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로빈슨: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 10점
프랜시스 로빈슨 외 지음, 손주영 외 옮김/시공사


글을 시작하며/12 


1부 이슬람 역사의 발자취 

1.이슬람의 발흥/30 

2.이슬람 세계체제의 출현/66 

3.유럽팽창시대의 이슬람권/102 

4.서구 지배 시대의 이슬람세계/134 


2부 이슬람 문명의 정수를 찾아서 

5.무슬림사회의경제/172 

6.무슬림 사회의 질서/216 

7.이슬람지식의 형성/266 

8.무슬림사회의 예술양식/314 


글을 맺으며/360





30 600년 무렵 중동에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아무도 새로운 종교로 무장한 아랍 부족민들이 중동을 정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슬람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오늘날 이슬람의 출현 배경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었는지 추측만 가능할 뿐,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이슬람을 탄생시킨 중동은 이란의 사산 왕조와 비잔틴 제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었다. 당시까지 약 900년 동안 중동의 경쟁자였던 이란인과 그리스(비잔틴)은 서로 싸움을 벌여 왔다. 따라서 전쟁에 따른 긴장 상태는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서로를 완전하게 멸망시키겠다는 의도는 엿보이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은 독실하게 그리스토를 숭상하는 나라였다. 사산 왕조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로아스터교는 대부분의 이란인이 믿고 따르는 종교였다. 몇몇 이란인은 그리스도교나 마니교와 같은 종교를 믿었다. 그리고 이란인 이외에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라크에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우세였다. 그리스도교는 당시 서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였다. 사산 왕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황제가 하루 아침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공인받은 종교로 등극했다. 나아가 그리스도교는 두 제국의 국경을 넘어 아라비아로 퍼져 나갔다. 결국 중동 전역이 그리스도교화될 것이라고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35 이러한 발전의 중심에는 위대한 예언자가 한 명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570년쯤 무함마드는 꾸라이쉬족이 거주하던 서부 아라비아의 상업 도시인 메카에서 태어났다. 메카는 순례지 였다고 전해진다. 여섯살에 고아가 된 무함마드를 양육한 사람은 할아버지와 삼촌이었다. 무함마드는 장성해 무역상이 되었고, 자신을 고용한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여러 명 낳았다. 마흔 살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만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동굴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지속하던 그는 어느날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너무나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무함마드야, 너는 신의 사자이니라." 무함마드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을 때 그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산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무함마드야, 나는 가브리엘이니라. 다시 말하지만 너는 신의 사자이니라. 그러니 암송하라!"


37 공동체가 수립되고 나서 몇 년간은 내부와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폭력 사태가 넘쳐났다. 내부의 적은 대부분 유대교인들이었다. 처음에 메니다의 유대교인들과 무함마드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무슬림들은 유대교의 중심 성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를 드렸고, 유대교인들은 '메디나의 헌장' 아래 무슬림들과 함께 움마를 형성했다. 그러나 히즈라 2년 후, 무슬림과 유대교인 사이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무함마드는 끼블라(qiblah, *예배방향)을 메카로 바꾸었다. 


38 무함마드는 공동체를 이끌어 갈 자신의 후계자를 정해 놓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은 요절했으며,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계승자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누가 자신을 대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암시한 일이 없었다. 그는 왕들과 사제들, 재판관들과 중재자, 그 누가 자신을 대리할 것인지를 밝히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무슬림들은 고심 끝에 무함마드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해 온 꾸라이쉬족의 일원인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라는 직함을 가진 공동체의 이맘(*예배 인도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왕정이 아닌 신권적 군주제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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