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변증법(1) / 특강 철학·인문학

 

2024.01.25 🎤 변증법(1) / 특강 철학·인문학

[1강: 1.24(수)변증법(dialectic)이란 무엇인가?]

일시: 2024. 1. 24. 19시 30분-21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602
강의 자료: https://www.buymeacoffee.com/booklistalk/dofimagibe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 편제를 보면 수학과나 물리학과나 이런 게 있는 이과대학이 있고, 철학과나 역사학과나 이런 데가 문과대학이 있다. 지금은 문과대학, 이과대학 이렇게 나뉘어 있지만 제가 대학교 들어갈 때만 해도 문리과 대학에 들어갔다. 그래서 제가 대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때 샀던 책들을 보면 문리과 대학 철학과 강유원 이렇게 써놓았다. 문과대학과 이과대학을 합쳐서 문리과 대학이라 한다.  이것의 차이를 한번 생각해 보자.  원리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수학과 물리학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수학은 비유클리트 기하학, 리만 기하학이 나온 이후로는 조금 달라졌지만 어쨌든 수학은 좌변과 좌변과 우변의 등치를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수학은 가상 학문이다.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면 수학적으로 들어맞는 것이고,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수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체계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체계적 완결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문과 쪽에서는 논리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 않은데 인생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차이, 역사학과 철학의 차이가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잘 생각해 봐야 된다. 수학과 교수와 물리학과 교수는 지향하는 바가 아주 다른 것이다. 수학을 잘해야 물리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물리학을 잘하면 수학을 잘할 수 있다도 아니다. 아주 기본적으로 그 학문 자체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이다. 우리가 virtual 하다는 말, 가상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virtual reality라는 게 가상현실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유 속에서 완결시키는 현실일 수도 있다. virtual이라는 말은 이렇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체계적인 완결성을 수학은 추구하고 어떻게 했든지 아귀를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수학자가 추구해야 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합성coherence, 즉 딱 맞아떨어져야 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언제 어디서나 딱 맞아떨어진다.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철학도 그것을 추구한다. 철학의 기초 학문이 논리학이다.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pure한 것을 추구하는데 순수purity하다는 것은 아주 이론적theoretical이라는 것이다. 말로는 완전히 딱 들어맞는 걸 추구한다. 즉 coherence가 있는 것이다. 이상적ideal이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이상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 이것의 희랍어로 eidos,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이다. ideal한 것이 곧바로 real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이건 관념이고 현실 속에 있는 실제인데 그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일단 머릿속에 뭔가 ideal한 것이 있어야만 뭘 하더라도 한다. 그러니까 철학은 수학과 같은 것이다. 일단 물리학자들은 수학으로 계산을 해보고 것을 관찰을 통해서 체크를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어보면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문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수학 1등급 아닌 애들은 못 들어온다는 얘기가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기하학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수학, geometry이다. 추상적인 사유, ideal한 것에 대한 사유, 사유 속에서 뭔가 완결을 짓겠다는 그런 사유 방식에 대한 의지나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철학을 공부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철학은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인생을 잘 사는 데 필요한 설계도를 그리는 학문이다. 잘 사는 것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부딪혀가면서 할 일이다. 물리학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상이 언제든지 틀린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그것을 근본적으로 찾아보려는 게 물리학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여기는 체계적인 완결성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열린 체계이다. 그러니까 과학자한테 물어보면 정답은 없지만 아주 높은 개연성을 얘기해 줄 수 있다.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과학적 탐구의 논리》에서 얘기한 것이다. 열려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게 과학 이론의 특징이다. 언제든지 반증가능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증거에 의해서 논박될 수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높은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예측을 해볼 수 있다 라는 것이 과학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으로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게 공학이다. 그러면 수학과 물리학이 이과대학에 있는데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하고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하고는 일단 추구하는 바가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쪽은 체계적 완결성을 추구하고 정합성을 추구하는데 이쪽은 오픈 시스템이다. 언제든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너무나 정교하게 뭔가 딱 맞아떨어지면 불안해하는 사람이고, 수학자들은 너무나 정교하게 안 맞아떨어지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이다. 불안해하는 영역이 다르다. 지금 과학과 수학 얘기가 철학과 역사에도 그대로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과목이 다른 게 아니라 학문방법론, 지향하는 태도가 수학과 철학은 한 영역이고. 물리학과 역사학의 한 영역이다. 뉴턴의 주저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뉴턴은 수학자이지 물리학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뉴턴은 물리학과에서는 안 배워도 철학과에서 배운다.  

역사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새로운 증거가 등장하면 완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렇다. 이것은 부정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것을 계속 탐구해서 쌓아올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죽는다. 그게 고통이다. 그러면 형이상학은 체계적 완결성 중에서도 최고의 창의적 체계적 완결성을 자랑하는 영역이다. 즉 전 우주적인 것을 하나의 체계 속에 끼워넣기 위해서 가상으로 신이 있다고 전제하고 학문을 짜는 것이다. 제가 전공이 형이상학인데, 가끔 '역사 형이상학 전공'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즉 체계적 완결성에 있어서의 최고의 학문이라고 하는 형이상학 전공자가 역사책을 열심히 읽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체계적인 완결성이 없으면 인생이 힘들고 그렇다고 해서 가상의 세계 속에서 체계적인 완결성만을 추구해가지고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 굉장히 다변하고 다양하고 자의적이고 다수적인 현상phenomenon이 있다. 나의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를 거슬리는 수많은 현상들이 있다. 그러면 이 두 개 모두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삶의 국면phase이다. 우리의 삶 속에는 체계적인 완결성의 측면도 있고 끝없는 현상의 측면도 있다. 이 두 개를 동시에 품고 있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동시에 순간적으로 ideal한 것과 그 ideal한 것을 무너뜨리는 사태가 동시에at the same time 머릿속에 들어온다. 그걸 우리는 모순이라고 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는 아닌데 우리의 삶의 기본 밑바닥에는 동시에 모순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모순적인 것들이 동시에 떠오르는데 그것을 변증법이라고 한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실존적인 국면들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들을 규율하는 논리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이런 것들을 싸안고 가는 어떤 실존적인 측면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니까 어디에서나 써도 된다. 그러나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우리는 수학만 가지고는 살 수 없고 물리학만 가지고도 살 수 없고 두 개가 다 있어야 된다. 그런데 수학과 물리학은 동시에 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좌절하고 무너지고 그러면서도 그 좌절에 매몰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머릿속에는 항상 ideal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너진 순간에 ideal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변증법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주 popular하게 쓴다면 오뎅도 먹고 싶고 떡볶이도 먹고 싶다고 할 때 섞어서 먹으면 되잖아 하는 것을 떡볶이와 오뎅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말하면 된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유로는 체계적인 정합성, 체계적인 완결성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지극히 남루하다. 이 남루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남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은 무엇인가, ideal한 것이 계속해서 공급되지 않으면, 남루의 법칙이 있어서 남루가 가속화된다. 인생이라는 건 한 번 남루해지면 끝없이 남루해진다. 그래서 긴장감을 줘야 되는데 그 긴장감을 우리가 돈으로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의 남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긴장을 주려면 real한 것이 아니라 ideal한 것을 공급해야 된다 


강의 자료를 보자.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의 모순성Widerspruch이다. 모순성은 독일어로 Widerspruch, 영어로 contradiction이다. Widerspruch는 서로 충돌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의 우연성과 모순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순을 우리가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을 변증법이라는 말로 할 수 있다. 아주 1차적인 의미로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이 변증법적 상황이다.  헬라스어로 metabasis(이행)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meta는 두번이고 basis는 간다는 말이다. 두 번 간다가 아니라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한 번 가고 네가 나한테 한 번 오면 metabasis이다.  그러니까 내가 저 사람한테 말을 걸었는데 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나에게 합당한 말을 넘겨줘야 대화가 된다.  내가 한 번 말을 했는데 저쪽에서 말을 먹어버리면 대화가 안 된다. 그러면 metabasis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 개요"를 보자. 여기 강의 자료에 들어있는 것은 철학과에서 이론적으로 따져 물을 때 변증법에 관한 주제를 찾으면 이렇게 나오는 것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는 "문답법의 직접적인 발전형태로서 형상形相(eidos)의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문답법이라는 게 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形相(eidos)의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을 아까 썼는데 ideal한 것을 알아야 된다. 기준이 있어야 지금 현재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들 중에 무엇이 틀렸는지 식별해낼 수가 있다. 플라톤은 형상, ideal한 것을 알아야 현실이 틀린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 ideal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 환경이나 역사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배경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이상적인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을 찾아보는 것이 플라톤에서 이데아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올바름의 기준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게 플라톤의 형상eidos 이론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것을 플라톤은 변증법이라고 말을 했다. 

그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 참된 제일 전제에서 출발하는 논증(apodeixis)에 대비되는, 일반으로 승인된 의견(通念, endoxa)으로부터의 추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이기보다는 그냥 사람들하고 고만고만하게 대화를 잘하는 방법이다. 현실적으론 그렇다.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없고 그냥 그냥 주고받는 얘기가 통념으로부터 뭔가를 해나가는 것을 변증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으로 변증론이라고 번역이 되는 《토피카》라는 책이 있고, 《영혼론》에서는 공하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dialektikos라는 말과 kenos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 그다음에 칸트에서는 "가상 비판의 논리학", 칸트에서도 변증법이라고 하는 게 진리를 탐색하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것의 거짓임을 드러내주는 방법을 철학적인 맥락에서 변증법이라고 한다.  지금 이 강의 자료에 있는 것은 철학적인 얘기들만 하는 것이다. 

"❧ 대화의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을 보면 사람이 대화를 할 때는 의견의 대립에서 시작하여 대화를 전개하면서 마지막에는 시작과는 다른 내용의 합의에 이른다." 이게 대화의 목적이다.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을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의견의 대립이 있어야 대화를 한다.  "모순이나 대립을 극복하는 논리", 즉 서로 다른 내용, 의견의 대립이 있기 때문에 모순이나 대립을 극복하고, 그다음에 가만히 처음부터 있다가 시작 끝으로 가기 때문에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전개되는 동적 변화의 논리"이고, 그다음에 처음부터 합의를 목적으로 대화가 시작됐기 때문에 "대립자들의 합의를 목적으로 하는 목적론적 논리"이고, "전체가 합의하므로 전체화의 논리"이다.  이게 대화의 방법으로서의 변증법에 관한 한 1번 뜻이다. 

그 다음에 "❧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그면서도 담그지 않는다. 있으면서도 없다."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하나이며 같다." 헛소리인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인생을 살아보면 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그지만 즉 한강이라고 하는 강에 몸을 담그지만 그 한강에 흘러가는 물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한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에 몸을 담그는 건 똑같아도 그 순간순간에 강물은 다르다. 인생은 살 만한 것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에 갑자기 어디선가 벼락이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겪는 세상의 모든 사태가 동시에 원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현상적인 것이기도 하고 그런 모순의 측면을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것이다. 인생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러니까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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