니까 서양 고전 문학을 읽을 때는 현대문학부터 읽고 거슬러 올라가면 안 되고 옛날 것부터 읽어야 된다. "배화교도가 사라진 뒤 에이해브의 노잡이가 그의 빈자리를 메웠고, 운명의 여신들이 그 노잡이의 빈자리에 앉힌 것이 우연히도 나였다." 튀케tykhē에 의해서 움직여가는 사람이다. 에필로그에서 나온다. 처문에는 몰랐는데 에필로그에서 알고보니 tykhē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알았으면 이스마엘은 엄청난 사람인데 몰랐던 것이다. 정해진 섭리는 없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고, 《모비 딕》은 일종의 알려주는 얘기, 겪은 일들을 알려주는 얘기, 겪은 일을 알려준다는 것은 회고록이다. 예를 들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겪은 일을 알려준다. 《고백록》은 신의 섭리에 대한 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신뢰 그러니까 사실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심란한 상황은 아니다. 흔히 아는 말로 믿는 구석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그런 게 없다. 우리도 그런 믿는 구석이 있으면 좀 덜 괴로울 것 같아서 뭔가를 믿는다. 종교를 갖는다. 그런데 종교라고 하는 것도 엄청나게 우리를 잘 이끌어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결국 그 흔들림 속에서 살아가고, 맨 나중에 이렇게 이스마엘처럼 tykhē라고 하는 것, 배화교도 대신 노잡이의 빈자리에 앉은 게 우연이라 해도 이교도의 태도이고, 여기서 미리 알고 있는 운명의 여신 모이라moira가 아니라 tykhē를 거론한 것, 그리고 겪음을 통해서 앎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니까, 배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서 나뭇조각 하나 붙들고 이렇게 될 것을 알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뭐가 됐었든 간에 그것을 향해 가보려는 그런 의지의 표명이니까, 굉장히 적극적인 겪음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파토스가 넘쳐 흐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살아남아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는 것은 그것은 굉장한 관조이다. 그러니 에이해브는 격정의 끝판왕이고 이스마엘은 격정을 다 이겨낸 관조의 끝판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 "명상"은 관상이다. 이것을 관조觀照contemplatio라고 번역하지 않고 관상觀想이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했다. 철학사에 나오는 관조라는 단어는 왠지 조금 수동적인 느낌이 있다. 그래서 이것을 관상이다, 관조는 사유가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관상은 사유는 계속해서, 사유가 멈추는 일은 사실 없다. 심지어 우리는 꿈을 꾸는데 자면서도 사유가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러겠다. 사유는 계속 역동성, 생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관상이라고 하는 게, 고요한 사유, 잔잔한 사유, 돌이켜보는 사유는 물 바다와 결합되어 있다. 겪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다는 겪음의 장소,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그런 사유 속에서 또 뭔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바로 이제 우리의 삶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벌써 이스마엘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인간이 아니겠는가 한다. 철학 공부하는 사람은 이스마엘을 본받아야 될 것 같다. 관상과 겪음을 동시에 해내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바다는 우리의 관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겪음이 일어나는 곳이니까, 그냥 겪기만 해서는 안 되고 관상함으로써 진리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신과 무관하게, 신과 무관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신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에 가서 그가 얻으려는 것은 "영상"이라고 했는데 바다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허상이 아니라 진리의 반영, 진리 담은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스마엘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를 할 수 있다. 바다라고 하는 겪음의 장소에서 진리의 반영물인 영상影像을 관상觀想함으로써 진리에 이르려는 그런 태도, 그게 《모비 딕》 제1장에 나온다. 그는 단순히 곁에서 구경만 하다가 《난파선과 구경꾼》에서의 구경꾼만이 아니라, 겪은 다음에 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일개 선원simple sailor"으로서 바다에 나간다고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겪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simple이라는 단어는 '하찮은'이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것도 내 안에 채우지 않은, 일단 열려 있는 태도를 가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열린 태도를 가지고 바다에 나가겠다 라고 말을 했으니까 그냥 가보는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그냥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simple student로서 하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문학 고전 강의》를 읽고 또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녹음하기 위해서 읽으면서 이슈메일에 대해서 그동안 너무 정리를 안 해놓았다는 생각에 카드를 한 장 썼다. 이슈메일이라는 사람이야말로, 철학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철학 선생이라고 스스로 자칭하면서 똑바로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슈메일이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은 운명의 여신들이 보낸 경찰관 때문인데, 운명의 여신, 튀케 여신들은 어떤 섭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의 이치라고 하는 거대한 프로그램',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만들어낸 일종의 연극인데, 그게 짧은 막간극이고 에필로그의 첫 문장이 "연극은 끝났다"니까, 경찰관이 보냈다고 하는 것은 제대로 겪고 있나 감시해 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이슈메일을 삶의 모형으로 삼아서 한번 살아봐야겠다 라고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다음번에는 피쿼드 호에 탄 선원들에 대해서 더 얘기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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