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M. 치폴라: 대포, 범선, 제국 ━ 1400~1700년, 유럽은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대포, 범선, 제국 - 10점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미지북스



서문

프롤로그


1장 유럽의 도약 

2장 유럽 너머의 대포와 범선

에필로그

부록1

부록2

감사의 말

참고 문헌

역자 후기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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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문

파니카 교수가 썼듯이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캘리컷 도착부터 1947년 영국군의 인도철수 그리고 1949년 중국에서 유럽 해군의 철수까지 지난 450년은 근본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일관성을 보여준다. 그 일관성이란 아시아의 광대한 대륙을 해상력이 좌지우지했다는 것과 바다를 장악한 유럽 민족들의 지배로 요약할 수 있다."


12 프롤로그

1453년 5월 28일 투르크 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전 유럽이 경악하며 불안감에 전율했다. 베사리온 Bessarion 추기경은 베네치아의 도제(doge: 라인어 '두크스dux"에서 온말로,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수장을 가리킨다. - 옮긴이)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Francesco Foscari에게 보내는 편지에 "입에 담기도 끔찍하며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라면, 더욱이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개탄할 일"이라고 썼다. "실로 위대한 제국, 실로 고명한 위인들, 실로 유명하고 유서 깊은 가문들과 함께 융성한 도시, 전 그리스를 대표하는 우두머리요, 최상의 예술의 도장이자, 동방의 영광과 장엄함을 과시하고 모든 훌륭한 것들의 피난처로서 대대로 번영한 도시가 점령되고, 강탈당하고, 유린당하고, 짐승만도 못한 야만인이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잔혹한 적, 가장 흉포한 짐승의 손에 약탈당했다.... 이 간악하기 짝이 없는 야만인들의 잔인한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크나큰 위험이 다른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이탈리아마저 넘볼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이 받은 충격과 유럽 전역에 퍼저나간 공포의 파장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같은 사태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유럽은 중세 내내 만성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잠재적 침입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물론 당시 유럽의 상황이 중세 초기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이슬람 세력은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적히 축출되었다. 바이킹들과 헝가리인들은 유럽 문명에 동화되었다. 또 엘베 강 동쪽의 넓은 지역이 유럽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힘의 균형추는 유럽 쪽에 유리하게 기울지 않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은 여전히 수세적인 위치였다.

십자군 운동 역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유럽 측 공세의 초기 국면을 특징짓는 성공은 일시적인 분열과 세력 약화로 인해 아랍권이 잠시 허를 찔린 것에 기인한 바가 크다. 언젠가 그루세 Grousset 가 말한대로 초기 십자군은 "무슬림의 무정부 상태에 프랑스의 군주제"가 승리한 것이었고 무슬림 세력이 금방 재편되자마자 유럽 인들은 재빨리 후퇴해야만 했다. 맘스베리의 윌리엄은 1차 십자군 원정의 경험을 요약하면서 우르바누스 2세의 담화(1094~1095년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을 받은 비잔티움 제국을 원조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 것을 말한다 - 옮긴이)를 상기하는 듯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이 자그마한 땅덩어리는 난폭한 투르크 인들과 사라센 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압박당하고 있다. 그들은 300년간 에스파냐와 발레아레스 제도 諸島를 점령해 왔고 나머지 땅도 집어삼킬 꿈에 부풀어 있다."

11세기 이래 서양은 상업 부문에서 저돌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군사·정치 분야에서는 그에 대응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1241년 발슈타트 전투에서의 대참사는 유럽이 몽골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대처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보였다. 유럽이 침략당하지 않은 것은 때마침 몽골 족 수장이 죽었기 때문이며(1241년 12월 우구데이(우구데이 칸:1185~1241년, 몽골 제국의 2대 황제. 아버지인 칭기즈 칸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여 이란과 남러시아를 공략하고 헝가리와 폴라드까지 침투하여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 옮긴이)의 죽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칸의 제국이 서쪽이 아닌 남쪽과 동쪽에서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음 세기, 니코폴리스에서 기독교의 패배(1396년)는 동방의 침략자에 직면하여 유럽 인의 군사적 취약성을 다시금 입증해보였다. 유럽은 또 한번 순전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투르크의 정복자 바예지드가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티무르와의 싸움에 휘말린 것이다. 운 좋게도 한 잠재적 위험이 뜻밖에 다른 잠재적 위험을 제거해주었다. 15세기 유럽은 여전히 투르크 공격의 위험성을 느기고 있었고, 비록 때때로 적의 전진을 늦출 수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중세 유럽의 만성적 취약성의 원인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선 유럽의 인구가 많지 않았다(결코 1억 명 이상을 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이 분별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자기들까지 싸우면서 자기 민족의 피, 같은 기독교의 피로 제손을 더럽히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각국의 군대가 모여 연합군을 형성하면, 결과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은 유럽 국가들의 군사 조직이 효울성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유럽, 특히 동유럽 군대는 중무장한 기병에 의존했는데 이들은 보기에는 화려했지만 움직임이 둔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유럽의 귀족 계층은 자신은 전혀 다치지 않은 채 적에게 가장 강한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의 꿈을 위해 전술과 전략을 희생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럽이 생존하리라는 희망은 중세 내내 상당 부분 신의 손에 달려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이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기세등등한 투르크의 진군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1459년 세르비아 북부가 침략당했다. "앞으로도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누가 영국인과 프랑스 인이 서로 사랑하게 하랴? 누가 제노바 사람과 아라곤 사람을 합심하게 하랴? 누가 헝가리인, 보헤미아 인과 독일인을 화해시키랴? 우리가 투르크군에 맞서 작은 군대를 이끌고 나간다면 금방 격퇴당할 테고, 큰 군대를 이끌고 나간다면 금방 혼란에 빠질 터이다." 교황 피우스 2세의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권의 적들이 유럽의 심장부를 강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순간에 갑자기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따. 유럽을 봉쇄하고 있던 투르크의 의표를 찌르면서 몇몇 유럽 국가가 연달아 바다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들의 전진은 빠르고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한 세기 만에 먼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나중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전 세게적인 유럽 지배의 기반을 닦았다.

수십 년 전, 15세기 후반 유럽의 팽창과 대양 탐사는 투르크가 진출해, 근동을 거쳐 유럽으로 오는 향신료의 흐름을 막은 것의 직접적 결과라는 주장이 유행했다. 이 견해는 역사적 순진함의 뛰어난 본보기이며 실제로 전적으로 틀린 것으로 드러났지만, 종종 그렇듯이 오류와 더불어 일말의 진실도 없잖아 있다. 향신료 제도(Spice Islands: 정향, 육두구를 독점적으로 지배, 수출하는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를 말한다. - 옮긴이)와 서아프리카 해안에 도달하는 항로를 찾으려는 유럽 인들의 노력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이러한 현상이 유럽의 경제적 팽창과 그들 앞에 놓인 군사적, 정치적 봉쇄 사이의 긴장 상태를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긴장이 고조된 상태라 할지라도 동기와 그러한 동기를 유효하고 성공적인 행위로 전화하는 수단은 별개다. 이슬람의 봉쇄를 우회하여 향신료 제도에 도달해야 할 필요는 13,14세기에도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비발디 Vivaldi 형제와 하이메 페레르의 대서양 탐험 실패는 '동기'가 존재하더라도 필요한 '수단'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유럽 인들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결의를 품고 아시아로 갔으며 이들의 결연한 의지는 그에 저항하려는 아시아 인의 의지보다 강력"했기에 사실이 대체로 유럽의 성공을 설명해준다는 견해도 제시되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결연한 의지도 필수적 수단이 없다면 전투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비발디 형제는 분명 "결연한 의지"가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갤리선(전후로 길고 날렵한 배. 노를 저어 이동하지만 중앙에 하나짜리 돛도 사용되었다. 9~13세기 유럽 해안을 주름잡은 바이킹선이 가장 유명하다 - 옮긴이)은 대양에 도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13,14세기의 유럽이 실패한 지점에서 르네상스 유럽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14세기 말 이후 유럽 인은 어떻게 머나먼 향신료 제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모든 주요 해로를 장악하고 해외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 무엇이 유럽 인으로 하여금 불안한 수비적 위치에서 대담하고 공격적인 팽창 국면으로서의 극적이고 갑작스러운 전환을 가능케 했는가? 왜 "바스쿠 다 가마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가?


103 유럽에서 대포와 돛으로 더 철저하게 전환한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인력의 시대가 끝나고 기계의 시대가 열리려는 참이었다.


118 1571년 10월 7일, 대형 갈레아스선 여섯 척을 포함한 갤리선 208척으로 구성된 기독교 세계의 함대와 갤리선 230척으로 구성된 투르크 측 함대가 레판토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3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투르크 전함 30척이 침몰했고, 130척이 포획됐으며, 40척만 가까스로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119 레판토 해전이 "크나큰 결과"를 낳지 않은 까닭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크나큰 승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은 시대에 뒤쳐진 전투였다. 전투는 새로운 유형의 선박과 무기가 해전의 새 장을 열고 해상 전략의 길을 가리키던 시기에 갤리선을 가지고 주로 충각으로 들이받거나 적선에 올라타 싸우는 옛날 방식으로 싸운 마지막 전투이다. 레판토의 승자는 패자만큼이나 구시대적이었다. 양측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과 기술에 사로잡혀 있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레판토 해전에서 승자는 없었다.


120 반대로, 레판토 해전보다 화려하지 않고 또 널리 회자되지도 않지만 16세기 전반기에 포르투갈이 인도양에서 무슬림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것이 역사적으로 더 큰 중요성을 띤다.


121 이슬람의 패배는 해전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과 전략에서 주로 기인한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적인 베네치아와 몰타기사단 세력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는 대서양 세력이 거둔 해상 혁명의 함의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근대가 이미 시작되었을 때도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122 포르투갈 인들도 갤리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포르투갈 함대의 중추는 대포를 실은 거대한 원양 범선이었다.



150 중국인은 투르크 인이나 인도인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한참 뒤쳐져 함포의 전략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깨닫지 못했고 그러한 가능성이 부여하는 새로운 해상 전술도 습득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이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153 일부의 국지적인 성취와 성공 사례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역도 유럽의 대포 생산과 어렴풋하게나마 비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서양의 대포는 언제나 다른 비유럽권 지역의 대포보다 더 우수했고 그러한 월등함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 인정되었다. 유럽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군비 생산에서 우위를 놓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162 유럽의 팽창은 본질적으로 상업적 모험이었고,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정책이 확연히 중상주의적 경향을 보인 것은 그러한 팽창 정책 뒤의 기본 동기들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164 종교는 명분을 제공하고 금은 동기를 제공한다. 14~15세기에 대서양 연얀 유럽 국가들이 성취한 기술적 진보는 수단을 제공했다. 프롤로그에서 제시되었듯이, 적극적인 "동기"는 13세기부터 지중해 유럽에서 이미 존재했다.

165 14,15세기에 대서양 유럽이 개발한, 대포로 무장한 배는 유럽의 영웅담을 가능케 한 발명품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선원이 전례 없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이동과 파괴를 위해 제어하는 것을 가능케 한 경제적인 고안물이었다. 어느 순간 유럽이 극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비결은 모두 거기에 있었다.

176 유럽 인들이 인도의 광대한 내륙을 정복하거나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은 이후 산업 혁명의 부산물로 따라온 것이다. 유럽의 해상 확장은 산업 혁명으로 가는 길을 닦은 여러 주변 여건 가운데 하나이다.

178 포탄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기계적 발명에 다다르게 되고 발명은 다시 정치 개혁으로 이어진다. 정치 개혁으로부터 우리는 정치 이론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정치 이론들은 다시 우리를 서양의 철학으로 이끌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계적 방법을 통해 우리는 과학을 이해하게 되고 그로부터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적 사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 걸음씩 우리는 포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지만 동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술이 목표가 되고 철학과 사회적 인간적 관계들은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한편, 인간에게 봉사해야 할 기계는 그의 주인이 된다. "바스 쿠 다 가마의 시대"는 악몽으로 끝난다. 인간 ━ 서양인과 비서양인 모두 ━ 이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당혹스러운 마법사의 조수라는 오래된 상상은 비극적이게도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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