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쇼르스케: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세기말 비엔나의 개정판)


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 10점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생각의나무


머리말 

1장 정치와 프시케: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 

2장 링슈트라세와 그 비판자,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즘의 탄생 

3장 새로운 조성의 정치: 오스트리아 삼총사 

4장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나오는 정치와 부친 살해 

5장 구스타프 클림트: 회화와 자유주의적 자아의 위기 

6장 정원의 변형 

7장 정원에서의 폭발: 코코슈카와 쇤베르크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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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세기 유럽은 지적 활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과거로부터 독립했음을 자랑스럽게 주장해왔다. 일찍이 18세기부터 '현대적(modern)'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전투 구호 같은 울림을 띠기 시작했지만, 그때는 단지 '고대'에 대한 반(反)명제로서였다. 즉 그것은 고전 고대(classical antiquity)와의 대비를 시사하는 용어였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현대'는 우리의 삶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과거에 지나간 모든 것으로부터, 지나간 역사 전체로부터 구별하는 용어가 되었다. 현대 건축, 현대 음악, 현대 철학,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과거를 통해, 혹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정신은 역사에 무관심해졌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전통으로 인식되던 역사가 쓸모 없어졌기 때문이다.


19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비엔나는 무역사적인(a-historial)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 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 위대한 지적 혁신자들 - 음악과 철학, 경제학과 건축학, 물론 정신분석학에서도 - 은 모두 자신이 양육된 19세기 자유주의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역사관에 연결되어 있던 자신들의 연대를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끊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위에서 그 문화적 변형 과정의 출발점을 깊이 파고드는 것들이다.


38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비엔나에서 지금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 심리적 인간의 발견을 촉진한 것이 바로 정치적 좌절감이었다. 그 신인간의 등장이 바로 비엔나 자유주의 문화의 정치적 위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바로 내가 다루는 주제이다.


41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를 프랑스나 영국 부르주아와 구별해주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완전히 그들에게 용해되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60 호프만슈탈과 슈니츨러 두 사람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 인간관이 무자비한 오스트리아의 현대 정치 앞에서 해체된다는 것이다. 


65 1860년,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서부 지역에서 정치적 권력 장악을 위한 거대한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중산계급의 문화적 가치와 입헌주의 원리에 맞추어 국가 제도를 바꾸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도시 비엔나에 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 도시는 그들의 정치적 거점과 경제적 수도이자 지적 생활의 빛나는 중심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권좌에 오르는 순간부터 도시를 그들의 이미지에 따라 개조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가 끝나고 권좌에서 밀려났을 무렵 개조 작업은 대체로 성공적으로 완수되어 있었다. 비엔나의 용모가 변한 것이다. 이 도시 개조의 중심은 링슈트라세였다.


151 카밀로 지테와 오토 바그너, 낭만적 건축가와 합리적 기능주의자인 두 사람은 링슈트라세 유산의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구성요소를 나눠가졌다. 전통 수공업자 출신인 지테는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을 미래를 위한 모델로 삼고 공동체적 도시를 복원한다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기 위해 링슈트라세의 역사주의를 끌어안았다. 현대적 기술을 긍정하는 부르주아 출신인 바그너는 지테가 링슈트라세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 즉 도로의 일차적 역동성을 본질로 포용했다. 시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 지테는 도시에 대한 희망을 아늑한 공간, 인간, 광장의 사교적 테두리 안에 두었다. 바그너는 예전의 링슈트라세 진보주의자들보다 더 심하게 도시를 시간의 위력에 복종시켰다. 따라서 도로가 왕이었고, 움직이는 인간의 대동맥이었다.


151 두 이론가 모두 링슈트라세의 역사주의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쓸모의 불편한 종합에 상이한 방식으로 반대했음에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인 도시건설자들이 보유하는 핵심적인 가치 한 가지, 즉 거대한 규모에 대한 충성심은 공통적이었다. 지테는 거대한 공공건물을 더욱 커보이게 해주는 공간 설정인 광장 설계를 통해 자신의 링슈트라세 개혁안을 발전시킬 구체적 방법을 찾았다. 바그너는 예술가로서 도시계획자들의 성공에 대한 판단기준이 획일성을 장대성으로 끌어올리는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171 자유주의자의 개념을 통해 걸러진 견해를 가진, 또 자유주의자의 기대를 안고 역사를 바라보고자 하는 관찰자라면 자유주의의 주도권에 도전하기 위해 일어난 사회 세력을 볼 때 항상 당혹스러워지게 마련이다. 1860년대의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은 유토피아주의자도, 완벽성의 신봉자도 아니었지만 "무엇이 위이고 무엇이 아래인지, ... 무엇이 전진하고 무엇이 후퇴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명료하게 알고 있었다. 사회적 측면에 관해 그들은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위"에 군림해온 귀족계급이 자유주의화되거나, 해롭지 않고 장식적인 쾌락주의로 빠져들고 있다고 믿었다. 자유주의 신조를 구성하는 원리와 프로그램은 귀족을 일컫는 경멸적 호칭인 "봉건층"의 신조를 체계적으로 능가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입헌군주제는 귀족계급 절대주의를, 의회 중심주의는 귀족계급 연방제를, 그리고 과학은 종교를 대체할 것이다.


262 인간의 행동이 어떤 보편적 행동양식에 지배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경험을 형성하는 것은 특정한 문화의 영향이다.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 과정에서 밝혀낸 것은 18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새롭게 승리를 거둔 자유주의의 경험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1867년에 새로운 자유주의 내각이 들어섰을 때 열광하던 기억을 되살렸다.


295 구스타프 클림트 본인은 구식 화풍의 젊은 거장이었지만 일찌감치 시각 예술에서 "젊은이"들이 일으킨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1897년에 그는 기존의 예술인협회에서 "젋은이"들을 이끌고 나와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 새로운 화가 연대가 내세우는 이데올로기 개발에 화가뿐만 아니라 문학인과 좌파 자유주의 정치인도 같은 비중으로 가담했다는 것이 바로 비엔나식 문화 상황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367 심리적-철학적 전복자로서 사회와 교류하려다가 상처받고 움츠러든 클림트는 1908년에는 이미 링슈트라세에서 처음 경력을 시작할 때와 같은 화가-장식가의 역할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의미의 연원으로서의 역사 및 표현의 올바른 양식인 육체적 사실주의로부터의 단절은 역사와 자연에 대한 기대를 배반당한 계급과 그에게 영원한 사실로 남았다. 그는 역사, 시간의 영역은 이미 지나쳐버려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심미적 추상과 사회적 체념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투쟁했다. 하지만 흔히 그리스 신화를 도상학적 안내자로 삼는 분리파의 내면 항해에서 클림트는 심리적 경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다. 클림트가 심미적인 차원에서 비엔나 상류층 세계의 섬약한 둥지 속으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탐험을 새로운 깊이에까지 끌고 나가는 과제는 더 젊은 정신인 표현주의(Expressionist)운동의 몫으로 남게 된다.


377 예술가가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한, 또 그런 것이 보편적 가치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사회에서 허가와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한, 사회 현실은 그가 자신의 문학작품을 두드려 빚어내는 모루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사건들 때문에 역사적인 기대가 파괴되거나 에술가의 가치가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여 추상적이 되면, 호프만슈탈이 말한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회질서를 세우는 데서 겪는 어려움이 기존 사회와의 투쟁이라는 더 전통적인 문제보다 중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의 역할이 재규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가치ㅘ 사회 현실의 관계를 표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회 질서에 절망하는 인류를 위해 진실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482 정원에서의 폭발을 만들어낸 것은 예언적인 생활감정이었다. 그것은 니힐리즘과 서먹서먹하게 뒤섞인 인문주의였다.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서로가 똑같이 위험하고 외로운 작업, 해방이면서 동시에 파괴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자라난 심미적 문화와 세기말의 첫 비엔나를 잃은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쿤스트쇼에서처럼 그것이 상류 부르주아의 지배적 관습 문화가 되는 그 순간에 그런 저항을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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