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76 제31강(3) 셰익스피어 《오셀로》

 

2023.12.20 문학 고전 강의 — 75 제31강(2) 셰익스피어 《오셀로》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1강(3)

- 손수건
오셀로         당신 손수건 좀 빌려 주시오. 
데스데모나 [손수건을 내밀며] 여기요, 여보.
오셀로         내가 주었던 손수건.
데스데모나   지금은 없는데요.
OTHELLO
I have a salt and sorry rheum offends me;
Lend me thy handkerchief.
DESDEMONA
Here, my lord.
OTHELLO
That which I gave you.
DESDEMONA
I have it not about me.(3.4.53-56)

데스데모나   자, 이러지 마시고, 더 유능한 사람은 다시 없을 거예요.
오셀로         손수건.
데스데모나   제발, 캐시오 얘기를 해 주세요. 
오셀로         손수건. 
데스데모나   지금까지 내도록
                   당신 사랑에 행운을 의지했던 사람이죠. 
                   당신과 위험을 함께했고 —.
오셀로          손수건 
OTHELLO
The handkerchief!
DESDEMONA
I pray, talk me of Cassio.
OTHELLO
The handkerchief!
DESDEMONA
A man that all his time
Hath founded his good fortunes on your love,
Shared dangers with you,--
OTHELLO
The handkerchief!(3.4.91-95)

- 질투
에밀리아
“사람이 질투에 사로잡히면 그런 대답으로는 안되죠. 
건수 때문에 질투를 품는 게 아니라
질투에 차 있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 거거든요. 질투란 괴물이에요. 
자가 생산하는, 자기 스스로한테서 태어나는.”
EMILIA
But jealous souls will not be answer'd so;
They are not ever jealous for the cause,
But jealous for they are jealous: 'tis a monster
Begot upon itself, born on itself.(3.4.158-161)
 

 

 

 

《문학 고전 강의 》 제31강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오셀로》에 관한 얘기 오늘 세 번째를 마치겠다. 다음 주는 쉬고 2024년이 되면 《팡세》와 《파우스트》, 《모비딕》 이렇게 텍스트 3개는 근대의 텍스트이다.  《오셀로》까지는 어쨌든 어떤 주인공이 등장해도 그 주인공은 자기 혼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 제32강 《팡세》 처음에 얘기해 두었듯이 셰익스피어는 고대인도 아니고 근대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 즉 전환기의 사람이다. 명백하게 근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은 나면서부터 공동체 속에 또는 주변에 아는 사람의 사슬 연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방법적으로 자기가 혼자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 생각 자체를 애초에 못하는 것은 근대인이 아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근대라고 하는 것을 그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 서양에서는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곤 한다. 물론 그런 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프로테스탄트가 너의 마음속에서 혼자서 신을 만난다 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혼자서 신을 만나다 보면 온갖 망상에 시달리고 자기가 이제 예수다 하는 놈들까지 나타나게 된다. 혼자 있으면 어떤 막장 짓도 가능하게 되는 게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아주 철저하게 조심해서 기독교라고 하는 것에 발을 걸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아무래도 서구 근대문학이라고 하는 것을 읽는 데는 그런 게 필요하겠다. 그래서 지금은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을 그렇게 권하지는 않는다. 다시 읽어보니까 이제 낡은 얘기이고, 새롭게 다시 예술사회학을 공부해야 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다. 

《문학 고전 강의》 309페이지부터 본다. "자기비하가 나오고 질투가 아닌 배신감이 등장하며, 자신이 앞으로 저지를 짓들을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결혼의 저주로다" 이렇게 얘기를 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갔다. 데스데모나가 무슨 말을 해도 오셀로의 결심은 돌이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번에 3막 3장을 열심히 읽었는데, 3막 3장을 보면 오셀로가 끝장을 보려고 뭔가를 결심을 했구나 하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3막 4장부터 나머지까지는 파탄으로 가는 길을 정말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5막까지 쭉 이어진다. 그 유명한 손수건, 셀로가 저 3막 4장에서 오셀로가 "당신 손수건 좀 빌려 주시오.", "여기요, 여보.", "내가 주었던 손수건.", "지금은 없는데요."  그다음에 오셀로가 또 손수건, 데스네모나는 자꾸 이렇게 손수건을 재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채 "제발, 캐시오 얘기를 해 주세요.", "손수건", " 지금까지 지내도록 / 당신 사랑의 행운을 의지했던 사람이죠. / 당신과 위험을 함께 했고━." 지금 일부러 이렇게 셰익스피어는 말하게 한다. 오셀로는 손수건만을 다섯 번 얘기하는데, 처음에 데스데모나는 그게 없다고 얘기하고 그다음에 캐시오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데스데모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 이런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다. 상황에 대한 판단이 전혀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캐시오 얘기를 하면 안되든데, 이 사람이 계속 손수건만 얘기하고 있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를 순간적으로도 생각을 해야 된다. 어쨌든 이것은 이성의 결여라고 할 수 다. 어떤 상황에 자신이 처해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 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그러니까 옆에서 에밀리아가 답답해서 말을 한다. 여러 차례 말했듯이 에밀리야말로 제정신인 유일한 사람이다. "사람이 질투에 사로잡히면 그런 대답으로는 안되죠." 셰익스피어는 왜 하녀에게 이렇게 이성을 부여했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재미있는 점이고 탁월한 점이다. 오셀로나 데스데모나나 어떤 상황에 처할 만한, 어떤 곤란한 상황,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 한 가지의 신념만 가지고는 뭐가 잘 안 되는 상황, 우리는 그런 것들을 조금 경멸적인 의미로 정치적인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 정치적인 상황이란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한 가지의 원칙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상황을 짐작을 해야 되는 것, 그런 것은 정말 볼 걸 안 볼 걸 다 보고 살아온 에밀리아 같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한다는 것도 이런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상황이라는 것이 잔대가리 굴리는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에밀리아는 "사람이 질투에 사로잡히면 그런 대답으로는 안되죠. / 건수 때문에 질투를 품는 게 아니라 / 질투에 차 있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 거거든요." 이건 질투를 위한 질투, 그렇게 가면 상황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은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이것이야말로 자기 안에 매몰되어서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있는 사람. "질투란 괴물이에요.  / 자가 생산하는, 자기 스스로한테서 태어나는." 에밀리아의 이 표현, 이 대사야말로 《오셀로》에서 가장, 상황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에밀리아만이 아니다. 이아고도 그걸 이해하고는 있는데 그걸 또 교묘하게 이용해서 나쁜 짓을 한다. 에밀리아는 인간의 내면에 있어서 질투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여준다. 3막 4장에서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대화, 대화라고 할 수도 없다, 이건 각자가 각자의 말을 하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오셀로는 어떤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데스데모나를 죽일 명분만 찾는데 그게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5막 2장이다. "대의명분이 중요하다.", "그녀는 죽어야 해, 아니면 더 많은 사내를 배반할 테니까." 이런 것은 진짜 나쁜 놈이다. 더 많은 사내를 배반할 테니까, 왜 오셀로가 예방을 하는가.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자기의 모든 걸 사랑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대의명분이라고 하는 게 고작 내가 죽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내를 배반한다는 것, 오셀로의 영혼은 이런 데서 벌써 구원을 받기는 어렵게 된다. 에밀리아가 5막 2장에서 한마디한다. "오 이런 아둔한 무어 인. 당신이 말하는 그 손수건은 / 내가 우연히 발견하여 내 남편한테 준 거야, / 그가 하도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 / 이런 사소한 물건에는 어울리지 않게━ / 훔쳐 달라고 애걸복걸을 해서 말야." 에밀리아는 사소한 물건이라고 본다. 상황에 대한 앎을 가진 자들은 이 상황에 관계된 요소들이 누구인가, 이 상황과 관련된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따져보고 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사태를 보는 관찰observation을 한다.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는 관찰Beobachtung을 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자가 생산하는 질투를 가진 자들은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살인이나 일삼는 멍청이" 소리를 듣게 된다. 

《오셀로》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건 악취미인 것 같기도 하다. 사소한 물건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이런 사람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무슨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는가. 《문학 고전 강의》 313페이지부터 314페이지까지 사랑에 대해서 한 페이지 정도에 걸쳐서 적어놓은 게 있는데 이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리고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한다. "이아고는 고귀한 관념으로서의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또 오셀로도 "허위의식으로서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사랑", 허위의식으로서의 사랑이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내이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은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것은 집착으로 변할 테고 사람을 죽일 것이다. 그런 것들을 순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정체성이 없는 허위의식으로서 현실에 발딛고 있는 사랑은 작은 의심으로 쉽게 무너지고, 순정한 사랑은 위기 앞에서 너무도 나약하며, 상식적인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는 사랑은 제한적이고, 물질적인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의 고귀함이 없어 물질적인 것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허위의식으로서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순정한 사랑이 있고, 상식적인 범위에서만 허용되는 사랑이 있고, 물질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다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저는 다 있어야 될 것 같다. "사랑은 어느 한 가지로만 규정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순정한 사랑은 위기 앞에서 너무도 나약해지니까 위기를 극복하려는 어떤 노력도 있어야겠다. 물질적인 사랑도 있어야 된다. 정말 사랑만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얘기도 하지 않는가. 

셰익스피어 드라마 같은 것은 읽고 독서 카드 한 장씩을 써서 꽂아 놓기를 권한다. 이렇게 꽂아놓은 종이를 꺼내서 나중에 다시 보는 것, 이게 바로 self-observation이다. observe라는 단어는 관찰하다는 뜻도 있고 법이나 규칙을 준수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관찰에는 observation인데 법이나 규칙을 준수하다는 것은 observance이다. self-observation, self-observance. 자기를 관찰하면서 여전히 바람직한 나를 스스로 지키고 있는가를 체크해 보는 것, 그게 바로 고전을 읽는 이유겠다. 

2024년부터는 근대의 텍스트들을 읽어가겠다. 《팡세》는 말이 필요 없이 실존철학의 텍스트이고 《팡세》를 읽으면서 실존철학에 관한 얘기도 좀 해보겠다. 언젠가는 실존철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주제 특강도 하고 강의를 하든지 할 텐데 일단 미리 조금씩 조금씩 얘기해 두고 또 여러분들도 조금씩 듣고 그러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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