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78 제32강(1) 파스칼 《팡세》

 

2024.01.06 문학 고전 강의 — 78 제32강(1) 파스칼 《팡세》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32강(1)

신의 불멸성과 인간의 필멸성, 그리고 필멸에 대한 자각이 낳아놓는 비참함
김학이, ⟪감정의 역사⟫

 

 

《문학 고전 강의》 해설 지난 시간에는 파스칼의 《팡세》에 들어서면서부터 근대의 문학 고전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잠깐 했다. 근대라고 하는 시기, 이른바 모던이라고 하는 시기, 지금 근대라고 하는 말은 사실 형해화된 표현이다. 근대라고 하는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근대라고 하는 말을 이제는 쓰지 말고 어떻게 보면 문학 고전에서는 특정 세기를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더욱이 문학 작품은 개인의 내면에 있는 어떤 심성을 드러내 보이는데 그게 어떤 시기하고 관련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았는가, 옛날 사람들은 자존심이 없었는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화를 낸다 어쩐다 하는 것도 특정한 시기하고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제가 그게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저렇게 찾아보다가 2023년에 김학이 교수가 쓴 《감정의 역사》를 읽어봤는데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드러나 보이니까 확실하게 좀 알 수 있었다. 근대 문학 고전을 읽으면서 근대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런데 그 내면에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 파스칼은 1623년에서 1662년이니까 17세기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이다. 괴테는 1749년에서 1832년이니까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그다음에 허먼 멜빌은 1819년에서 1891년이니까 19세기를 온전히 산 사람이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17세기 파스칼이 말하는 일종의 두려움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다음에 18세기 괴테 말년의 《파우스트》, 괴테는 차라리 19세기 전반이겠다. 그러면 괴테가 말하는 신에 대한 두려움과 허먼 멜빌이 말하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 안에 다 집어넣는다고 해서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신에 관한 문제는 어쨌든 공포를 가지고 얘기가 되는데 공포라고 하는 것이 아주 강력하게 부각되는 게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이다. 그 시기를 거치고 났을 때 파스칼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의 대상은 신 밖에 없다.  신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분노라고 하는 것은 신과 권력자만이 가지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파스칼은 신이 두렵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두려움이 신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낼 수는 없고 표현할 수는 없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신과 권력자만이 가지는 감정이고, 18세기에 들어서야 170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제 분노라고 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파스칼은 신이 구원해 주지 못할까 봐 두렵다 라는 것까지 갔는데, 그 고독이라고 하는 것, 소외되어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은 본인이 내가 나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에야 가능하다. 자기 의식이 있어야 고독이라는 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사회라고 하는 걸 의식하고 내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에야 고독이라고 하는 감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17세기에 살고 있는 파스칼은 고독이라고 하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고독이라는 감정 자체를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 19세기 초에 들어와서야 고독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렇다. 예전에는 파스칼의 《팡세》가 실존 문학의 어떤 그런 근원에 놓여 있는 작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실존이라고 하는 것, 실존 문학이라는 게 사실 19세기적인 심성 구조에서 생겨나는 것이니까 파스칼을 거기다 갖다 붙이면 파스칼은 원하지 않았던 알지 못했던 감정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니까, 말하자면 과거의 투사를 지켜버리는 것이니까, 여기서는 이제 파스칼의 《팡세》를 실존문학의 어떤 영향, 근원에 있는 것으로 보는 태도는 버리는 게 좋겠다. 일단 실존문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소외라고 하는 감정에서 시작이 되는데 그 감정은 19세기부터야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앞에서 분노라고 하는 말은 18세기 이후에야 보통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는데 분노가 좀 심하게 나오면 격노가 된다. 격노라고 하는 것은 권력자만이 가지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있기는 있다. 예를 들어서 김학이 교수가 쓴 《감정의 역사》를 보면 18세기부터 슬슬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라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경건주의 목사들, 경건주의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굉장히 중요하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들도 중요하지만 낭만주의 성립의 역사에서 도이치 로마틱의 성립의 역사에서는 경건주의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라든가 그 당시에 동시대인이었던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경건주의라고 하는 것은 빼놓을 수가 없다. 경건주의 목사들이 분노하는 것은 내가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맛이 없어서 몹시 화가 났지 분노했지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도덕 규범 그러니까 마땅함에 대해서 뭔가 당위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때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적인 감정은 아니다.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렇게 해야 마땅한 감정에 대해서 분노를 하는 것이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원래 신과 권력자만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하는 뉘앙스를 오래도록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위치에 있는 자가 분노한다고 하면 굉장히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다.  

김학이 교수의 《감정의 역사》 에필로그를 보자.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일기 끄트머리에 기막혀 웃을 일이다, 해괴하기 짝이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참으로 걱정스럽다 이런 감정 표현이 있는데 주로 기쁨, 슬픔, 분노, 염려가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순신의 분노는, 이순신은 권력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공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 분노는 분명히 특정한 대상이 있다. 이순신이 가장 분노한 대상은 원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사적으로 무언가 해코지를 해서 분노한 적은 없다. 원균에게 분노한 것이 17회이고, 그 외에 전쟁 및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노가 13회, 음모와 논공행상의 문제점이 3회, 전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군관들의 행태가 3회이다.  그러니까 이게 모두 다 공적인 것이다.  이순신은 정말 철저하게 공적인 인간인데 왜 원균에 대해서 왜 분노했는가. 무장의 본분에 어긋났기 때문에, 군인답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유교적인 본분 그리고 그 본분 위에 구축된 도덕 질서를 어긋났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라고 하는 표현을 써놓았는데 이순신은 왜군에 대해서도 두 번 분노했다. 폭우에 숨어서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분노했다. 왜군을 궤멸시킬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에 분노했던 것이다. 왜군도 군인이니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굉장히 공적인 분노이다. 이순신 장군의 분노라고 하는 것은 공적인 영역에 있다. 

지금 《팡세》를 읽기 전에 파스칼은 신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는데 공포 즉 두려움이 있다. 그런데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 말고는 왜 나를 구원에 이르지 않게 하는가 이런 것에 대한 분노는 없다.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과 바로 연결되는 것이 비참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32강 317페이지부터 320페이지 위에 있는 문단까지 구원에 관한 얘기가 있다. 기본적으로 《팡세》에 나타나는 또는 《파우스트》에 나타나는 《모비 딕》에 나타나는 신들은 인간을 두렵게 하는 존재다. 그리고 《팡세》에서는 그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다음에 《파우스트》에서는 그 두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모비 딕》에 대해서는 그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하는가. 《팡세》는 이겨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우스트》는 이겨낸다기 보다는 뭔가 대결도 하지는 않지만 《팡세》와는 조금 다른 국면으로 간다. 그리고 《모비 딕》은 분명히 극복이라고 하는 것을 한다. 그러니까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 존재를 앞에다 놓고 그 신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모습을 《팡세》, 《파우스트》, 《모비 딕》 이 세 가지를 쭉 이어보면 17세기 그리고 18세기 또는 19세기 전반 그다음에 멜빌의 19세기 후반에 있어 인간의 대응하는 방법 또는 그것에 대응하는 감정, 이런 것의 차이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런 것도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주제이다. 신은 여전히 17세기가 되었건 18세기가 되었건 19세기가 되었건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이다. 따스한 사랑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말이 그런 것이고, 그 존재에 대해서 인간이 어떤 감정으로 신을 마주하는가. 특히 프랑스에서는 키에르케고르가 19세기에도 두렵고 떨린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키에르케고르를 실존 문학의 근원에다 두는 게 적당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다시 정리하면 신은 기본적으로 두려운 존재이다. 그 두려운 존재에 대해서 《팡세》와 《파우스트》와 《모비 딕》은 인간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그 두려운 존재를 마주하는가의 차이가 있다. 《팡세》는 아주 분명하게 비참함을, 신이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놓고 인간의 비참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비참함을 부각시킨다. 《파우스트》에서는 비참함은 아니다. 낭만주의라고 하는 게 있다. 격동, 뭔가 확 피어나는 게 있다. 그다음에는 멜빌에서는 멜빌 개인의 어떤 그런 감정이 투사되어 나온다. 파스칼이나 괴테는 동시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거의 같이 느끼고 있다고 봐도 된다. 《팡세》와 《파우스트》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모비 딕》에 나오는 모습은 멜빌 개인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책 318페이지를 정리해서 말해보면 '근대성'이라는 말로 묶을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근대성이라고 하는 것을 그냥 하나의 특징을 가진 시대로 보고, 그 특징을 근대성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이라는 책이 있다. 전에 읽었는데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그 책을 읽지 않는다.  근대에 관한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그것은 불가능하고 서구의 근대성이라고 하는 것을 더 이상 우리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서이다.  근대성이라는 말로 이제는 묶을 수 없다. 그래서 모더니티라고 하는 말을 쓰고자 한다면 굉장히 조심해서 써야 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속성을 나열하지 않으면 그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다음에 신의 불멸성과 인간의 필멸성을 다루고 있는데 파스칼에서는 특히나 인간의 필멸성을 비참함으로까지 표현해서 내보인다. 신의 불멸성과 인간의 필멸성이라고 하는 주제는 《팡세》에서도 《파우스트》에서도 《모비 딕》은 아닌 것 같지만, 분명하게는 《팡세》에서는 인간의 필멸성이 비참함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파스칼, 괴테, 허먼 멜빌의 바탕에 놓여 있는 신은 기독교의 신인데, 이게 불멸의 존재이고 그런데 신은 각각의 개인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제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아구스티누스적 기독교라고 하는 것에서도 관련이 있다. 필립 셀리에가 "아구스티누스적인 기독교"를 파스칼이 받아들였다고 말할 때 그 부분은 조금 다르게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적어도 《팡세》에 와서는 각각의 개인에게 신이, 이제 호소하는 신이 된다. 그러다 보니 구원을 얻고자 하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이다. 《팡세》는 영원한 생명을 못 얻을까 봐 걱정하고, 거기에서 화를 내지 않고, 그런 걱정이 자신의 비참함을 더욱더 강하게 드러나게 해준다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제32강 318 이들의 '근대성'을 찾아내어 하나의 범주 안에 넣을 수도 있겠지만, 공통점을 찾는다 해도 그것을 '근대성'이라는 말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근대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저 이들을 묶는 주제가 어떤 것인지 정도만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32강 319 파스칼, 괴테, 허먼 멜빌의 바탕에 놓여 있는 신은 기독교의 신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분명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신은 인간이 되었던 신입니다. 필멸자가 되었던 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각각의 개인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호소하는 신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개인이 직접 신과 소통하여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다음번에는 320페이지부터 얘기를 하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