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뒤비: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 10점
조르주 뒤비 지음, 양영란 옮김/동문선



1. 서론 

2. 궁핍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에 대한 두려움 

4.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5. 폭력에 대한 두려움 

6.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1. 서론 

14 중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말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잠시 잊고 8-10세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생각하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중세 문화는 현대 문화와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승에서 죽고 나면 저승에서 삶이 계속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신 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관습 ━ 종교적 관습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농경에 관한 관습도 모두 해당 됩니다 ━ 은 세상에 대한 만인 공통의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관습의 저변에는 자연을 지배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공통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신의 노여움이 세상을 지배하며, 이는 때로는 전염병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신의 가호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성직자들과 이들이 속한 교회에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 형태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수의 소규모 집단을 단위로 부족을 통치하고, 이들을 징계하며 보호하는 동시에 노동을 분담시키는 권리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집단의 우두머리, 즉 통치의 검을 지닌 사람들은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질서를 유지시키는 일이야말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21 서기 1000년대의 도래는 사회의 불안을 낳았습니까?

서기 1000년 도래를 둘러싼 불안 심리는 낭만적인 전설에 불과합니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1000년대의 도래는 일종의 집단 공포심을 부추겨 자신의 모든 소유를 처분해 버리는 사람 심지어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사망한 사람들도 있으리라고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로지 하나의 증언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의 한 수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서기 994년에 빠리의 성직자들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했다고 들었다』 이 수도사는 이로부터 4-5년 후, 즉 1000년대를 목전에 두고 『그들은 미치광이들이다. 성경책만 펼쳐보면 그들의 말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절대로 미리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기다리는 그 무시무시한 사건이 특정한 시각에 일어나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므로 신앙심에 역행하는 것이다』 

 나는 10세기 말에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지속적이고 불안한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언젠가 구세주가 다시 강림하셔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고,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믿었으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 세계 전체에 혼동과 파괴를 몰고 올 것이 분명한 심판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보면 1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 악마가 쇠사슬로부터 풀려나 사이비 구세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씌어 있습니다. 세상의 끝자락 어디에서인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지평선 너머 동쪽 혹은 북쪽 언저리에 무시무시한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라고도 예언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공포심을 야기시키는 동시에 희망도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심한 혼란과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최후의 심판에 앞서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기 때문에 이 시기는 덜 고통스럽다고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지복천년설은 이 같은 믿음에 근거합니다. 장막이 걷히고 나면 사람들이 평화와 평등 속에서 마침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해서 말하자면, 중세인들은 자연의 힘 앞에 극도로 무력했으며, 오늘날 아프리카 오지의 가장 가난한 종족에 버금갈 만한 물질적 빈곤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삶이란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괴로운 고통의 시기가 지나면 천국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이비 구세주가 사라지고 난 후에 도래한 악으로부터 해방된 천국에서의 삶이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2. 궁핍에 대한 두려움 

26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는 궁핍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습니다. 중세 사회의 실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 자료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최근 도피네[프랑스 남동부의 이제르·오트잘프·드롬 주들을 포함하는 역사적·문화적 지역〕 지방의 호수 주변에서 호수 지반의 융기 덕분에 물 밖으로 솟아 오른 군락의 기초를 발굴했습니다. 이때 함께 출토된 물건이 많습니다. 전투를 담당하는 기사들과 농부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서기 1000년 무렵 그곳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연장들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매우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한 예로, 쇠붙이로 된 연장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농부들은 오늘날 아프리카에서처럼 불에 그을려 단단하게 만든 나무 날이 달린 쟁기로 땅을 갈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들은 이삭을 한 알 심어 두 알 반을 수확하게 되면 매우 기뻐했습니다. 농토의 생산성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땅을 일궈 식량을 조달하는 데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을 상상해 봅시다. 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대부분 짐승 가죽 옷을 입었으며, 신석기 시대 사람들보다 영양상태가 크게 낫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평민층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중세는 매우 엄격한 계급 사회였으니까요. 농부들은 수확의 거의 대부분을 갈취해 가는 소수의 착취 계급, 즉 기사와 성직자 계급 때문에 늘 허덕여야 했습니다. 이들은 언제나 다음날을 걱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고한 공동체 의식과 우애심은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서로 나누어 갖는 미덕을 동반했습니다. 요즈음 지하철에서 흔히 보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독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0 그렇다면 중세인들은 고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까요?

 중세 사회는 군집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서 살았습니다. 우리의 아득한 조상들의 사생활을 파고 들어가보면 그들이 항상 남과 더불어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침대에서 여러 명이 함께 잠을 잤으며, 집의 내부에는 벽다운 벽은 없고 그저 장막이 쳐 있을 뿐이었습니다. 혼자서 외출하는 법도 없었으며 혼자 돌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미친 사람이거나 범죄자였으니까요. 이런 식의 생활은 사람을 구속하는 동시에 안도감을 부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해서 숲에 은둔하는 사람들은 성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독하게 사는 것은 아주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3. 타인에 대한 두려움 

62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자의 무리가 밀려오는 사건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로 인한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 말기에 제국이라는 일종의 협동 조합 체제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흡수, 동화되기 위하여 유목 민족이 대거 이동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건이었습니다. 10-11세기에는 사나운 무리가 침략했습니다. 그 후 13세기에 쳐들어 온 몽고족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생 루이 시대에는 커다란 불안감이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아시아의 침략자들에 맞서서 그리스도교 세계는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은 러시아를 쑥밭으로 만들고 난 후 폴란드와 헝가리라는 장애물에 부딪쳤습니다. 침략은 저지되었으나 유럽인들에게 1240-50년 사이에 굉장한 공포감을 야기시켰습니다. 몽고인들이 지나가고 나면 오래 전 훈족의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되기 전 헝가리족의 침입도 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70 먼 곳으로부터 온 종족들에게 그리스도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결정하기 힘든 배신 행위였습니까, 혹은 단순한 정치적 결정에 불과했습니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기 1000년 당시의 그리스도교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다분히 제례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롤로의 세례는 명백하게 정치적 행위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프랑스 국적을 신청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즉 요식 행위였을 뿐입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언제까지나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토속 신들을 섬겼으리라고 추측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신을 하나 더 추가한 셈이었습니다.


77 외부인만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까?

보르도를 지나면 나오는 지방인 바스크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다기보다 개처럼 짖어 댄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그러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아주 좁은 구역을 벗어 나자마자 곧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이방인도 존재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 즉 이교도·유대인·이슬람교도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불경스러운 이방인들은 개종을 시키거나 아니면 멸종을 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 인류가 그리스도 교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신성 군주의 모델인 생 루이는 굳게 믿었습니다


93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하면 물론 주변인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됩니다. 

 중세 사회에도 물론 조직 생활을 견디지 못해 사회로부터 도태 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 사회는 끈끈하게 엉키고 똘똘 뭉친 사회였기 때문에 개인은 공동체에 완전히 흡수, 동화되어 이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같은 속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공동체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시골에서는 마을 주민과 마을을 등지고 떠나 광대한 숲에 정착한 숲 거주자를 구별했습니다. 숲은 자유와 독립성이 보장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숲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자유와 독립이라는 특권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 같은 주변인은 도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으며, 이들은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에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4.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 

103 유럽에서 흑사병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까?

 흑사병은 본질적으로 벼룩이나 들쥐와 같은 매개물에 의해 전염되었습니다. 이 병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므로 유럽인들의 몸에는 항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흑사병은 비단길을 따라 아시아로부터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라는 재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와 성장이 낳은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제노바와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들은 흑해 너머로까지 진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시아로부터 온 상인들과 접촉이 많았습니다.

 당시 제노바 상인들의 판매 조합이 형성되어 있던 크림(크리미아) 지역을 오가던 상선으로부터 흑사병의 병균이 지중해 지역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상선들은 시칠리아에 맨 처음 정박했으며, 1347년 초 이탈리아 남부에 제일 먼저 흑사병이 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르세유를 거쳐 아비뇽까지 옮아 갔습니다. 그런데 1348년 당시의 아비뇽은 말하자면 로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황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모든 길은 로마로부터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비뇽으로부터 흑사병은 놀랄만한 속도로 거의 도처로 퍼져 나갔습니다. <거의 도처>라고 말한 것은 몇몇 군데는 전염병의 화를 면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통계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림 잡아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1348년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 사이에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추정 됩니다. 현재의 빠리 지역을 예로 들어봅시다. 1천 2백만 명의 거주자 중에서 3분의 1에 해당 되는 4백만 명이 석 달 사이에 죽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사람을 안치 해야 할 곳이 없어 이들을 매장하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관을 만들 나무도 모자랐습니다. 어떻게 이 전염병에 대항할 것인가? 당시의 의술과 수술 능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 해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전염 경로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염된 공기가 병원체를 전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방향성 식물들을 길에서 태우라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벼룩과의 접촉을 차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혹사 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가장 적었던 부류는 가장 청결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 즉 부자들이었습니다. 반면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던 몽펠리에 수도원 같은 경우, 45명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기거 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1348년 흑사병으로 인한 충격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몽고족의 침입, 또는 현재 아프리카 내륙 지방을 휩쓸고 있는 에이즈 정도가 이에 필적할 만합니다.



5. 폭력에 대한 두려움 

133 폭력을 행사하는 주된 책임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프랑스 지역에서 관찰된 치안 불안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은 주로 기사 계급이나 군인 패거리들이었습니다. 농촌 주민들은 이들을 악마의 사신으로 간주했습니다. 마침 서기 1000년에 기사들의 민폐를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연대기에는 기사 계 급의 폭력 행위 근절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신神의 평화>라는 시도에 대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병정들을 성골함 주위에 모이게 한 뒤, 주교와 군주들은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 영혼을 걸고 정해진 금지 조항을 지키겠노라고 서약하십시오. 당신들이 서로 죽일 수는 있으나, 앞으로 교회 주위에서는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누구라도 원한다면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뜻에서 금요일과 일요일에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인들 특히 귀족 계급 여인들을 공격해서는 안됩니다. 상인·성직자·수도승들을 해쳐서도 안 됩니다』 이로써 지정된 장소에서 무장한 군인들끼리만 폭력 행사가 가능하다고 못박은 일종의 전쟁 규약이 마련된 셈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은근히 병정들이 싸우다가 제풀에 지치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34 기사 계급은 애초부터 숙명적으로 폭력 행사에 동원되었습니까?

 우선 당시 귀족 계급의 결혼 풍속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부는 토지에 집약 되어 있었으며, 유산 배분으로 인하여 토지가 여러 조각으로 분산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따라서 귀족 집안에서는 아들 가운데 한 명만 결혼시켰습니다. 나머지 아들들은 합법적인 부인도 마땅한 거처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서 부유한 계층의 유아 사망률은 현저하게 낮았으므로 상대적으로 결혼하지 못한 귀족 남자의 수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평생동안 이들은 무리를 지어 모험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모험이란 말 자체도 이 무렵에 생겨났습니다. 당시의 모험이란 군사적, 파괴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도처에서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병정들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으며, 이 같은 관례는 구체제(Ancien Regime) 말까지, 즉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효율적인 정치력에 의하여 통제되지 못할 때 군사력은 난폭한 폭도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은 요즈음에도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비근한 사례를 통해 통감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농경 중심에서 화폐 경제 체제로 이행하게 되며, 이에 따라 부의 개념도 점차 유동적으로 변합니다. 유산의 분배가 훨씬 용이해 졌으며, 따라서 아들들에 가해지던 혼인 제약도 완화되었습니다. 13세기부터 폭력의 행사는 조금 뜸해졌으나,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즉, 세력이 강대해진 국가간의 전쟁 형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기사 계급이라는 위협 요소가 용병의 횡포로 대체된 셈입니다.



6.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

161 서기 1000년에는 어떠한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표현되었습니까?

 나는 당시 사람들이 우리들만큼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궁금합니다. 그 시절에는 아무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우주 속에 존재하며, 이러한 불가지 세계와 속세를 갈라 놓는 경계선을 넘나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삶은 지속되며, 죽은 사람들이 늘 가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특별한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산사람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항상 죽은 사람들에 대한 가호를 빌었습니다. 이처럼 잘 알 수는 없지만 죽으면 누구나 가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상상하는 그 세계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수도원의 주요 역할 중의 하나였습니다. 죽음이란 하나의 통과 의례이며, 이를 위해서는 의식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이 점은 현대의 관습과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우리 같은 현대인들에게 죽음이란 거북한 사건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시체를 처리 해야 합니다. 묘지로의 행렬은 거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 집니다. 중세에는 이와 반대로 가족·하인·봉건 제후 모두 죽어가는 사람 주위에 모였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은 죽기 전에 자기가 지녔던 모든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김 없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사를0 유언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바르게 처신할 것을 당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비교적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모든 예식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174 과학의 진보도 그러한 두려움을 뿌리 뽑는 데에는 속수무책입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확대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신적인 질환의 상당 부분이 운명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비롯됩니다. 예전에는 인간의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효과적인 치료법이 존재했습니다. 고해성사와 속죄라는 그리스도교 의식이 바로 이런 치료법에 해당됩니다. 말하자면, 지은 죄를 속죄 받을 수 있는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리스도교 제도는 현대 사회에서 한동안 유행했던 정신분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켰으며, 중세시대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만큼 그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한쪽에는 지옥, 반대쪽에는 천국이 존재 합니다. 이 극단적인 분리가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에 인간은 연옥이라는 중간세계를 고안해 냈습니다.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발명이 상업 및 회계의 발전과 깊은 상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간과 전지전능의 신 사이에 일종의 거래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12세기 말엽 본격적인 상인의 시대가 열리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들이 행한 선행을 모두 모아 죽은 사람들의 죄를 삭감 해 줄 수 있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역시 공동체 의심의 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기도와 선행을 통해, 연옥에 머무르는 영혼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죄 받기 위해 고행해야 하는 기간을 줄여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87 중세시대를 관류하던 세상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세기가 바뀌어도 지속되었습니까?

 그 같은 두려움은 영구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세상의 종말이 곧 닥쳐온다고 믿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아직도 옛날 우리 조상들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알게 모르게 지배 받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의식을 파헤쳐 보면 아마도 인류 역사가 갑작스레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핵 실험 초창기에 이 같은 실험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급기야는 우주 전체가 폭발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날 인구 증가율이 너무 높아 몇 십 년 후에는 지구가 식량 부족에 봉착하게 된다는 분석을 접할 때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공룡들이 너무도 급작스럽게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오늘날에도 미처 부화하지 않은 공룡알이 발견된다는 보고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인류 역시 면역 기재 결핍 같은 특정 현상으로 인하여 어느 날 갑자기 멸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문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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