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보커: 신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0


- 10점
존 보커 지음, 이재만 옮김/교유서가


서문

전자법에 관하여

1. 신은 존재하는가?

2. 왜 신을 믿는가?

3. 아브라함의 종교들: 유대교의 신 이해

4. 아브라함의 종교들: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

5. 아브라함의 종교들: 이슬람의 신 이해

6. 인도의 종교들

7. 신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관하여

감사의 말/ 참고문헌/ 독서안내/ 역자 후기/ 도판 목록




도서목록: 알라딘 서재 옮긴이 이재만 님의 더 읽을거리


서문

11 요점은, 신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상이한 집단과 종교가 신을 묘사하고 특징짓는(즉 신에게 특정한 본성이나 성격을 부여하는) 방식들은 엄청나게 다르고 또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것이다. 신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종교들과 신자들은 대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꺼리지만 그렇게 내키지 않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충성심과 신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 이해와 특징짓기는 한결 같을 수 없다.


12 가장 단도직입적인 답변은 '신'이란 사람들이 어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실재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낱말이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교들은 그 궁극적인 실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식별하고 묘사할 테지만, "인간 지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무한한 신비"인 그런 실재가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같은 입장일 것이다.


1. 신은 존재하는가?

22 현대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은 이 물음을 조금 다르게 표현했다. "신이 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임시로) 이렇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본질적으로 형체가 없고 어디든 편재하고, 우주가 어떠하든 그 우주의 창조주이자 보존자이고, 완벽하게 자유롭고, 전지전능하고, 완벽하게 선하고, 도덕적 의무의 원천인 어떤 인격이 필연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28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들이 우주에 있는 많은 사물들 가운데 어떤 사물을 가리켜 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이 모든 사물의 창조주 겸 보존자라면, 이 우주든 다른 어떤 우주든 모든 우주의 창조주 겸 보존자라면, 신은 피조물의 일부일 수 없다. 신은 우주의 수많은 대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이는 희귀 동물을 검사하듯이 신을 검사할 수도 낯선 이를 소개받듯이 신을 소개받을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29 당신과 내가 지금 우연히 여기에 있을지라도 내일은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신이 오늘 여기에 있다가 내일이면 떠나가는 것도 아니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우연적 존재로서 시공간의 일부이지만, 신이 모든 우연적인 것의 근원이라면 신은 우연적이지 않다. 신은 그저 있다. 신이 그저 있어야만 그리고 우리와 달리 신이 특정한 시공간에 속하지 않아야만 신으로부터 시공간(실은 만물)이 생겨날 수 있고 신에 의해 시공간이 유지될 수있다. 신이 신이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산하되 그 자신은 생산되지 않아야 한다.


39 전통적으로 이해해온 신, 즉 전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 낱말과 언어로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많은 이들은 20세기 동안 그 전통을 포기하고 현세의 용어로 신을 재정의했다.


41 그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서 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신을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저 너머"로 정의했다. 우리가 닿지 못하는 천상의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여기 우리 한가운데에 거하는 신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월성에 대응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신을 내재자(immanent, '안에 거하다', '머무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in + manare에서 유래)로 인식해야만 한다.


41 20세기에 '신의 죽음' 선포가 불러온 한 가지 결과는 내재성의 관점에서 낱말 '신'을 재정의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지를 탐구한 것이었다.


41 자연의 관점에서 신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17세기 과학혁명 초기까지, 그리고 특히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스피노자는 '신'이란 유일 무이한 무한한 실체이고 따라서 자연과 같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신 또는 자연이라 부르는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에 대한 이 견해는 보통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이 견해는 범신론(pantheism, 그리스어 Pan(모든 것) + theos(신)에서 유래)의 한 형태다.


53 귀추법은 틀릴 수 있고 잠정적으로만 지지할 수 있고 위험 요소를 내포하는 가설을 세운다. 그런 까닭에 귀추법은 우주가 언제나 믿을만한 곳이고 사람들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말할 수 있다는 가정을 믿고 신뢰하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기반 위에서 우주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서 시작해 귀추법에 따라 우주를 낳았을 개연성이 가장 큰 원인은 신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53 스윈번이 「신의 존재 The Existence of God」에서 말한대로 그런 논증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 논증들은 모두 전제에서 기술한 현상을, 의도적으로 그런 형상을 야기하는 행위자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논증이 되고자 한다. 우주론적 논증은 세계의 존재로부터 의도적으로 세계를 낳은 인격, 즉 신을 도출한다. 설계 논증은 세계의 설계로부터 의도적으로 세계를 그렇게 만든 인격, 즉 신을 도출한다. 나머지 논증들도 모두 세계의 특정한 특징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그런 특징을 가진 세계를 만든 신을 도출한다."


53 그러나 그렇게 추론한 가설은 귀추적으로 추론한 다른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기껏해야 참일 확률이 가장 높은 설명이지 반박할 수 없을만큼 확실한 설명은 아니다.


55 플루를 설득한 계기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우주로부터 귀추적으로 추론한 신을 가리키는 논증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과학으로서의 과학은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고찰해온 세 가지 증거 ━ 자연 법칙, 목적론적 구조를 갖춘 삶, 우주의 존재 ━ 를 설명하려면 자기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를 둘 다 설명하는 지성체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한 신 발견은 실험과 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과 수식이 베일을 벗겨 보여주는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루어진다.


58 신은 그 질문에 내놓는 논리적으로 합리적이고 가장 개연성 높은 답변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2. 왜 신을 믿는가?

65 설령 아퀴나스의 주장대로 신의 존재를 논리적·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할지라도, 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과 상은 특히 기도와 경배를 비롯한 여러 쓰임새가 있기는 해도 언제나 불충분하고 (기도하는 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듯이) 수정과 변경에 필연적으로 열려있다. 이런 수정과 변경이 불러온 결과 중 하나는 모두가 합의하는 단일한 '신 가설'이 없다는 것이다. 신 가설과 특징짓기는 종교들마다 제각기 다르며, 심지어 신의 계시 ━ 예컨대 그리스도교의 성경, 이슬람의 꾸란, 브라만교의 베다 ━ 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두는 종교들 간에도 서로 다르다.


66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설령 신자들이 계시 기록을 문자 그대로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실제 기록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언어들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신과 달리 그런 언어들은 특정한 시점에 말하거나 쓸 수 있는 내용에 영향을 끼치는 우연적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77 실제로 많은 신자들은 세계("인간의 삶이라는 분주한 무대")가 종교의 의제를 설정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세계는 언제나 종교의 의제뿐 아니라 '신의 의제'까지 설정한다. 세계가 중간에서 매개하지 않는다면, 신은 이를테면 특정한 환경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을 구하기 위한 진리의 말씀을 육화하지도 계시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78 역사를 통틀어 한편에서는 신에 대한 많은 이해와 특징짓기가 의문시되고 수정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많은 이해와 특징짓기가 확고해지고 확증되었다. 두 과정 모두 신에 대한 이해가 형성되고 변형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3. 아브라함의 종교들: 유대교의 신 이해

83 도전과 변화의 과정은 유대교의 신 이해로 귀결될 (역사적) 여정의 초창기부터 나타났다. 그 이해는 유대교 성서(그리스어로는'책들'을 뜻하는 비블리아 biblia)를 구성하는 문헌들, 즉 대략 1500년에 걸쳐 쓰인 여러 범주의 문헌들 모음에 뿌리박고 있다. 유대인은 그 모음을 미크라(Miqra, 읽기 또는 독송)나 하세파림(HaSefarim, 책들), 또는 성서를 이루는 세 부분(처음 다 섯권인 율법서 토라 Torah, 예언서인 느비임 Nebiim, 성문서인 케투빔 Ketubim)의 머리 글자를 따서 타나크(Tanakh)라고 부른다. 토라는 유대교 경전 전체를 가리키기도한다(흔히 이 의미로 쓰인다).


86  「신명기」의 이 대목은 신 이해와 특징 짓기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족과 여타 민족들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말고 그들의 신앙 ━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해 올리는 발칙한 일" ━ 까지 거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의 믿음 가운데 일부, 특히 신의 이름들을 받아들였다. 가나안족의 신앙에서 최고 신인 엘(El)은 자신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릴 대리인들(엘로힘, '신들')을 임명하고 그들은 다시 감독관들인 바알림('주인들', 또는 '소유자들')을 임명하며, 바알림은 땅을 돌보고 자신들에게 올바른 의례와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풍요를 보장한다.


86 '약속의 땅'(즉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실제로 가나안의 믿음과 문화를 많이 흡수했고, 특히 타나크를 적을 수 있게 해준 표기 체계를 받아들였다.


93 현실의 왕들(현실의 메시아들)이 대부분 실패했음에도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거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희망은 미래로 투영되어 하느님께서 언젠가 당신의 지상 통치(또는 나라)를 확립할 메시아를 보내주시리라는 믿음이 되었다. 성전 건설과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신에 대한 이해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95 티나크에서 이스라엘을 돌보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놀라운 말들이, 죽음 이후에 이 신실한 돌봄이 계속되리라는 어떠한 믿음도 없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 시대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들은 현세에 지속된 하느님의 신실함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4. 아브라함의 종교들: 그리스도교의 신 이해

114 근본적인 물음은 예수 추종자들(갈릴리에서 하느님을 만났다고 믿은 사람들)이 처형된 범죄자가 진정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계속 고수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 본인은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이기에 지금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는 믿음을 물리쳤다(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 불렀다. (칭호가 아닌)이 표현은 성서에서 '다른 모든 사람처럼 죽을 수밖에 없지만 장차 하느님의 구원과 변호를 받을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수는 분명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부르짖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나이까?" 그렇다면 초기 추종자들은 어떻게 예수가 약속된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122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계약과 목표를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한다는 생각은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중대한 물음들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갈릴리와 유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 하느님의 영향을 틀림없이 끼쳤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말과 행동을 자신의 힘으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라 부른)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시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123 결국 예수는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통일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임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인간임의 의미를 없애지 않는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요컨대 예수는 더 뛰어났던 몇몇 순간만이 아니라 시종일관 하느님의 실재를 육화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131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가 유대교 성서에 뿌리박고 있음에도, 예수와 성부의 관계와 삼위일체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교의 하느님 이해 및 특징짓기와 분명히 다르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우리는 같은 하느님을 경배하는가?"라는 질문은 현실적이고도 심각한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어떤 답을 내놓든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모두 하느님을 또 다르게 이해하는 종교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종교는 같은 전통에서 유래했으나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참된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두 종교는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했다.


5. 아브라함의 종교들: 이슬람의 신 이해

139 무함마드가 죽은 이후 일부(특히 8세기와 9세기에 무타질라파)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언급한다는 이유를 들어 꾸란이 특정한 환경에 맞추어 창조되었다(즉 지어졌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우세를 점한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견해였다. "꾸란은 알라의 말씀으로 사본에 쓰이고, 기억으로 보존되고, 연설에서 낭송되고, 예언자에게 계시된다. 우리가 발음하고 쓰고 낭송하는 꾸란은 창조되지만 꾸란 자체는 창조되지 않는다." 훗날 꾸란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낭송 역시 창조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는 믿음이 받아 들여졌다. 그러므로 무슬림 신앙에서 꾸란은 알라가 무함마드를 통해 세상에 전해준, 변질되지 않은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계시다.


6. 인도의 종교들

155 사실 인도 종교는 단일체보다는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 대가족에 더 가깝다. 인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족 유사성이며, 그런 까닭에 이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


156 자이나교도와 불교도는 사실상 별개 종교가 된 초기 사례들이다. 그렇기는 해도 분가하지 않고 남은 구성원들은 지금도 가족의 일원임을 자처한다. 그들의 인도 철학 체계 분류법에 따르면 여섯 체계는 정통파(아스티카 astika)로 인정받는 반면에 자이나교와 불교를 포함하는 세 체계는 베다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는 까닭에 이단파(나스키타 nastika)로 간주된다.


182 인도 신앙에서 신의 현현체들은 그 자발적인 너그러움의 일부다. 신은 너그럽게도 자신을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길과 형태를 자진해서 창조한다. 인도 신앙은 '다신교'가 아니다. 일자에 다가가고 일자를 발견하기 위한 통로인 형태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신은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도 아니다. 형태와 이미지는 숭배 대상이 아니라 신과 직접 조우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7. 신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관하여

187 첫번째 '옷' 종류는 '창조 의복', 즉 우주의 아름다움, 질서, 신뢰성, 광대함이다. 우리는 철학자와 시인 ━ 그리고 신자들 일반 ━ 이 이런 옷을 입은 신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떻게 인정하는지를 이미 살펴 보았다.


190 신이 '입은' 두번째 옷 종류는 '영감' ━ 예술이나 과학 기술의 영감이든 인간을 매개로 하는 영감이든 ━ 이라고 일컫는 인간들과의 상호 작용이다. 이것은 창조성의 지속적인 작용이다.


202 신은 초대이며 누구에게나 초대장을 보낸다.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기도를 하라. 기도의 시작은 단순하기 그지 없다. 그저 자의로 신을 마주 하고서 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당신께서 나를 만드셨고 당신께서 나를 살게 하십니다. 이 숨과 이 순간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당신은 저를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알도록 도우소서." 기도는 사랑의 관계이므로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분명 나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행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건 출발점일 뿐이다.


역자 후기

223 넓게 보면 종교들이 제각기 걸어온 길들은 두 종류로 묶인다. 하나는 신이 인간 지성에 불가해함을 인정하면서도 신이 내려준 계시와 신이 창조한 세상 만물에 근거하여 신에 대해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함으로써,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전제를 버림으로써 신에게 다가가려는 '부정의 길'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대로 어느 길을 택하든 인간이 홀로 걸어가는 한,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무지의 구름'은 걷히지 않는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0)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