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

 

발타사르의 지옥 이야기 - 10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김관희 옮김/바오로딸(성바오로딸)

이 책에 대하여
1장 지옥론 현황
2장 그리스도교 신앙
3장 성경의 가르침
4장 타인을 위한 지옥?
5장 남이 잘못되는 꼴을 보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6장 내가 저주받아서라도 형제가 구원되기를 바라기
7장 만인의 구원을 희망해야 하는 이유
부록 총체적 구원론_ 의미/여러 가지 반응

 


 

50 이 외에도 모든 이의 구원에 호의적인 텍스트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위협성 언명 때문에 이런 텍스트들의 진의가 희석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위협성 언명들이 보편적 구원에 대한 언명들의 가치와 효력을 무산시켰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보편적 구원 언명은 모든 이가 구원될 수 있기를 기대할 당위성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위협성 언명에서 '지옥이 우리 형제와 자매들로 가득 찼다'는 가정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의 희망을 짓뭉개 버리는 또 다른 폭력이기 때문이다.

93 칼 라너의 다음 언명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이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랄 의무를 영원한 멸망의 진솔한 가능성과 함께 형평성 있게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에 관한 한 "지옥을 영원한 파멸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강조해야 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같은 강도로 희망과 신뢰로 하느님의 영원한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고무적인 발언도 곁들여야 한다." 

103 은총은 이미 어느 한 영혼을 차지하고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되면, 은총에 반대되는 활동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론적으로, 이런 제거의 행보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만일 빛의 영에 반항하는 추진력이 어느 한 영혼 안에서 모두 제거되면, 그 영에 반대하는 자유로운 결정이란 사실상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103 이렇게 사랑과 은총이 무한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은총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영원할 가능성이나 영원한 벌의 가능성이 이론상으로는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구원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정당화한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앞서 말한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의 한계도 사라진다. 그 한계란 하느님의 자유와 인간 자유가 부딪힐 때에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인간 자유의 기초가 되는 영역의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자유에 의해 손상되거나 침해될 수 없다. 다만 덮어씌워질 수는 있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 영혼에 내주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자유로운 행보다. 그의 확장에는 어떠한 한계도 있을 수 없다. 은총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 영혼을 사로잡는지, 또는 어떤 영혼을 주도적으로 사로잡고 어떤 영혼을 방치하는지, 그리고 만일 우리 영혼 안에서 은총이 활동하는 게 사실이라면, 언제, 어떻게 그 은총이 활동하는 지와 같은 의문은 모두 우리의 이성적 통찰을 훨씬 뛰어넘는 질문들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원칙적으로 가능한 인식이고, 이 원칙적인 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142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기보다는 오히려 막시모의 다음 언명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도 사랑을 베푸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의 본성에 걸맞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를 동정하면서 그에게까지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다. 이는 우리가 지적 장애아를 보거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감정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받아 마땅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쩌다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하신다고 하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그분을 미워하지 마라. 그분은 본성상 사랑을 지니신 분이시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너는 너를 심판하신 그분을 미워할지라도 그분은 너를 미워하시지 않는다. 고분은 격정에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143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필경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동화의 나라로 가고 말 것이다. 예컨대 하느님은 지옥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사랑이 아니라 정의만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든지, 하느님은 영벌을 받고 있는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바로 그 사실이 영벌을 받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고통을 유발할 것이라든지, 또는 하느님께서는 죄인도 사랑하시지만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으며, 천국에 사는 성인들에게도 죄인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금지하신다든지, 아니면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동정심이란 것은 이론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동정심이 자칫 천국의 성인 성녀들의 행복을 갉아먹을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천국에 사는 성인들에게는 죄인을 향한 동정심이 있을 수 없다는 등의 상상이나 유추는 근거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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