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발타사르의 구원 이야기

 

발타사르의 구원 이야기 - 10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김관희/바오로딸(성바오로딸)

추천사
1장 쟁점과 고발
2장 신약성경
3장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노
4장 토마스 아퀴나스
5장 심판의 개별적 성격
6장 성인 성녀들의 증언
7장 블롱델의 딜레마
8장 지옥의 영원성
9장 악이 스스로 소멸할까?
10장 사탄
11장 정의와 자비

 


232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표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다루면서 역시 안셀모의 대어록을 인용한다. 

"당신이 죄인을 벌하신다면, 그것은 응당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동에 결과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을 용서하신다고 해도 그것 역시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공과에 걸맞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선하심에 걸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공과와 하느님의 선하심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정의는 하느님의 자비 아래로 숙어들게 마련이다. 심지어 정의는 자비의 존재방식의 하나라고 말해야 한다. 세상과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무한한 관대함으로 뭔가를 창조할 적에는 거기에 '정의와 관대함과 자비'가 살아 숨 쉰다. 하느님이 피조물에게 어울리는 뭔가를 주실 때 우리는 이를 정의 라고 부르고, 하느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의 선하심에서 기인하여 뭔가를 피조물에게 수여할 때 이를 너그러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함이 피조물의 결핍을 채워줄 때 우리는 이를 자비라고 부른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인간 개개인은 각자에게 귀속된 것에 대한 책무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내적 필요성에 근거한다. 피조물에게 이 책무는 크게 두가지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다. 첫째 서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로서 각각은 전체를 향해있으면서도 나름의 목표가 있다. 둘째, 모든 피조물이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이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먼저 하느님은 자신의 지혜와 의지, 그리고 선함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도록 피조물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당신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책무를 보증하는 하나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은 피조물을 만들 때 그 피조물에 어울리는 것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예컨대 인간에게 손을 만들어 준다든지, 모든 동물은 인간에게 복속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 둘째 의무는 첫째에 귀속된다. 만일 하느님이 피조물들에게 상응한 무엇을 주었다고 해서 하느님이 빚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들에게 정향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하느님께 정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피조물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지금 모습 그대로 현존하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하심과 관용에서 비롯된다. 그래야만 그분의 정의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피조물에게도 그분 선하심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정의의 업적은 언제나 자비의 업적을 전제하고 거기에 기초한다." 모든 존재는 '그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존재'에 근거하여 존재해야 한다. 예컨대 인간이 손을 가진 이유는 그가 이성적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고, 그가 이성적 영혼이 있는 이유는 그가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연결고리가 영원에까지 닿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최후통첩은 이것이다. 지금 그대로의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선하심에 매여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자비다." 왜냐하면 제일원인은 언제나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말을 수긍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피조물의 내적 안정감에서 요구되는 모든 청원을 넘어서는 관대함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의 내적 필요성을 언제나 능가하는 하느님의 선하심이 지속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결론을 대신해서, 이 장에서 다룬 문제들을 자신의 책 제목으로 풀어낸듯한 요제프 피퍼의 다음 문장을 소개한다.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서로 '부딪히는' 느낌은 신학적 희망안에서 말그대로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상쇄된다.' 초자연적인 희망이야말로 인간의 눈에는 대척적으로 보이는 하느님의 두 속성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정의에만 목숨 건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하느님의 자비에만 목맨 사람들처럼 뭔가를 희망하는 일에 크게 의지하지 않는다.  이 두 부류는 하나는 희망없이 살다가 절망 속에서 신음할 것이요, 다른 하나는 뻔뻔함으로 기고만장할 것이다. 오로지 희망만이 모든 모순과 대척을 덮어버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이해할 것이요, 그분의 정의는 곧 자비이며 그 자비는 정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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