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1)

 

2024.04.16 📖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1)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부제가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이다. 원제는 여기 텍스트에다 적어 두었듯이 The Christians as the Romans Saw Them,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도. 이 책은 여러 번에 걸쳐서, 오늘 소개하고, 내일 또 소개하고 그러지는 않으려고 하는데, 좀 찬찬히 꼼꼼하게 설명을 하면서 읽으려고 한다. 비아에서 나온 책들이 대체로 얇은데 이건 좀 두툼해서 350페이지가 넘는다.  오늘은 이 책을 하는 이유 그리고 이 책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을 하겠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은 복 있는 사람에서 나온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이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정말 그동안 공부한 것이 헛거다가 아니라 그동안 공부를 많이 하기는, 신학 공부를 또는 기독교 사상사 또는 기독교의 역사, 교회의 역사, 흔히 하는 말로 교리신학, 조직신학 부분은 그렇게 많이 안 했고, 형이상학을 전공한 사람의 건방진 생각이 있어서, 저는 무엇보다도 사상사, 기독교도 하나의 사상Christian Thought이니까,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The Spirtit Of Early Christian Thought을 읽었는데, 이런 책이 있다 라는 띵한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었다. 

헬레니즘 철학사를 읽으면 기독교 얘기가 없다. 기독교 얘기가 없다가 갑자기 증세로 툭 들어가 버린다. 헬레니즘 시대는 기독교의 시대인데 그게 없었다는 것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에 기독교가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헬레니즘 문명과 기독교가 서로 주고받은 게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헬레니즘 사상사, 철학사라고 하지 않고, 헬레니즘 사상사를 기독교를 빼고 독자적으로 쓸 수가 없다. 또 초기 기독교 역사, 그러니까 300년 정도의 역사를 헬레니즘 사상사를 도외시한 채 쓸 수가 없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나가며"에서 저자가 하는 말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비판자들과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였는지, 또 얼마나 그들에게서 배웠는지 돌아본다면 헬레니즘 문명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방향성을 설정했다고 대답하기 쉽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을 비판하는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인 사상들, 이를테면 그것이 헬레니즘 지중해 세계의 전통 세계이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많이 배웠다. 그렇게 기독교가 배운 것만 생각을 하면 헬레니즘 문명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방향성을 설정했다고 대답하기 쉽다. 그런데 저자는 바로 이어서 "그러나" 하고서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쟁점을 철학에 던졌다." 그러니까 기독교 때문에 그동안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에서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주제들을 철학에서 다뤄야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월적 신 이런 문제들. 플라톤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형이상학의 신theos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 신은 초월적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어쨌거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가서 알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도대체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이라는 게 있다는 말인가라는 그런 문제, 이게 문제가 되는구나 하는 것. 제가 요즘에 자주 얘기하는데, 전통적으로 전해진, 헬레니즘 세계에 전해진 철학 책만 읽고 있으면 자기네 전통에서 마냥 읽고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나온다. 새로운 영역이 확장이 안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쟁점을 철학에 던졌다. 다시 말해서 철학이 풍요로워졌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쓸데없는 얘기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철학이 엉망이 되었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368 그리스도인들이 비판자들과 얼마나 많은 것을 공유하였는지, 또 얼마나 그들에게서 배웠는지 돌아본다면 헬레니즘 문명이 그리스도교 사상의 방향성을 설정했다고 대답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쟁점을 철학에 던졌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면모는 호교론자들의 끈질김에 힘입어 그리스·로마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고대 세계의 종교적, 지적 전통에 새로운 생명력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360페이지를 보면 저자도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와 고전 고대를 걸핏하면 대척점에 두곤 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계몽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때문에 철학이 망가졌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반종교주의는 계몽주의의 1번 특징이다. 그런데 저자 로버트 루이스 윌켄은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쟁점을 철학에 던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면모는 호교론자들의 끈질김에 힘입어 그리스·로마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고대 세계의 종교적, 지적 전통에 새로운 생명력을 선사했다." 이 마지막 문단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또는 철학사를 최소한 읽는 사람으로서 또는 사상사를 폭넓게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 로마 전통의 철학과 기독교가 만나고 그렇게 되면서 서로 굉장히 강력한 논쟁들이 있었고, 그런 논쟁들을 그런 논쟁들을 읽어봄으로써 서양의 철학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융합의 지점, 혼란스럽지만 그 혼란스러움이 점차로 체계를 잡아가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속된 표현으로 적에게 배우는 그런 단계로 들어선 시기, 그 시기를 우리가 이제 충실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지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도 꼭 한 번쯤은 읽어봐야 될 만한데,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그 실천의 어떤 면모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는 또는 뚜렷하게 해나가는, 말 그대로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의 종교로 습연되어가는, 스며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은 사상사의 저작이긴 한데 철학과의 교류 같은 부분은 좀 취약하다. 그에 비하면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는 그런 측면들을 보여준다. 이게 이 책을 《철학으로서 철학사》를 읽고 그다음에 또 그 혼용된 부분들, 헬레니즘 철학 그 부분들에 대한 보충 교재로 또는 하나의 독자적인 레퍼런스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360 계몽주의는 그리스도교와 고전 고대를 걸핏하면 대척점에 두곤 했다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게도 플리니우스, 통치자이다. 그리고 장례 상조 단체는 당시에 헬레니즘 세계에 널리 사람들에게 종교 단체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차이와 유사점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다음에 경건한 박해자들은 아주 재미있는 부분인데, 우리는 기독교라고 하면 무조건 박해받은 사람들이고 기독교를 박해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들은 현대 한국의 21세기 기독교가 보이는 괴이한 또는 괴랄한 행태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이 경건한 박해자들을 보면서 통쾌한 맛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 꼭 그렇게 볼 만한 건 아니다. 왜 기독교가 박해받았는가. 한편으로 보면 박해받을 짓을 했다. 챕터가 다 해서 7개이니 오늘까지 포함해서 최소한 8번은 할 것이다. 그다음에 갈레노스 ─ 과학차 그리고 켈소스, 오리게네스와 켈소스, 왜 켈소스라고 했나를 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저자가 들어가는 말에 써놓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로마', '로마인'은 로마 제국과 그 거주민을 지칭하며 언어와는 관련이 없다. 여기서 다루는 대다수의 인물은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 오리게네스와 켈소스의 대립 논쟁이 아주 유명하고, 포르퓌리오스는 굉장히 중요하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보면 포르퓌리오스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신학의 역사, 교리 역사의 측면에서 보면 켈소스가 중요하다.  그다음에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도 개종자이고 중요하다.  

31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로마', '로마인'은 로마 제국과 그 거주민을 지칭하며 언어와는 관련이 없다. 여기서 다루는 대다수의 인물은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

아래 링크를 걸어놨는데, 비아 출판사의 편집장이 「오늘의 신학 공부」를 운영하는 사람과 비아 언박싱이라고 해서 대담한 것을 보면 저보다 더 신학 공부한 사람이니까 더 친절하고도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로버트 루이스 윌켄의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을 읽고는 사상사로서의 신학 공부를 좀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안 했다. 지금은 에피쿠로스주의, 스토아주의, 사도 바울을 봐도 그렇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 이런 사람들도 다시 읽게 된 그런 계기가 되었다. 

몇 가지 부수적인 얘기를 좀 해보자면 일본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기독교라고 하는 건 정말 한국 사람이 알고 있는 만큼도 알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일본의 기독교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엄청나다.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를 받아도, 이마미치 선생은 천주교 신자인 것 같은데, 그런 걸 하는 걸 보면 연구가 엄청나다. 《중세 사상사》를 리젠후버가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이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자는 엄청 많은데, 일본에 비하면 말할 수도 없이 많다, 기독교에 대한 공부는 거의 안 한다. 그리고 외국에서 유학한 신학자들 많은데, 독자적으로 뭔가를 해보려는 그런 건 거의 없다.  

한국에서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한국에서 학위를 하고 뭘 한 사람들이 한국식으로 이해하고 독자적인 어떤 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한다. 저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인간 중에 하나인데, 기독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 이런 것들은 그 신자들도 공부를 안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은 더욱이나 안 하고, 신자들은 그걸 왜 해 믿음이면 됐지 하는 그런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scholastic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데, 과학적인 기독교 공부, 이런 것들이 거의 온전히 안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개론을 제가 소개할 수도 없고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이 책을 읽어보다가, 반론이 가장 치열하게 제기되었던 시기가 바로 이때가 때문에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책을 한번 좀 꼼꼼하게 읽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한 번 그냥 저를 믿고 함께 읽어보면 어떨까 한다.  '난 기독교라고 하는 건 까맣게 모르겠어. 그리고 맨날 불신지옥 예수 천국 아니야' 이렇게 하던 분들', 건전한 상식인도 기독교라고 그러면 아주 치를 떠는 분들 많다. 왜냐하면 저지른 패악질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아니다 라고 제가 감히 부정할 수는 없다. 기독교도로서 부끄러운 지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래도 한 번쯤은 재고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소개하고 함께 읽어볼 기회를 가져보려고 한다. 당장 내일 또 계속해서 읽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기회가 되는 대로 좀 촘촘하게 읽어보려고 한다. 몇 번에 걸쳐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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