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ε. Gilson(4), God & Philosophy, foreword

 

2024.03.31 ε. Gilson(4), God & Philosophy, foreword


펠리칸은 질송의 작업을 우선 scholarly genres를 잡았고 두 번째로는 lecture를 얘기했다. 그 lecture는 disputatio이다. 그런데 그런 lecture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가령 다른 lecture인 『철학적 경험의 통일성』과 같은 lecture, 이런 lecture들은 그것 자체로 이제 disputatio가 되겠지만 사실은 그런 lecture 중에서도 이런 God & Philosophy와 같이 작업한 것은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대 순으로 고찰을 한 것이고 내용은 신 개념에 관한 철학적 교설의 전개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과 하고 대비되는 『철학적 경험의 통일성』과는 조금 구별된다. 신과 철학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대 순으로 고찰했다 라고 보면 이건 철학사적인 작업 또는 사상사적인 작업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철학하기that style of doing philosophy"그리고 lecture 를 한 것과는 조금 구별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고 철학사 작업, 사상사 작업에 훨씬 가깝다. 그래서 펠리칸은 여기서 사상사 작업의 방법론 하나를 더 제시한다. 그것을 "서양 철학사 전체와 대화하는 철학적 담론"이라고 얘기를 한다. 

As this book shows yet again, Gilson was, perhaps above all, a philosopher who─at time when so many of his philosophical colleagues particularly in the English-speaking world seemed to him to have undergone a frontal lobotomy as part of their graduate training─followed the otherwise contrasting models of Aristotle and of G. W. F. Hegel by carrying on his philosophical discourse as an ongoing conversation with the entire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펠리칸이 보기에 질송이, 일단 영어 문장은 a philosopher who followed the otherwise contrasting models of Aristotle and of G. W. F. Hege로 되어 있는데 "서양 철학사 전체와 대화하는 철학적 담론"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김진혁 교수는 번역을 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모델을 따랐던 철학자"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otherwise가 들어있다. 번역이 틀린 건 아닌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과는 대조적인 어떤 모델을 따랐던"으로 보는 게 적당치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먼저 헤겔부터 얘기를 해보면 헤겔은 서양 철학사 전체와 대화하는 철학사를 썼다. 철학사를 쓰기는 했는데 전체와 계속해서 대화하는 철학적 담론을 펼쳐 나간 건 맞다. 그런데 헤겔은 자신이 일정한 해석의 관점을 정해놓고 그것의 목적론적인 철학사를 썼다. 그런데 앞에서 펠리칸이 얘기하기를 질송은 그런 목적론적 철학사를 쓰지 않았다 라고 얘기를 했으니까 헤겔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좀 곤란하지 않겠나, 헤겔과 대조되는 모델을 따랐다 라고 말하는 게 적당치 않겠나 생각해본다.  그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 것 같긴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이 어떤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 선대 철학자들이 뭐라고 했는가를 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도 나름대로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종의 사상사를 전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이 과연 헤겔과 유사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가끔 이렇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취사선택을 많이 한다. 자기가 제시하고자 하는 개념을 위해서 선대 철학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전체와 대화하기보다는 자신의 개념을 뒷받침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개념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그런 논변들만을 가져다가 쓰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서양 철학사 전체와 대화를 했다 라는 점에서는 맞는데 과연 그들의 모형을 가지고 작업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을 고려를 해봐야 될 것 같다. 이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서양철학사 전체와 대화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것을 펠리칸은 두드러지게 강조하기 위해서 특히 영어권의 철학 연구자들이 전두엽 절제술frontal lobotomy을 받은 것과 같다 라는 표현을 하는데, 이 전두엽 절제술은 감정이 제어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전전두엽이다, 지금은 약물도 있고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수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제로 시행되고 있는 수술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소극적인 의미로는 감정의 제거인데 판단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철학사 전체와 대화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철학사적인 사태들을 가지고 논리적인 분석만 해버린다든가 그것이 등장한 시대적 맥락을 완전히 소거한 상태에서 논리적인 분석만 하는 등, 그런 것들이 영미 철학자들이 주로 했던 작업이다. 질송의 시대에도 한참 그런 것들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 보면 철학이 궁극적으로는 논리학으로 귀결되거나 아니면 철학에서 인식론적인 논의들만 가져다가 하게 되는 그런 경향이 있게 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모형을 따랐는가, 그러니까 그들의 모형을 따랐다는 것은 서양철학사 전체와 대화했다는 점에서 따랐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은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했던 바를 목적론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선행하는 철학자들을 취사선택을, 물론 다 취사 선택을 해야 되지만, 자신의 논변에 유리한 것들만 선택했다는 혐의가 굉장히 강하다. 특히 헤겔의 철학사를 읽어보면 그런 점들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런 점에서는 그들의 모형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the suspension of disbelief" that constitutes the essence of poetic faith as well as a methodological technique for the history of ideas, he was able, by a powerful combination of imagination with intellect, to enter into the thought world and the philosophical presuppositions of thinkers with whom he disagreed in a fundamental way, and to recognize the totality of a system rather than this or that individual thesis of the system. 

특히 펠리칸은 사무엘 테일러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개념을 가져다가 질송의 작업을 규정한다. 물론 질송은 콜러리지의 표현을 인용하지 않았다. 펠리칸이 얘기하기를 시적인 믿음의 본질essence of poetic faith이자 사상사history of ideas의 방법론technique, 즉 불신의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이다.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말은 콜러리지가 《Biographia Literaria》에서 사용한 말이다. 시적인 믿음을 구성하는 것이 "불신의 유예"이다. 이 "불신의 유예"라고 하는 말은 문학평론에서는 널리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이것을 펠리칸이 가져다가 얘기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일단 우리가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개념에 직면했을 때 이것을 있는 그대로 단어를 한번 해석을 해보자 하면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특정한 테제를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뭔가를 믿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뭔가를 믿고 있는 것은 있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의 대조적인 개념으로 불신이 등장한다. 내가 belief를 가지고 있고 그 belief에 대립되는 것들을 식별해내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테제에 대한 신념을 전제하고 있는 게 disbelief이다. belief가 있기 때문에 disbelief 있다. 그런데 콜러리지는 그런 disbelief를 갖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에 다르게 말하면 belief의 유예이기도 하다. suspension of belief,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후설의 현상학에 보면, 일단 '괄호친다'고 한다. [번역문은] 중지라고 말했는데 중지라고 말해도 되고 유예라고 말을 해도 되겠는데 중지라는 건 이제 더 이상 안 한다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 유예라고 하는 건 잠시 보류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기는 있되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을 유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suspension은 유예라고 이해하는 게 훨씬 강하다.  불신의 중지라고 하면 뭐든지 다 믿어야 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 있는데 그 신념belief에 어긋나는 듯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어떤 belief를 만났을 때 그것들을 무작정 불신disbelief하기보다는 일단 나의 신념을 유보하고, 유보된 이 신념을 간직하고는 있되 방법론적 회의주의라는 것, 일단 나는 저 신념도 일단 검토를 해본다 라는 태도로 접근해 가는 것이다.  

그것을 펠리칸은 다시 언급해서 말하기를 combination of imagination with intellect라고 했다. 이것을 [번역문은] 상상력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상상력이라고 번역을 하면 우리는 판타스틱한 것을 생각할 수 있으니 imagination이 나오면 구성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다. 구성력과 지성을 강하게 결합한다. 그러니까 suspension of disbelief를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서 말해보면 구성력imagination과 지성intellect을 강력하게 결합한다. imagination은 구성력인데 일단 하나하나 낱낱이 탐구하는 것은 지성으로 한다. 그다음에 그런 것들을 이리저리 유동적으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유동성Spiel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춰보는 것이 구성력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단 자신이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상가들의 사유 세계와 철학적 체계들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있다. to enter into와 to recognize. 이 두 가지를 하는데 그 도구가 combination of imagination with intellect이다. 기본적으로 구성력과 지성을 가지고, 지성은 분석력이라고 할 수 있고 구성력은 종합을 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다. intellect는 분석을 하는 것이고 imagination는 이제 종합을 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항상 서로 교차하면서 작동을 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그런 imagination과 intellect 그리고 그것의 결합combination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비판의 무기를 또는 검토의 도구를 가지고서 들어간다enter into. 내가 그동안 이 사람들의 얘기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바이다 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다음에 recognize하는 것이다. 철학사 전체로 들어갔기 때문에 철학사 전체를, 그 안에 들어있는 individual theme, 체계 안에 있는 테제들을 그냥 하나 하나 살펴보는 게 아니라 totality of a system, 체계의 총체성, 체계라는 총체성을 파악한다recognize는 것이 사상사의 방법론이다.  그러니까 사상사를 공부할 때의 핵심은 suspension of disbelief를 해야 되는데, 펠리칸은 굉장히 박식한 사람이니까 이걸 가져다 쓴 것 같은데, 그냥 방법론적 회의주의라고 말을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For he was convinced, as he said in an interview with Frédéric Lefevre, that "the actual philosophy of a Descartes, a St. Thomas, or a St. Bonaventure is always a system of theses in which each thesis, taken in isolation, would destroy the equilibrium of the doctrine if the thesis were left to develop on its own account." 

그런 다음에 프레드릭 레페브르Frédéric Lefevre와의 인터뷰에서 질송은 "언제나 데카르트, 혹은 성 토마스, 성 보나벤투라의 실제 철학은 논지[테제]들의 체계인데, 각각의 논지를 따로 떼어내서 독립적으로 발전시키면 가르침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체계"라고 얘기했다. equilibrium of the doctrine이라고 얘기하면 그것은 바로 교설의 균형이다. 그러니까 데카르트, 성 토마스, 성 보나벤투라 이런 사람들을 전체로서 파악을 해 나가야 된다, Holistic erfassen, 전체로서 파악한다는 것이 바로 사상사 방법론이다. 이것은 본문을 읽어나가다 보면 질송이 여러 차례 이런 부분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다가 펠리칸이 적어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11페이지에 보면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유대 철학자들 그리고 아베로에스와 다른 아랍 철학자들을 그 언어로 읽지 못했다 라는 얘기가 있고 마지막으로 현대 사조에 보면 칸트 및 그의 비평들과 씨름해야 된다고 본다는 얘기가 있다. 질송이 주장하는 기독교 철학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립자antithese는 누구인가. 신과 현대 사상 부분을 보면 그 말이 딱 나온다. "오늘날 신 문제의 위치는 임마누엘 칸트와 오귀스트 콩트 사상이 완전히 좌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은 "신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요, 우리가 자연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가한 잡담일 뿐입니다"라는 얘기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칸트와의 대결이 굉장히 신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대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를 온전히 우리가 읽어낼 수 있으려면 신에 대한 믿음을 유보해야 된다. 그리고 칸트에 대한 불신을 유보해야 된다. 따라서 suspension of disbelief, 즉 칸트에 대한 유예가 있어야 되고, 그렇게 하려면 토마스라든가 데카르트라든가 이런 사람들에 대한 belief를 또 유예해야 된다. suspension of belief를 해야 된다. 칸트 얘기가 지금 여기 있는데 이것은 제가 카드에 적지 않았는데 신과 현대사상 부분에서 그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칸트는 정말 중요하다. 칸트야말로 굉장히 강력한 도전이고 현대 사상에 칸트를 집어넣은 것도 질송이 보여주는 독특한 시각이다. 오귀스트 콩트와 칸트를 현대 철학 사조로, 현대 사상으로 분류한 것이 질송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는 철학자이자 철학사가로서 중세를, 이게 좀 문제가 되었는데, 순정한 철학 연구자들은 중세를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로 가득한 시대로 상상하던 일반적인 경향, 이게 철학사가들이 많이 보여주는 이런 경향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중세 사상가들 사이에 중세를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로 가득한 시대로 상상했던 일반적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학사가들도 suspension of disbelief를 못해낸 셈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중세의 신학을 신학으로서 있는 그대로 연구하지 않고 그것들을 철학사로 환원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믿지 않는 신, 즉 disbelief를 유보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시켜 가지고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질송과 안톤 페기스가 『토마스 아퀴나스 중요 저작선』 The Basic Writings of Thomas Aquinas과 모던 라이브러리 Modem Library의 토마스 아퀴나스 축약판 이런 것들을 하면서 중세철학의 기술적인 자율성 이런 것들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게 다 suspension of disbelief에 해당하겠다. 이런 부분들은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this deeply earnest and yet wistfully gentle little essay on the most important (and often, at least nowadays, the most neglected) of all metaphysical-and existential-questions. 

마지막으로 foreword의 맨 마지막에 질송과 관련한 펠리칸의 개인적인 얘기들이 있는데, 이건 펠리칸을 공부할 때는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주석을 달아볼 만한 그런 내용은 아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얘기했다. 마지막 문장이 "모든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에서 가장 중요한(적어도 오늘날에는 가장 자주 무시곤 하는) 문제를 다루는 심히 진정성 있지만 아쉽게도 약간 작은 이 책", 여기서 문제는 신과 철학God & Philosophy의 문제이다. 현대에는 거의 그 누구도 신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좀 안타까운데 그건 저 개인의 사적인 신념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저는 신의 문제를 그냥 소홀하게 지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펠리칸이 지적한 것처럼 this deeply earnest and yet wistfully gentle little essay on the most important, 가장 중요한 문제, 적어도 오늘날에는 가장 자주 무시되곤 하는, 간과되곤 하는, of all metaphysical-and existential-questions, 이것은 해명을 좀 길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문제라고 하는 건 우리 인간의 감각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한데 이게 과연 실존적인existential 문제인가. 사실 형이상학적인 문제다 라고 하는 것과 실존적 문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개는 서로 대립되는 말일 수도 있다. 실존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 인간이 겪어가는 것, 즉 파토스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이 실존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신 문제도 실존적인 문제인가, 신 관련된 문제가 애매모호하고 아리까리한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신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당장 여기에 살고 있는 나에게 삶을 영유하고 있는 나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굉장히 immediate한 직접적이고 살가운 문이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신이 그렇지 않다. 아니 실존적인 문제인 사람에게도 신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인, 나에게 직접 다가오는, 나를 건드리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게 일시적으로만 건드리는, 즉 신이 보편적이고 언제 어디서나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또는 항상 중요한 그런 주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일순간에 어떤 격정으로 그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 본질로서의 신을 물어보는 것, 그걸 그렇게 전제하고 탐구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인데, 형이상학의 물음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으로서의 신 문제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나의 생生의 파토스에게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문제로서의 신, 이 두 개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고, 양립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항상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metaphysical-and existential-questions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일단 본론을 쭉 읽어나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 preface가프레피스가 길게 있는데 펠리칸의 소개글도 좋지만 질송 본인이 preface에다가 자신의 방법론과 어떤 식으로 자기가 이 주제를 다루었는가를 살펴보기 때문에 preface도 꼼꼼하게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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