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Gilson(5), God & Philosophy, preface

 

2024.04.12 ε. Gilson(5), God & Philosophy, preface


지난번까지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의 foreword를 읽었다. 오늘부터는 질송의 preface를 본격적으로 읽어보겠다. exēgēsis는 일종의 강독이다. 기본적으로 《철학 고전 강의》에 있는 내용 정도는 숙지한 상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철학 고전 강의》에서 설명이 이미 된 것들의 레벨들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이 책에 있는 내용에 있는 것만 집중적으로 얘기해보겠다. 

preface에서는 크게 네 가지 정도 얘기를 한다. 첫째가 자신이 다루고 있는 신과 철학God & Philosophy이라고 하는 문제의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그 주제를 어떤 식으로 다루는가 하는, 둘째가 강의들의 주제가 무엇이고 그 탐구방법론을 얘기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로는 자신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학문 이력. 그런데 이 학문 이력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난 이러이러한 것을 공부했다 라는 것, 철학 공부를 하는 방법이다. 질송은 프랑스의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거기서 7년 동안 있었는데 재미있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나서 철학을 공부하고자 공립대학으로 갔는데 자신을 가르친 철학 교수가 빅토르 쿠쟁의 제자였다고 말한다. 철학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나는 요러요러한 공부를 해왔다 라고 하는 게 사실은 그 사람의 학문의 형성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어떻게 해서 공부하게 되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하게 하는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하면 안 되고 어떤 것을 해야 하고 하는 것, 누구를 읽어야 하고 누구를 읽지 말아야 하는가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게 학문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도 다 그렇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요즘에 Deutsch Idealismus를 집중적으로 didakhē를 해보려고, 저번에 슐레겔을 하면서 슐레겔이 피히테의 fundamentalism을 근본주의라고 하는데 기초주의이다. 사실 그것은 독일 관념론이 없는 용어인데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어쨌든 예전에는 몰랐는데, 칸트는 독일관념론자가 아니라 명백하게 과학적 계몽주의자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와는 조금 다른, 프로이센적인 경건주의적 계몽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칸트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이다. 여기서도 그러니까 질송이 신과 현대사상에서 칸트와의 대결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제기한다. "오늘날 신 문제의 위치는 임마누엘 칸트와 오귀스트 콩트 사상이 완전히 좌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는 칸트를 읽어 가서는 위안sacritatis을 얻을 수 없다. 계몽주의를 읽고 나서 우리가 고통받는 지점이 그것이다. 완결된 진리에 대한 한없는 접근, 안내만 있을 뿐이지 그것에서 sacritatis는 이를 수 없다. 철학적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여튼 칸트는 독일관심론 철학자가 아니니까 피히테부터 시작해서 쉘링, 헤겔을 대게 보고, 한 사람을 더 집어넣는다 하면 아주 철없던 시절에, 철없다는 것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철학적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기에, 칼 마르크스를 거기다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유의 왕국이나 필연의 왕국 이런 것에 대한 얘기들을 마르크스가 하고 있는 것을 이 사람이 정말 순박하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예전에는 피히테를 그렇게 열심히 안 읽었고 무심코 봤는데 피히테가 굉장히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요즘에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철학사에서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무엇을 공부하면 안 되는가 이런 과정이 학문 이력인데 그게 동시에 철학 공부의 방법이 된다. 그다음에 데카르트를 읽어서 어떤 고통이 있었는가. 그리고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철학 고전 강의》에서도 다루었고 여기 질송이 얘기하는 것처럼 "스콜라 철학의 형이상학을 서툴게 만지작거린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이건 굉장히 많이 공감하는, 데카르트는 좀 서툴게 만지작거린 것이다. 데카르트는 철학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데카르트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다. 


THESE four lectures deal with but one aspect of the highest of all metaphysical problems, and they deal with it on the basis of but a very limited number of historical facts, themselves rather taken for granted than technically established. The problem is the metaphysical problem of God. 

공부 방법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는 어떤 과정, 강의의 의도. 우선 한번 읽어보겠다. 이 주제는 무엇인가. 이 책 18페이지에 있는 것처럼 "형이상학의 문제의 최고점the highest에 대해서 한 측면을 다룬"다. one aspect of the highest of all metaphysical problems,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 중에서 최고에 대해서 다룬다. 형이상학에서 최고의 문제다. 최고의 문제는 가장 높다는 것이니까 highest라는 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정말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형이상학은 이것 저것 따져서 많이 다루고 있는 학문이기도 하지만 형이상학은 분명하게,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철학 고전강의》에 있는 얘기이니까 그것은 다시 얘기할 필요는 없고,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여기저기 듬성듬성 놓여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이렇게 띄엄띄엄 보는 게 아니라 존재론은 명백하게 hierarchy를 전제한다. 즉 존재의 위계질서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있다. 그러니까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전제한다. 그렇다면 가장 최고 지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또 플라톤은 그것을 eidos,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는 그것을 신theos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의 문제의 최고점이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학에서 최고의 문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뜻도 되지만 최고의 위계, 위계질서의 가장 최상위에 있는 존재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이 강의들의 주제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당연히 신이고, "전문적으로 확립되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매우 제한된 수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다룹니다."는 말은 조금 이따 더 자세하게 얘기하기로 하고, 그것이 "신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영어 문장이 metaphysical problem of God인데, of를 “관한”이라고 해도 되고 of를 동격으로 봐서 신이라고 하는 형상학적 문제, 신은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이다. 신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라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룬다고 이해해도 괜찮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결코 번역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interpretation을 하는 것이지 translation을 하지는 않는다.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룬다. 형이상학적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우주의 법칙 이런 것들, 우리는 우주 안에 들어있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우리를 넘어선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상정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다루는 것, 그게 바로 이제 형이상학의 문제이다.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 또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 역사라고 하는 것,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사건들이 역사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아우르고 있는, 그것들 너머에 있는 뭔가를 역사Geschichte라고 한다면 히스토리컬 이벤트들이 아니라 그 히스토리 자체가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역사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 역사에 관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라 역사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이 되겠다.  

그런데 이 주제는 taken for granted,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철학사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영어 문장은 very limited number of historical facts. themselves는 historical facts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철학사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철학사를 공부하는데 형이상학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다음에 형이상학을 공부하는 것인데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얘기이겠다. 즉 철학사에서는 신 관념 그리고 신 존재 증명 사이의 관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신 관념과 신 증명의 관계, 신이라는 관념과 신존재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관련된 문제이니까 아주 당연하게도 이 문제는 역시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강의들의 주제는 그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는 철학사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가장 일반적인 접근 방법은 신존재증명과 신이라는 관념 사이의 관계다. 형이상학의 여러 문제들이 있는데 질송이 이걸 다루겠다고 한 것은 상당히 도전적인 것이다. 누구나 다 이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내가 형이상학 연구자다 라고 하면 이 문제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주 많은 논변들이 여기에 있다. 아주 흔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다루기가 어렵다. 그리고 독창적인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다. 남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 것들을 해야 독창적인 것이 무언가 나올 텐데 그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만큼 도전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이미 신존재증명과 신이라는 관념 사이의 관계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은, 이렇게 특별히 집중할 필요가 있겠는가, 새삼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겠는가 할 정도로 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나선 것은 굉장히 도전적인 것이다. 이건 사실 초심자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고 대가 중에서도 대가인 사람들만 다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저 역시 형이상학 전공자로서,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갈래가 독일관념론자들이니까 독일 관념론 전공이라고 하면 형이상학 전공자이다, 신존재 문제는 굉장히 큰 문제이고 사실 다루기가 굉장히 까탈스러운 문제여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도전을 해본다든가 이런 것은 저도 내키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은 질송 같이 정말 석학 중에 석학인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의 저변을 넓혀가고 그다음에 내가 평소에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런 형이상학적 측면들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올바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The approach to this philosophical question is the same as I have already presented in The Unity of Philosophical Experience (Scribner, New York, 1987) and i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Scribner, New York, 1988). It consists of extracting from the history of past philosophies the essential data that enter into the correct formulation of a philosophical problem, and of determining, in the light of such data, its correct solution. 

그러면 "이 철학적 물음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것이 탐구 방법론이다, "이미 『철학적 경험의 통일성』과 『중세 시대의 이성과 계시』에서 제시한 것과 같습니다." 『철학적 경험의 통일성』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 상응해서 나온 것이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단박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하는 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서 논변을 해나가는 것, apodeixis이다. 논변을 해 나가는 게 이성이다.  그러니까 이성과 계시라고 하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신의 계시가 있다. 그리고 그 신의 계시를 이성으로서 논변해 나간다. 계시만 있으면 그것은 허황된 것이고 맹목적이다.  이성만 있다고 하면 뭔가 계속 끊임없이 논쟁을 하고 논변을 펼치고 설득을 하는데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성이 밝혀 보이지 못한다, 최종 telos를 밝혀 보이지 못한다고 하면은 완결이 일어나질 않는다. 그래서 이성과 계시라고 하는 것은 서로 상충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질송이 지금 여기 4개의 Lecture에서 사용하고 있는 접근하는 방식, approach to this philosophical question은 이미 자기가 했던 것인데, "지난날 철학들의 역사에서 철학적 문제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한 핵심 자료를 추출하여, 그 자료를 가지고 올바른 해결책을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이다. extract하고 determine 이 두 가지가 방법인데 먼저 extract를 보겠다. "철학들의 역사에서"는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철학들의 역사니까, 철학사에서 본질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추출해낸다. 그런데 essential data that enter into the correct formulation of a philosophical problem, 철학적 문제에 관한 정확한 공식화, 철학적 문제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 자료를 추출한다. 말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일단 철학사를 검토한다. 철학사는 많은 철학사가 있는데 세상의 모든 철학사는 대체 불가능하다. 심지어 저는 전혀 추천하지도 않는 러셀의 철학사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철학사를 쓰는 사람이 이것은 철학이고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이건 철학사에 집어넣어야 되고 이건 철학사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 라고 결정하는 건 그 철학사를 쓰는 사람이 무엇을 철학이라고, what is philosophy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들의 역사에서 철학적 자료를 추출한다고 하는데, 조금 보충 설명을 해보면, from the history of past philosophies이니까 "여러 종류의 철학사에서"라고 얘기를 해야 되겠다. 어떤 철학사에서 이것을 끄집어낼 것인가. 이를테면 제가 공역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가 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는 존재론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이다. 대체 불가능하다. 지금 현재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와 있는 철학사 책 중에 존재론이나 형이상학 중심으로 쓰여진 철학사는 번역되어 나온 게 그거밖에 없다. 그러니까 여러 철학사들을 검토해서 A라고 하는 철학사에서는 이 철학사를 쓴 사람이 무엇을 철학으로 간주해서 거기에 집어넣었는가 그리고 B라고 하는 철학사에서는 무엇을 또 넣었는가를 검토를 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철학사를 검토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을 검토함으로써 이제 자료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이게 두 번 거르는 셈이다. 철학사가가 철학사를 써놓았다고 하니까 그 철학사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간주해서 철학사에다 집어넣었을 것이다. 가령 러셀의 철학사에는 신존재증명 얘기는 없다. 그러니까 그것만 읽고 끝낸 사람은 신존재증명이 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었다는 것 자체를 모를 수가 있다.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검토 대상이 되는 철학사도 굉장히 다양한 철학사를 읽어야만 한다. 철학사는 아주 많은 종류의 철학사를 읽어야 한다 하는 것이 그래서 철학사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대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렇게 읽은 것들을 정리를 하면,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탐구한 것들을 자료로 만들어서 정리를 하면 correct formulation of a philosophical problem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 이러이러한 것들이 철학적인 문제구나, 이것은 반드시 다뤄야 되는 문제구나 하는 것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겠다. 그때 철학적 문제라고 하는 것은 오늘 여러 차례 얘기하는 철학자들이 문제 삼은 것들, 그런 것들이 철학적 문제이다. 그러면 그들이 문제 삼지 않은 것들은 철학이 다룰 수 없는가. 왜 A라고 하는 철학사는 이것을 문제로 삼고 B라고 하는 철학사는 저것을 문제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A, B, C, D, E, F, G부터 Z에 이르기까지 철학사를 다 읽어봤더니 안 다룬 문제가 몇 개 있더라, 그래서 나는 이것을 다뤄서 철학사의 문제로 집어넣고자 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근거로 그것을 철학사의 문제로 넣을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있겠다. 어떤 것을 참조하고 어떻게 formulate를 해서 문제화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 이것이 철학사에서 어떤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또 설득력 있게 제시를 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어떤 철학사만 읽으면 다른 건 읽을 필요가 없어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철학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오래된 학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도대체 철학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어떤 주제들을 철학사에 편입시킬 수 있는 궁리를 해보는 것, 그것도 우리가 갖춰야 할 어떤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질송은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당연히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사들로부터 essential data들을 extract 했을 것이다. 이제 그런 것들을 놓고 검토를 하는 것이다. 추출된 데이터를 근거로 삼아서 올바른 해결책, determining, in the light of such data, 그런 자료들의 관점에서, 그 자료들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료들을 근거로 삼아서 그런 말이다. 서로 상충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고, A라는 철학사에서 추출한 자료와 B라는 철학사에서 추출한 자료가 전혀 서로 incoherent한 것들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것이 상하의 논변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correct solution, 올바른 해결책을 결정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solution이라고 하는 말을 생각을 해보면, 무엇을 solution이라고 할 것인가, correct solution이 갖춰야 될 조건들이 무엇일까를 한 번쯤 여기서 생각을 해두고 가는 게 좋겠다. 

뒤에 물론 바로 이어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필레보스》, 《파르메니데스》 그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권에서 이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니까 분명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correct solution을 제시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읽어보면 correct solution의 사례들을 우리가 알 수 있겠는데, 올바른 해결책이라는 건 도대체 어떠어떠한 것들을 구비하고 있어야만 올바른 해결책인가는 한 번쯤 생각을 해봐야 되겠다. 분명히 이것은 유효성 있는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철학에 있어서 올바른 해결책은 음식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해결책과 분명히 영역이 다르다. 어떤 것이 더 훌륭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영역이 다르니까 그렇다. 첫째는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에서 그것을 잘 다루기 위해서, 신이라는 관념과 신존재증명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루니까, 그 두 주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는지 그다음에 서로 앞뒤로 말이 맞아야 된다고 하는 정합성을 갖춰야 되겠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측면에 정확하게 호소하는 것, 그런 것들을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일단 막연하게라도 올바른 해결책의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두고, 이제 질송이 네 번의 lecture를 통해서 올바른 해결책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이러한 것들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그러니까 질송이 분명히 여기서 correct solution이라는 말을 썼을 때 의도하고 있는 바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이것이 철학적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다. 철학적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학사를 검토해서 철학사에서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들을 추출해서 그것을 가지고 correct solution을 determine하는 것이 이게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어찌 보면 철학사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니까 철학자들 사이에서 철학자들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는, 나쁘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식 또는 관점의 사각지대 속에 들어갈 수 있겠다. 다른 사람, 제3자들은 예를 들어서 논리실증주의자들, 가령 A. J. 에이어가 쓴 《Language, Truth, and Logic》을 보면 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라는 섹션이 있다. 거기에 보면 형이상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말한다. 신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가지고 질송은 4번에 걸쳐서 강연을 했는데,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것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라고 얘기를 해버린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는 무의미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연관을 만들어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nonsense problem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칼 포퍼가 말한 falsification이라든가 verification과 같은 검증불가능한 언명들, 경험적 데이터로써 검증불가능한 언명들은 nonsense한 것들이다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이렇게 형이상학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는 그런 아주 통렬한 비판, 제거해야 된다, 무너뜨려버려야 된다 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형이상학자들이 자기네들끼리의 관점의 사각지대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남들이 보기에는 한심하고 황당하고 넌센스한 문제라고 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다 라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지금 질송도 조금 걱정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접근법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필레보스》, 《파르메니데스》대화편에서 볼 수 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1권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었다 라고 얘기를 한다. 그런 방법론에 대해서는 참조적으로 다음에 얘기를 하기로 하고, 우선 질송의 얘기인 탐구방법론의 선례에 관한 그리고 그 탐구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위험한 경지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면, "이 방법 자체에 내재된 위험이 있다"고 얘기한다. 


Naturally enough, it is attended by dangers of its own that arise from its very nature. First of all, it can deteriorate into a mere dialectical game wherein philosophical dogmas are debased into philosophical opinions, each of which is successively shown as true from its own point of view and as false from the view point of any other one.  

by dangers of its own that arise from its very nature, 본성상 생겨나는 위험이 있다. 이 방법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위험은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처럼 철학자들끼리 중요하다고 여긴 것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중요하다고 여긴 문제들을 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논변들을 검토해 보고 있다는 것이 이 방법의 본성이다.  A라고 하는 철학자, B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는데, A라고 하는 철학자가 이건 틀림없이 맞다 라고 얘기한 것을 B라고 하는 철학자는 다른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A의 말도 옳을 수 있고 B의 말도 옳을 수 있다 라고 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변증론의 유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변증법 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로 되어 있는데, dialectical game, 서로 말꼬리를 계속 주고받고 이런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philosophical dogma와 philosophical opinion의 차이를 보면, dogma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규정된 correct formulation이다. 일반적으로 dogma라고 하는 말은 사실 독단이라는 뜻으로 많이 번역이 되어서 쓰이는데, dogma라고 하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교조적인 것이다. 뒤에 "철학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는 최악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얘기가 나오는데, 무엇보다도 philosophical dogma라고 하는 것은 정통적 교설이다. A라고 하는 철학자가 정통적 교설를 제시했는데 그것에 대해서 누가 반론을 제기했다고 하면 그리고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그 반론을 제기하게 되면, 그 dogma 즉 correct formulation인 dogma가 논박의 여지가 남아 있으며 더 이상 진리 값의 정당화를 갖지 못하는 진술statement로 격하되면서 philosophical opinion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기존에는 똑같은 언명이었던 것이, 기존에는 philosophical dogma였던 것이 반대 논변이 제기됨으로써 philosophical opinion이 되고 그렇게 되어 끊임없이 opinion과 opinion들이 난무하는 사상의 배틀필드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opinion과 opinion이 계속해서 만나고 또 다른 opinion이 덧붙여지고 하게 되면 끝없는 dialectical game, 변증론적 유희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질송도 얘기하는 것처럼 그 사례가 바로 그 "아카데메이아의 철학적 방법에서 나타났고, 신아카데메이아에 의해서 최고조에 이릅니다." 플라톤 이후에 아카데메이아의 학파 전개 과정을 보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 이것도 그냥 참고할 것이니까 다음에 얘기를 하겠다. 만약에 philosophical dogma가 philosophical opinion의 배틀 필드로 들어가게 되면 철학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개별적 의견들의 묶음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송도 지적하고 있듯이 "가지각색의 철학들의 역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사라고 하는 것은 그저 다양한 철학적 견해들을 보여줄 뿐인 것이라고 하면 철학사라고 하는 것은 완결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다양한 철학자들의 의견들을 모아 놓은 것이 철학사가 된다. 그러면 이제 철학 연구자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그렇게 모아 놓은 것으로써 철학사가의 임무는 끝났다. 철학사가 임무는 끝나고 질송은 철학 연구자니까 철학적 정식화를 시도하는 것이고, 그런 텍스트들에 근거해서 거기서부터 extract를 해서 어떤 것이 philosophical dogma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determine해줘야 된다. 그러면 철학사를 써서 역사의 소임이 끝난 자리에 거기에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으로서의 철학이 개입해서 철학적 정식화를 시도한다는 것이 철학의 고유한 과제일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철학사를 쭉 쓰면서, 철학사를 서술해 나가는 과정, 즉 수많은 opinion들을 계속 보여주면서 그렇게 검토해 나가면서 동시에 철학적 정통 교설philosophical dogma을 검토해 나가고, 결국 그 철학사를 다 쓰고 나니까 그런 philosophical dogma가 딱 정립되어 나왔다, 즉 철학사를 다 읽고 나왔는데, 철학사는 그저 많은 철학적 학설들의 모음이라고 여겨서 그걸 읽었는데, 읽고 났더니 philosophical dogma가 무엇이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면 그 철학사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한 셈이다. 수많은 철학적 견해들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그 opinion들 중에서 어떤 것들이 dogma일 수 있는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철학사가 된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철학이라고 하는 philosophy as search의 역할을 한 것이니까 그것을 우리는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라고 얘기할 수 있겠다. 철학사이긴 한데 동시에 philosophical dogma를 정립시키는 철학사이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라고 하는 게 바로 긍정적인 의미로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그런 것일 텐데 이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철학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기는 하는데 그게 최악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dogmatic philosophy, 이건 교조적·독단적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계시신학revealed theology이다.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정해진 기준이 있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기준으로 삼아서 그것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다 배제하는 것이다. 논변이 필요치 않다.  기계로부터의 신deus ex machina이라고 하는 논변 방식을 취해서 해나가는 것이 바로 교조적 철학dogmatic philosophy이다. philosophical dogma와는 다른 말이다. 그래서 질송도 최악은 dogmatic philosophy가 취하는 방식이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책에서는 참이라고 상정한 특정 가설이 다른 모든 것의 참·거짓을 자동으로 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정당하게 적용되는 앎의 질서는 단 하나뿐입니다." 이때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식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식이다. "이제 이것으로써 오류는 제거된다Per hoc autem excluditur error." 이것으로써 라고 할 때 이것은 신의 말씀이다. 성서와 맞지 않는다고 하면 오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계시신학과는 달리 철학에서는 이렇게 기계로부터의 신을 가지고는 할 수 없고 essential data들을 가지고 논변을 제시해야만 그것이 정당하게 배제될 수 있는 것이겠다. 번역본 20페이지를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는 여러 가지 철학적 물음들에 대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올바르게 식별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해할 수 있게 하면, 철학들의 역사는 그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그렇다. 철학의 역사는 이제 거기서 끝난다. 그런데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가 답변을 했다면, 철학 고유의 일은 이러한 문제들 자체에 필수적인 자료를 가지고, 이들이 제시한 답변을 판단합니다." 계시신학에서는 이런 것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시신학을 연구하는 책들을 읽어보면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이 읽기에는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철학을 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한 다음에 곧바로 근대로 넘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질송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중세철학도 계시신학이 아닌 철학의 역사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계시신학은 21페이지에 있는 것처럼 "신의 말씀은 신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Begging the question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Selbstreflexion, 내가 말했기 때문에 참이야 라는 식의 자기 회귀의 오류에 빠져 있다. "철학자의 말은 반대되는 진술을 잘못이라고 배제할 수 없"고, "문제를 올바르게 상정하고 그 문제 해결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정당하게 다루는 데 성공해야 반대 의견이 배제됩니다." 이것이 철학적 논변이다. 신학적 논변은 선포하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질송은 자기가 토마스주의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철학을 토마스주의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반론이 곧바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고 철학적 논변을 제시하겠다고 얘기한다. 이 강의가 그런 점에서는 신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공부하기에 아주 좋은 바탕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할 수 있다. 

오늘은 탐구방법론과 주제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여기서 질송이 참고적으로 거론한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필레보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권, 그리고 플라톤 이후에 아카데메이아 학파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심각하게 중요하지 않는데 그 다음 시간에 한번 정리를 해서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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