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2)

 

2024.04.24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2)


오늘은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을 서문과 들어가는 말 부분을 정리해서 설명한다. 윌켄의 이 책은 사상가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당시의 그 관행들도 다루고 있는데 제2장이 장례 상조 단체이고 3장이 경건한 박해자들이다. 1장은 소 플리니우스, 통치자를 다루고 있는데 챕터 순서로 다루기보다는 내일은 장례 상조 단체를 보고, 그 다음에 경건한 박해자들을 본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이 책은, 지난 주에도 말했듯이 이 책이 먼저 쓰여졌고 초기 그리스도교를 다루고 있는, 그러니까 호교론자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신》책(The Spirit of Early Christian Thought, 2003)이 나중에 쓰여진 책이다. 복있는사람에서 나왔는데 이 책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에 해당한다. 

오늘은 서문과 들어가는 말을 설명하겠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서 "로마 세계의 눈으로 바라본, 다시 말해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각으로 바라본"이라고 하면 당연히 로마 세계의 입장에서 저 낯선 종교가 도대체 뭘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호교론자들 얘기는 없는데, 그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을 해보면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린 세계의 종교적 지평을 묘사"한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생겨난 종교니까, 그 종교가 지중해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물론 그때의 팔레스타인 지방이라고 해도 그 지방도 아주 오랫동안 헬레니즘 세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르틴 헹엘이 《유대교와 헬레니즘》을 보면 그런 것들이 잘 나와 있다. 이 책 역시 좋은 책이긴 한데, 기독교의 성장보다는 유대교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논의를 하고 있어서, 기독교 사상사를 공부할 때 꼭 필요한 책이긴 하다.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주제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한 책이긴 한데, 그 기독교 사상사의 핵심적인 것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린 세계인 헬레니즘 세계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로부터 전해진 호교론자들이 전해준 얘기만을 일방적으로 읽다 보니까, 미신으로 가득 차 있고 애니미즘으로 가득 찬 세계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건 결코 아니다. 그들도 경건했다.  

2판 서문을 보면 처음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느 국제학회에서 이 책이 일본어 번역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이 책이 꽤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궁금해진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이 책에서 그리스도교를 반박할 새로운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책을 쓴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답변이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윌켄의 책을 읽고 헬라스 세계와 로마 세계의 사상가들이 그리스도교를 이렇게 반박했구나. 그러면 윌켄의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리스도교의 약점을 딱 잡아낼 수 있겠네. 그러니 우리도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그리스도교를 이렇게 반박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겠다. 윌켄은 이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가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반박을 한 것을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그들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또 기독교는 로마와 헬레니즘 세계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다시 말해서 서로 전혀 다른 전통에 바탕을 둔 사상들이 만나서 어떻게 서로 교감하고 제3의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그리하여 기독교는 어떻게 변형되었고, 로마와 그리스의 종교는 또 어떤 변형을 겪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그냥 그리스 로마의 사상이 기독교를 때려 엎은 내용만 충실히 눈을 가져다 대고 보았다는 얘기이다. "독자는 저자의 의도를 거의 따라가지 않으며, 때로는 저자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읽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저도 책들을 몇 권 썼는데 독자의 반응을 보면 그런 게 느껴지기는 한다.  

이 책은 기독교가 뿌리내린 세계가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모습과 시각을 어떤 방식으로 형성했는지, 그러니까 그 세계가 기독교에게 영향을 준 아주 좋은 전형적인 사상사 책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당시 로마 세계의 문화적 종교적 지평을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종교적 함의와 연결시킨다.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문화적 종교적인 그런 의미들이 있다면 이것이 독자적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호교론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들이 성서의 말씀만 가지고 신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들보다도 더 낯선, 더 오래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로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맥락에서만 뭔가를 주장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이입해 들어간 세계 속에서 뭔가 자신들의 얘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 세계에 익숙한 용어, 어휘들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들을 전개해 냈다고 하는 점이 있다. 그러니까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인들이 제기한 가혹한 비판을 아주 즐거워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만 않았고 필사적으로 대응한 방식이 있다. 그런데 필사적으로 대응해서 상대방을 절멸시키려고 했던 것이기보다는, 사상적 대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대응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얘기가 된다. 예를 들면 천주학이라고 하는, 한국에 서학이 들어오던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접하고 있던 세계가 좁기는 했지만 나름 성리학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학문들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구에서 들어온, 중국을 경유해서 들어오긴 했어도, 서구에서 들어온 이 기독교를 가지고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 어떻게 대응해낼 것인가를 가지고 굉장히 노력을 했고, 또 그렇게 보면 서구에서 한국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사람들은 그런 측면은 적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한국의 기독교를 선교한 사람들은 신학자들이라기보다는 사제들이고 초기에 이 호교론자들 같은 사람들은 아니다. 또 한국에서도 격렬한 박해를 받고 그러다 보니까 조선에서 사용하고 있던 어휘들을 가지고 자기네들의 생각을 전하려고 하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물론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예수의 선교사들이 많이 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초기에 호교론자들이 했던 것만큼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천주교라고 부르는데, 그 천주교天主敎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 세계에서 중국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이곳에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다. 천주天主, 하늘의 주인, 천주라고 하는 말은 전형적인 한자어이다. 천자, 천재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그런 용어들과 유사하게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조금 맥락이 다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서로 이질적인 사상이 서로 만나면서 상당히 다른 종류의 뭔가를 형성해낸 대표적인 사례 중에 하나가 불교 용어들이다. 불교의 용어들도 사실 산스크리트어가 한역 불전으로 번역되면서 상당 부분 도교의 용어들을 가져왔다. 중국도 굉장히 오래된 사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초기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상적인 쟁투의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에 있는 전통적인 사상들과 서학이 만나서 긍정적 사상적인 결과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외부의 저술가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준 외부의 저술가들, 즉 paga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pagan and christian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런 이유로 그들의 시각은 값진 것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모르니까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상 자원을 동원해서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했다. 플리니우스, 이 사람은 소 플리니우스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오늘날의 튀르키예 북부에 해당하는 비튀니아 속주의 총독으로서 그리스도교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서신이 유명하다. 그다음에 켈소스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켈소스라고 하는 사람은 오리게네스가 쓴 '켈소스 반박'(Kata Kelsou)라고 하는 책을 통해서 그가 'Alēthēs Logos'라고 하는 책을 썼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Alēthēs Logos'는 180년경에 쓰여졌는데 오리게네스가 70년 후에 '켈소스 반박'을 썼다면 굉장히 오랜 세월 시간이다. 그러니까 그만큼 그때까지도 굉장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리게네스가 '켈소스 반박' 같은 책을 쓰면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그다음에 의사이자 철학자인 갈레노스. 갈레노스의 지적이 굉장히 중요한데,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하는 개념이 없으면 당신들이 말하는 세계 창조에 관한 논의가 굉장히 탄탄한 철학적 토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라는 것을 지적한 사람이다. 창조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생물학적인 얘기인데 그것을 기독교적인 의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얘기를 하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에는 없던 논의니까 그게 필요하지 않겠는가를 갈레노스가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지적을 받으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개념들이 형성되었다. 그다음에 켈소스라든가 또는 플리니우스라든가 갈레노스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2세기의 인물이라면 3세기에는 좀 더 정교한 논의가 나온다. 영지주의는 과거에 이단으로 정죄되어서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영자주의도 기독교 전통 중의 하나로서 제시되어 있었다. 3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퓌리오스의 논의를 살피고 4세기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 박해를 엄청 해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율리아누스는 이론가가 아닌데 왜 살펴보는가. 책을 읽어보면 그런 얘기가 있기도 한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했다. 다른 종교단체와는 다르게 이 부분이 기독교의 정치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국가에서 독립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주교에 의해서 말하자면 관리되고 있는 집단인데, 그 주교도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가 제시한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장례를 치르지만 상조회와 같은 용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국가도 아닌데 국가 같기도 한 기묘한 정치적 공동체이다.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ecclesia spiritualis, 영의 공동체, 이념의 공동체로인데 이 이념 집단이 어떤 정치적 공동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갈라디아서에는 그런 것들이 나타나 있지 않는데 사도 파울로스의 로마서에서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황제도 이 집단이 도대체 어떤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공동체라고 하는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더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어휘들을 제공했다. 

이런 외부의 저술가들, 즉 이교도들의 대응에서 호교론자들은 어떻게 대응을 했는가. 호교론자들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일단 처음부터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기독교도였던 사람들은 말하자면 예루살렘 공동체에 있던 사람들이다. 바울 같은 경우는 유대인이지만 처음부터 기독교도는 아니었는데, 바울의 주요한 논쟁 상대들은 헬레니즘 세계의 이런 사상가들이기보다는 예루살렘 공동체에 있는 기독교도, 말하자면 순회하는 설교자들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호교론자의 범주에 들어간다기보다는, 초창기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이 만든 교회 공동체와의 맥락이 있는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호교론자들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로마 세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아니고, 그들은 그러니까 고대 다신교 배경에서 성장해서 이런저런 계기들을 통해서 기독교도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아닌 것들, 그리스 로마 세계의 언어와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 앞서 말한 것처럼 천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유가적 사고 체계 안에서 이해되고 납득될 만한 것으로 그것을 가다듬어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런 역할들을 선교사들이 하기도 했겠지만 중국의 사상가들도 했을 것이다. 결국엔 반란을 일으켜서 망해버렸지만 태평천국도 그런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태평천국을 반란으로만 볼 게 아니라 사상의 맥락에서 봐도 굉장히 독특한 측면들이 있다. 

호교론자들은 pagan이었다가 christian이 된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네들이 사상적으로 떠나온 곳의 사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설득해야 되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사상자원을 가지고 제시하려고 했다. 그래서 외부자들의 사고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 얘기를 듣는 여전히 pagan인 사람들은 그들이 christian이 되어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우리가 전혀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라고 했을 때 뭔가 범주와 간섭을 깨뜨리는 지점들이 있었겠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신》은 바로 그런 측면들을 다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는 1984년에 초판이 나왔다. 원래는 이 책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 윌켄이 의도했던 책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신》이었다. 그러니까 초창기 호교론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얘기했는가를 쓰려다 보니까, 호교론자들이 그냥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세계에 이미 있던 사람들에 대응하면서 나왔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미 있던 사람들 얘기를 찾다 보니까 이 책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는 1984년에 나왔고 이것을 쓴 다음에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신》이 2003년에 나왔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신》을 출간하면서 이제 준비가 다 됐으니까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의 2판을 낸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개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윌켄은 자신의 책을 얘기하면서 훌륭한 학자의 전형적인 특징인 선행 연구들을 보는데 두 가지 정도를 거론한다. 로빈 레인폭스의 《고대 다신교인과 그리스도인》(Pagans and Christians, 1987), 번역을 잘한 것 같다. pagan이라고 하는 말을 이교도라고 하지 않고 다신교인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이교도라고 하는 말은 결국 무언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과 다르다 라고 하는 것이니까, 기독교도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까, 어찌 보면 기독교도 중심의 번역어이다. 다신교인이라고 하면 그들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로빈 레인 폭스가 하는 얘기를 좀 귀기울여 볼 만한 게 있는데, 2세기와 3세기는 통념과는 달리 '근심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얘기는 에릭 도즈의 《Pagan and Christian in an Age of Anxiety》를 겨냥한 얘기이다. 저도 '근심의 시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불안의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뭔가 사람들 마음속에 울렁거림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를 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지역 사당과 신전, 축제와 제사, 봉헌과 신탁 이런 것들을 굉장히 열심히 했고, 이런 것들이 시민 공동체, 챕터 2를 보면 여기에 자세히 나오는데, 시민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부심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빈 레인 폭스는 "그리스도교의 성공이 전통 종교의 결점 때문이 아니었다"라고 얘기를 한다. 전통 종교가 뭔가 못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파고들어서 기독교가 성공했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존할 수 있는 바탕이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뭔가 다른 종류의 것이지 반대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고전 문화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해석에 반대한다." 이 얘기는 "그리스도교의 이상에는 다른 동기, 다른 핵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가 고전 문화의 사상 자원들, 그 언어와 사고 체계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dogma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활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속성이라고 하는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보는 것이다. 그 다음에 램지 맥멀렌의 ⟪로마 제국의 고대 종교⟫(Paganism in the Roman Empire, 1981). 레인 폭스의 책은 pagna을 다신교인이라고 했고, 여기 paganism을 고대 종교라고 번역했는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여러차례 말했듯이 번역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저렇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윌켄이 램지 맥멀런의 이 책을 꺼낸 중요한 얘기는 아돌프 폰 하르낙에 관한 것으로, 《최초 300년간의 그리스도교 선교와 확장》(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은 1902년에 나온 책인데 영어 제목으로는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으로 말할 필요 없이 오래된 고전이다, 하르낙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이전에 가졌던 시각에 관해 다루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르낙 책의 결점은 대다수가 고대 다신교 배경에서 성장해서 여러 계기를 통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 호교론자들이 그러한데, 그 사람들이 도대체 그 개종 이전에는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봐서 크게 봐서 이러 이러한 것들이 주제이고 문제다 라는 것을 살펴보고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가 도대체 그리스도인들과 비판자들의 논쟁을 살펴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볼 때 항상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영혼에 기저에 있는 문제들, 앞서 나온 것처럼 '근심의 시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향하게 된 영역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의 문제, 철학의 문제 이런 것들이 예나 지금이나 늘 그렇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사상사를 좌우하는 주제들이다. "신앙와 이성의 관계", 영원한 주제 아니겠는가. 《God & Philosophy》도 이런 주제이다.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또는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형상과 현상의 관계 문제. 그다음에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무로부터의 창조 문제"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 이것은 구체적인 신학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그리고 예수의 위치,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 이것은 삼위일체론에서 나오는 문제이다. 그다음에 성서 신학에서의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 문제" 그다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시민종교"와 같은 문제들. 시민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도 나오는 계속되는 문제이다. 루소라든가 또는 콩트라든가 이런 사람들도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 그다음에 "역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 이건 정말 골치 아프고도 골치아픈 문제이다. 이 주제를 또 다르게 얘기를 해보면 헤겔 같은 경우에는 유한자를 계기로 하는 무한자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라는 점에서 기독교가 역사 종교인데, 역사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성립한 종교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 계시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런 교리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이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 사상사에서 여전히 논쟁점이고 다뤄야 될 주제들인데, 이게 초창기의 호교론자들과 pagan들 사이, pagan and christian의 문제가 그런 것들이다. pagan and christian이라고 하는 주제는 정말 중요한 주제이고 제가 늘 관심을 갖는 것이다. 

내일은 챕터 2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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