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


형이상학 1 - 10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옮김/나남출판



1권

옮긴이 머리말 


I권(A) 

II권(α) 

III권(B) 

IV권(Γ) 

V권(Δ) 

VI권(E)

VII권(Z) 

VIII권(H) 


부 록 369

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목록

3. 자연의 사다리(Scala naturae)


참고문헌 375

찾아보기 395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제목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붙인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학자가 편집할 때 《자연학》 다음에 이 책을 배치하면서 그렇게 명명한 것 입니다. 《형이상학》이라는 책을 후대의 학자가 편집했다는 말 은 《형이상학》이라는 책이 독립된 단행본(또는 강의록)들의 묶음임을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완결된 저작을 의도하고 쓴 것이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제1권부터 제14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알려진 부분이 제12권입니다. 있음과 운동 원리에 관한 독립적으로 완결된 강의로 이루어져 있고, 영원한 원동자라든가, 질료인, 형상인 등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핵심 개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을 읽는다고 하면 무엇보다도 제12권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제1권은 앎, 지혜(sophia)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에 더하여 선대 철학자들에 관한 논의가 들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경우 자신의 저작에서 선대 철학자들의 학설을 소개합니다. 물론 선대 이론을 있는 그대로 소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소개를 통해서, 자신의 저작을 남기지 않았거나 남겼다 해도 망실된 이들의 이론을 알 수 있습니다. 제2권은 철학연구에 대한 일반적 고찰과 탐구내용에 따른 방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철학 공부는 무엇이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제3권은 일종의 강의 노트입니다. 철학이 다루어야 할 의문들에 대한 개관이 담겨 있습니다. 제4권은 흔히 말하는 존재론에 관한 기초를 다루고 있습니다. 존재론 일반 및 제일 실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4권은 형이상학을 공부하고자 할 때 제12권 다음으로 열심히 읽어야 할 부분 입니다. 제5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편집한 일종의 철학용어 사전입니다. 제6권은 제일 철학의 성격과 대상에 대해서 다룹니다. 제7권, 제8권, 제9권, 이 셋은 따로 따로 떨어져 있기는 하나 한 묶음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실체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10권은 존재, '하나' 등에 관한 강의록입니다. 제11권은 《자연학》 제3권과 제4권에 있는 글을 가져다 모아둔 것입니다. 제13권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제14권에서도 이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형이상학의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문제 등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서 플라톤에서처럼 좋음의 이데아 등이 초월적인 것으로 논의되지 않습니다.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 전환'한 플라톤 철학에서는 무한정자로서의 인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인간에 대해 논의하면서 인간 공동체(koinonia)를 다루게 되었고, 이는 좋음의 이데아가 상정되는 《국가》에서의 논의로까지 전개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가치의 문제를 초월적으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고전강의》, p180~182





I권

980a~980b 

1. 앎은 감각에서 시작해서 기억과 경험과 기술을 거쳐 학문적 인식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다양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징표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 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각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감각들 가운데 시각이 우리가 사물을 아는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많은 차이점들을 밝혀준다는 데 있다. 동물들은 본성적으로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중 몇몇의 경우에는 감각으로부터 기억이 생겨나지 않는데 반해, 몇몇의 경우에는 생겨난다.


980b~981a 

반면 인간종족은 기술과 추론에 의해 살아간다. 사람들에게는 기억으로부터 경험이 생겨나는데, 왜냐하면 똑같은 일에 대한 여러 번의 기억은 마침내 하나의 경험 능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은 학문적 인식이나 기술과 거의 동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생겨난다. 


981a

그런데 실제 행동과 관련해서 보면, 경험은 기술과 아무 차이가 없어 보이며, 오히려 우리는 유경험자들이 경험 없이 이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된다(그 이유는, 경험은 개별적인 것에 대한 앎이지만, 기술은 보편적 인 것에 대한 앎이요, 모든 행동과 생성은 개별적인 것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사는 ━ 부수적인 뜻에서가 아니라면 ━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칼리아스, 소크라테스 또는 그렇게 불리는 것들 가운데 어떤 사람, 곧 사람임이 속하는 것을 치료한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경험 없이 이론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보편적인 것은 알지만 그에 속하는 개별적인 것은 알지 못해서, 치료할 때 자주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치료받아야 할 대상은 개별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문적인 앎과 전문적인 앎이 경험보다 기술에 더 많이 속한다고 생각하며, 기술자들이 유경험자들 보다 더 지혜롭다고 믿는데, 지혜는 어떤 경우에나 학문적인 앎을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앞의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만, 뒤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경험자들은 사실은 알지만 이유를 알지 못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유와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982a

또한 어떤 학문 분야에서나 더 엄밀하고, 원인들에 대해 가르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지혜롭고 학문들 중에서는 자기 목적적이요 앎을 목적으로 선택된 것이 파생적 결과들을 위해서 있는 것보다 지혜에 더 가까우며, 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예속된 것보다 지혜에 더 가까우니, 그 까닭은 지혜로운 자는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내리고 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와 지혜로운 자에 대해 이런 종류의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안다는 특징은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학문을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밑에 놓여 있는 것들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 


987a~987b

6. 플라톤의 철학. 이 철학은 질료인과 형상인만을 활용한다

지금까지 말한 철학들에 뒤이어 플라톤의 연구가 출현했는데, 이 연구는 많은 점에서 앞 사람들을 따랐지만 이탈리아의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점들이 있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 처음으로 크라튈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의견들에 친숙하게 되었다. 이런 의견들에 따르면 모든 감각물은 언제나 흘러가는 상태에 있어서 이것들에 관한 학문적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는 나중까지 이런 생각을 그대로 견지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것들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자연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지만, 윤리적인 것들에서 보편자를 찾고, 최초로 정의 들에 생각의 방향을 맞추었다. 플라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정의는 감각물들이 아니라 그와 다른 것들에 대해서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감각물들은 언제나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공통의 정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런 종류의 있는 것들을 이데아들이라고 불렀고, 모든 감각물은 그것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그것들에 따라서 이름을 얻는다고 말했다. 형상들과 같은 이름의 여러 사물들은 관여에 의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여'란 말을 쓰면서 이름만 바꿨을 뿐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있는 것들이 수들의 모방에 의해서 있다고 말하는데, 플라톤은 이름만 바꾸어, 관여에 의해서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형상들에의 관여나 모방이 어떤 것인지는 공동의 탐구과제로 남겨두었다.



III권

998a

(vi) 유들이 사물들의 첫째 원리들인가, 아니면 사물들에 내재하는 부분들이 첫째 원리들인가?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서 진리에 이르기 위해 어떤 설명을 제시해야 하는지는 커다란 의문이지만, 원리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유들이 요소들이자 원리들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각 사물에 내재하는 첫째 구성 부분들이 원리 들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예컨대 목소리의 요소들과 원리들에 해당하는 것은 목소리들을 이루는 첫째 구성부분들이지, '목소리'라고 하는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998b

(vii) 유들이 원리들이라면, 최상의 유들이 그런가 아니면 불가분적인 것들이 그런가?

더욱이 설령 유들이 최고 수준의 원리들이라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유들 가운데 첫째가는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불가분적인 것들에 대해 술어가 되는 최종적인 것들을 원리들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언제나 보편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원리들이라면, 유들 가운데 최상의 것들이 원리들일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술어가 되기 때문이다.


999a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서 그런 성질의 것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런 것은 모든 것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술어가 된다고 말하는데 그쳐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999a

(viii)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과 이어져 있으면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어렵고 이론적인 고찰의 필요성에서 볼 때 가장 절실한 의문이 있는데, 이제 이것에 대해 논의할 차례이다. 만일 개별자들과 떨어져서 아무것도 없고 개별자들은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것들에 대해 어떻게 학문적 인식을 얻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하나이자 동일한 어떤 것이 있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주어져 있는 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필연적이고, 마땅히 개별자들과 떨어져서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개별자들과 떨어져서 유들이 ━ 최종적인 것들이든 첫째 유들이든 ━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관련해서는 방금 의문을 제기한바 있다.


999b

(A) 그런데 만일 개별자들과 떨어져서 아무것도 없다면, 지성적인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은 감각 가능할 것이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학문적 인식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감각을 학문적 인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더욱이 영원한 것도 운동하지 않는 것도 없을 터인데, 그 이유는 모든 감각물은 소멸하고 운동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전혀 없다면, 생성도 불가능하다. [...] 더욱이 만일 질료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복합체에 앞서) 있다면,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그 질료가 생성을 통해 되는 것, 즉 실체가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이치에 맞는데, 왜냐하면 이것도 질료도 없다면, 전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복합체와 떨어져서 어떤 것, 즉 형태나 형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000a

(x)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은 같은가?

지금 사람들에게나 이전 사람들에게나 어떤 것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는데, 그것은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이 동일한가 다른가라는 의문이다. 만일 그것들이 동일하다면, 어떻게 어떤 것들은 가멸적이고 어떤 것들은 불멸적인가,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가? 헤시오도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에 그럴 듯해 보이는 생각을 해냈지만, 우리들의 관심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을 원리들로 삼으면서 신들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 났고 넥타와 암브로시아를 먹지 않은 것들은 죽는다고 말하는데, 이들은 분명 자신들에게는 친숙하게 이런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 주장은 당장 이 원인들을 다른 데 적용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우리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게 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일 불멸하는 것들이 즐거움 때문에 그것들에 손을 댄다면, 넥타와 암브로시아는 결코 그들의 있음의 원인이 아니다. 반면 그것들이 (살아) 있기 위해 그것들에 손을 댄다면, 어떻게 영원한 것들에 음식을 필요로 하겠는가? 신화적으로 꾸며낸 생각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논증을 통해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 동일한 것들로부터 유래함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본성상 영원하고 어떤 것들은 소멸하는지 캐물어 보아야 한다. 


1000b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싸움은 소멸의 원인이면서 그에 못지 않게 있음의 원인이라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있음의 원인에 그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하나의 상태로 끌어모음으로써 그것들을 소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변화 자체의 원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것들이 본성상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IV권

1003a

1. 우리의 목적은 있는 것 자체에 대한 탐구이다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그리고 그것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 어떤 학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 학문들 가운데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다른 학문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있는 것을 있는 것인 한에서 보편적으로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들은 있는 것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는데, 예컨대 수학적인 학문들이 그렇다. 우리는 원리들과 최고의 원인들을 찾고 있기 때문에, 분명 그 자체로서 이런 것들을 갖는 어떤 자연적인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있는 것들의 요소들을 찾는 사람들이 찾았던 것이 바로 그런 원리들이라면, 그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있는 것에 속하되, 부수적인 뜻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있는 것인 한에서 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에 속하는 첫째 원인들을 파악해야 한다.


1003a

2. 그러므로 우리는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해야 한다

'있는 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즉 어떤 하나의 자연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 것이지 동음이의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1003a~1003b

'건강한'은 모두 건강과의 관계 속에서 쓰이는데, 어떤 것은 건강을 지켜준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을 낳는다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징후라는 뜻에서, 어떤 것은 건강의 수용자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고, '의술적'이라는 말 역시 의술과의 관계 속에서 쓰인다.


1003b

그러므로 있는 것들을 있는 것들인 한에서 이론적으로 고찰 하는 것은 하나의 학문의 과제임이 분명하다. ━ 그러나 어디에서나 학문은 주로 첫째 가는 것을 다루며, 다른 것들은 그것에 의존하고 또 그것에 의해 그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실체라면, 철학자는 마땅히 실체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VI권

1025b

1. 신학, 즉 있는 것 자체에 대한 학문은 다른 이론적인 학문들, 즉 수학이나 자연학과 다르다

우리는 있는 것들의 원리들과 원인들을 탐구하되, 분명 있는 것인 한에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건강이나 좋은 상태에는 원인이 있고, 수학적인 것들에도 원리들과 요소들과 원인들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사고의 학문이나 사고에 일정한 방식으로 관여하는 학문은 모두 ━ 더 엄밀하거나 더 단순한 ━ 원인들과 원리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있는 것의 일부, 즉 있는 것의 한 유에 국한해서 그것에 대해 연구할 뿐, 무제한적인 뜻에서 있는 것, 즉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고,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은 뒤 ━ 어떤 학문들은 그것을 감각에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학문들은 '무엇'을 전제로 취한다 ━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다루는 유에 그 자체로서 속하는 것들을 ━ 더 필연성이 있거나 더 취약한 ━ 논증을 통해 밝힌다. 그러므로 실체와 무엇에 대해 논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런 종류의 귀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데, (실체와 '무엇'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의 해명이 있다. 이와 같이 개별 학문들은 그들이 연구하는 유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그 이유는 어떤 것이 '무엇'인지와 그것이 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사고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25b

자연에 대한 학문도 있는 것 가운데 한 유를 대상으로 삼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실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실천적인 것도 제작적인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제작적인 학문들의 경우 그 원리는 제작하는 사람 안에 있으니 지성이나 기술이나 어떤 능력이 그 원리 에 해당하고, 행동들의 경우 그 원리는 행위자 안에 있으니 선택이 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행동의 대상과 선택의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모든 사고가 실천적이거나 제작적이거나 이론적이라면, 자연에 대한 것은 이론적인 것이겠지만 그 대상은 운동할 수 있는 것과 대다수의 경우에 적용되는 정식에 따라 규정되기는 하지만 분리가능하지 않은 실체일 것이다. 하지만 본질과 정식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 없다면 탐구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되는 것들과 '무엇'에 해당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딱부리와 같은 방식으로 있고, 또 어떤 것들은 볼록함과 같은 방식으로 있다. 딱부리는 질료와 결합되어 있는 반면 (왜냐하면 딱부리는 볼록한 눈이기 때문이다), 볼록함은 감각적인 질료 없이 있다는 점이 그 둘의 차이다.


1026a

자연학이 이론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은 이로부터 분명하지만, 수학도 이론적인 학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운동하지 않고 분리가능한 것들을 다루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몇몇 분야는 분명 (수학적인 대상들을) 부동적인 한에서 그리고 분리가능한 한에서 이론적으로 고찰한다. 하지만 만일 영원하고 부동적이고 분리가능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은 이론적인 학문에 속하는 일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자연학의 일도 [자연학은 운동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학의 일도 아니고 그 둘보다 앞서는 학문의 몫이다.


1026a

그러므로 세 분야의 이론적인 철학, 즉 수학과 자연학과 신학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신적인 것이 어딘가에 속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본성적으로 그런 것 안에 속하고, 가장 고귀한 학문은 마땅히 가장 고귀한 유에 대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론적 학문들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더 선택할 가치가 있지만 이론적인 학문들 중에서는 그 학문이 더 선택할 가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첫째 철학이 보편적인지 아니면 어느 하나의 유, 즉 특정한 자연물에 대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학문들 사이에서도 탐구 방식이 동일 하지 않아서, 기하학과 천문학은 특정한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는 반면, 보편적인 학문은 그것들 모두에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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