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2


형이상학 2 - 10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옮김/나남출판


2권

IX권(Θ)

X권(I)

XI권(K)

XII권(Λ) 

XIII권(M)

XIV권(N)


부 록 265

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목록

3. 자연의 사다리(Scala naturae)


옮긴이 해제 271

참고문헌 375

찾아보기 395




IX권

1045b

1. '가능태'와 '현 실태'의 측면에서 본 있음. 가장 주도적인 뜻의 가능태는 능동적 작용의 능력과 수동적 작용의 능력이다

그러면 첫 번째 뜻에서 있으며, 있는 것의 다른 모든 범주들이 준거 점으로서 관계하고 있는 것, 즉 실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것들, 즉 양이나 성질을 비롯해서 그런 방식으로 불리는 다른 것들은 실체에 대한 정식에 따라서 '있다'고 일컬어지기 때 문이다. 왜냐하면 이 논의의 첫머리에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모든 것은 실체에 대한 정식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는 것'은 어떤 뜻에서는 '무엇'이나 성질이나 양이라는 이유에서 그렇게 불리지만, 또 어떤 뜻에서는 '가능태'와 '완전한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기능에 따라서 불리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태'와, '완전한 상태'에 대해서도 규정하되, 먼저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서 규정하기로 하자.


1046a

하지만 같은 종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일종의 원리들이며 첫째가는 것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불리는데, 이에 해당하는 것은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1047a~1047b

이는 (있지 않은 것들은) 현실적으로는 있지 않지만 언젠가 현실적으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은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가능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1048a

6. 가능태와 현실태의 구분, 특별한 뜻의 가능태. 현실적 활동과 운동의 구분

운동과 관련된 능력에 대해 저는 이미 이야기했으니, 현실태에 대해서 현실태가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 규정해보자.

[...]

우리가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이다.


1049b

8. 정식과 시간과 실체의 측면에서 볼 때 현실태는 가능태에 대해 앞선다. 영원하거나 필연적인 것은 가능태를 갖지 않는다

'앞서다'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현실태가 가능태(능력)에 앞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여기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라는 뜻의 가능태(능력)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은 능력이 속하는 것과 동일한 유에 속하는데, 그것은 운동의 원리이지만, 다른 것 안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1) 현실태는 그런 종류의 모든 가능태에, 정식에서뿐만 아니라 실체에서도 앞서지만, 시간에서 보면 어떤 뜻에서는 앞서고 어떤 뜻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식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뜻에서 능력을 가진 것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이기 때문인데,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일컬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하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볼 수 있다'고 하며,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일컬어 '보일 수 있다'고 한다.


1050a

(3) 하지만 실체에서도 그렇다. 첫째로, (a) 생성에서 뒤서는 것은 형상과 실체에서 앞선다는 이유에서 그렇고 (예를 들면 어른이 아이보다 앞서고 사람이 씨보다 앞서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 이다), 또한 생겨나는 것은 모두 원리이자 목적을 향해 간다는 이유에서도 그런데 (왜냐하면 지향대상은 원리이며, 생성은 목적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실태는 목적이요 이것을 위해서 가능태가 획득된다.


1050b

따라서 분명히 실체와 형상은 현실태이다. 이런 근거에서 분명 현실태가 실체의 측면에서 가능태에 앞서며, 앞서 말했듯이 현실태가 있으면 항상 다른 현실태가 그것에 시간적으로 앞서고, 이는 영원한 첫째 원동자의 현실적 활동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b) 현실태는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도 앞서는데, 왜냐하면 영원한 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고,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XII권

1071b

6. 운동은 영원해야 하기 때문에 영원한 원동자가 있어야 하며, 이런 원동자의 본질은 현실적인 활동이다. 세계의 질서있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원리와 때때로 다르게 작용하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실체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둘은 자연적인 것들이고 하나는 부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뒤의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영원하고 부동적인 어떤 실제가 있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실체들이 있는 것들 가운데 첫째가는 것인데, 만일 그것들 모두가 가멸적이라면 모든 것이 가멸적일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생겨나거나 소멸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며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시간이 없다면 앞서는 것과 뒤에 오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그렇듯이, 운동 또한 연속적인데, 그 까닭은 그것은 운동과 동일한 것이거나 또는 운동의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장소운동을 빼놓고는 어떤 운동도 연속적이 아니며, 장소운동 가운데는 원환운동이 연속적이다.


1072a

7. 영원한 원동자는 욕구의 대상으로서 운동을 낳는다. 그것은 현실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변화하거나 운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완전하며 감각물들과 분리되어 있고 부분들을 갖지 않는다.


1072b

그러므로 천계와 자연 세계는 그런 원리에 의존한다. 그것은 여유 있는 삶이며, 우리에게는 짧은 시간 동안 허락된 최선의 여유 있는 삶과 같은 것이다 […] 그리고 사유활동 자체는 그 자체로서 가장 좋은 것과 관계하며,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좋은 것과 관계한다. 그런데 지성은 사유 대상을 포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사유 하는데, 그 까닭은 지성은 대상과 접촉하고 사유하는 가운데 사유대상이 되고 결과적으로 지성과 사유대상은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유대상, 즉 실체를 수용하는 능력이 지성이요, 그것은 사유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능력보다는 소유가 지성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신적인 것이며, 이론적 활동은 가장 즐겁고 좋은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한순간 누리는 좋은 상태를 신이 항상 누리고 있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요, 그 정도가 더 하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그리고 신에게는 삶이 속하는데, 그 까닭은 지성의 현실적인 활동은 삶이요 그 현실적인 활동이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활동은 그 자체로서 신에게 속한 것으로서 가장 좋고 영원한 삶이다. 우리는 신이 영원하고 가장 좋은 생명체이며, 그래서 끊임없는 영원한 삶이 신에 계속한다고 말하는데, 신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1074b

9. 신적 사유는 가장 신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그런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질료가 없는 대상을 사유하는 경우 사유와 사유 대상은 하나다

 지성에 대한 논의는 몇 가지 의문을 낳는다. 일반적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현상적인 것들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런 성질을 가질 수 있는지는 몇 가지 어려움을 낳기 때문이다. 만일 지성이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무슨 위엄이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잠자는 자와 같은 상태에 있을 것이다. 한편 만일 그것이 사유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그 사유를 주도한다면, 그것의 실체는 사유가 아니라 능력일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좋은 실제일 수 없을 터인데, 그 이유는 그것에 고귀함이 속하는 것은 사유함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의 실체가 지성이건 사유이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사유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유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사유한다면, 그것은 항상 동일한 것이거나 다른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 지성이) 훌륭한 것을 사유하는가 아무 것이나 사유하는가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추론을 통해) 사고하기에 불합리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것은 분명 가장 신적이고 고귀한 것을 사유하며, 변화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의) 변화란 더 나쁜 것으로의 이행일 것이며, 그런 것은 이미 일종의 운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만일 (신적 지성이) 사유가 아니라 능력이라면, 연속적인 사유는 당연히 그에게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그럴 경우 지성보다 더 고귀한 어떤 것, 즉 사유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함과 사유는 가장 나쁜 것을 사유하는 자에게도 속할 것이므로, 그런 일을 삼가는 것이 마땅하다면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보지 않는 것이 보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사유는 가장 좋은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만일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그 사유는 사유에 대한 사유이다.


1075a

10. 세계의 최고선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의 질서 가운데 놓여 있고, 세계의 지배 원리에도 있다.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는 어려움들

우리는 또한 세계 전체의 본성이 둘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 좋음과 최고선을 갖는지, 즉 그것의 분리된 상태로 그 자체로서 있는지 아니면 질서 가운데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마도 군대가 그렇듯이, 그 두 방식 모두에 따라 그럴 것이다. 그 경우 좋음은 질서 안에도 있지만 사령관도 좋은 것이며, 뒤의 것이 더욱 그렇다.



XIII권

1078b

( [ … ] 반면 소크라테스는 정당한 근거에서 '무엇'을 찾았으니, 그가 찾은 것은 추론 활동이고 '무엇'은 추론들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변증술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무엇'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반대를 탐색 할 수 없었고, 반대자들에 대해 동일한 학문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소크라테스의 공적으로 돌려야 할 것이 둘이 있는데,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가 그렇다. 이것들은 둘 다 학문의 출발점과 관계 한다). ━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보편자들도, 정의들도 분리시키지 않은 반면, 그들은 그것들을 분리시켰고 그런 것들을 있는 것들의 이데아들이라고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거의 동일한 논변에 의해서 그들은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데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니, 이는 마치 수를 세려고 하는 사람이 (여기) 있는 것 들의 수가 적으면 셈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서 셈할 것을 더 많이 만들어 수를 세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1080a

또한 생각건대 실체와 그 실체가 속하는 것은 분리 가능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이데아들이 사물들의 실체들이면서 그것들과 분리되어 있을 수 있겠는가? 《파이돈》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형상들이 있음과 생성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형상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운동을 낳는 것이 없다면 생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그것들에 대해서는 형상들을 인정하지 않는 다른 많은 사물, 예컨대 집과 반지도 생겨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이데아들을 인정하는 다른 것들 역시, 방금 말한 것들을 낳는 원인들과 같은 종류의 원인들에 의해서 있거나 생겨날 수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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