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12)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4)

 

2023.12.20 📖 사회사상의 흐름(12) ━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4)

📖 사회사상의 흐름

  •  경제와 정치의 연관
    • 마르크스의 중심 생각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용납되었으나 부르주아지 자신들은 스스로 정치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하였다는 것.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국가, 그것도 중앙집권화된 행정국가의 결정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토크빌이 분석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 마르크스는 국가 기구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자율성을 획득하였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혁명은 이 기구를 파괴하는 데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생산 수단 소유의 집단화, 경제 운영의 중앙집권화는 국가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이를 파괴하거나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 마르크스는 국가의 역할에 관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파리 코뮌에 관한 언급에 근거한다면, 중앙집권적 국가의 해체와 지방분권화를 주장하면서도,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과 국가 기구의 중앙집권화가 최대한으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
    • 러시아 혁명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정치적 질서가 자율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증명. 볼쉐비키는 루이 보나파르트보다 더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 사회 전체 구조를 변경시켰고 전능한 국가기구를 기초로 사회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다. 

 

❧ 결론

  •  프랑스 정치사회학 학풍. 창시자는 몽테스키외, 이어받은 인물은 토크빌. 엘리 알레비Élie Halévy(1870-1937)도 이 전통에 속한다. 정치에 관한 본질적 관심, 사회의 하부구조를 무시하지는 않으나 정치적 질서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
  • 공식적인 전문적 사회학자들. 콩트에서 시작하여 뒤르켐에서 절정에 이른 것. 사회적 현상과 관련하여 경제적 현상과 정치적 현상을 경시. 사회적 실체의 통일에 강조점을 두고 그것을 기초로 다양한 분석과 개념을 구성함으로써 전체 사회 구조를 재구성하려 시도
  • 마르크스주의 학파. 경제 조직과 사회 하부구조의 관점에서 사회적 실체를 설명하고 그것에 진보의 도식을 결합
  • 이 세 학풍은 가치체계와 세계사에 관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근대사회에 관한 해석들. 콩트는 근대사회, 즉 산업사회를 찬양. 정치사회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사회는 민주정 사회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 성취라고 볼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사회에 대한 콩트적 열정과 자본주의에 반항하는 의분심을 겸비하여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 낙관적이고 먼 미래에 관해서는 비관적. 콩트 학풍은 낙관주의에 자족, 정치사회학적 학풍은 심중하고 회의적,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적이어서 참화를 결국 바람직한 것으로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 각각의 학풍은 제 나름대로 사회적 실체를 재구성하며, 사회의 다양성에 대해 고유한 이론을 제공.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 움직이고 사고한다.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 마르크스 부분을 마저 읽고 결론 부분을 정리를 하겠다. 오늘은 정치와 경제의 연관 부분은 일단 마르크스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어떤가에 대해서 조금 보충해서 제 생각을 얘기하고 그다음에 결론으로 들어가겠다. 앞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중심적인 생각은 루이 보나파르트가 부르주아 계급, 즉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였고 그런 까닭에 부르주아지가 루이 보나파르트를 용납했다. 그러면서도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정치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분석한 내용이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였는데 스스로 정치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하였다. 다시 말해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앞서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농민계급을 대변한다. 그런데 동시에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이익도 옹호했다. 그러니까 부르주아지가 용납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정치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농민도 아닌데 농민 계급을 대변하고 부르주아지도 아닌데 부르주아지를 대변한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3세가 되었으니까 왕당파이다.  따라서 그는 어떤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는 있지만 그런 계급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그룹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국가 권력을 쥐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분석 안에는 국가, 그것도 중앙집권화된 행정국가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마르크스가 아주 상세하게 잘 분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토크빌이 이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뚜렷하게 분석을 한다.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읽어보면 시종일관 분석하는 곳이 중앙집권화된 행정국가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얼마나 침해하는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을 한다. 정치라고 하는 영역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국가기구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자율성을 획득하였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사회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활동 영역이라고 좁게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마르크스에 있어서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국가 소멸론이다. 국가소멸론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를 망가뜨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국가는 state apparatus, 즉 국가 기구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생산 수단을 집단적으로 소유해야 되고,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파괴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집단적으로 소유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냥 내 것이라고 거기다가 찜하면 되는가? 법률적으로 그것을 보장을 해야 한다. 법률적으로 보장하고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경제 운영을 해야 되고 그러려면 국가기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과 국가 기구의 중앙집권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부르주아지로부터 그것을 강탈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해체하고 지방분권화를 주장하면서도, 자율적 결사체로 돌아가야 된다고 얘기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권력과 국가기구의 중앙집권화가 있어야만 그 혁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서로가 서로를 맞물고 있는 그런 주장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이건 모순이다.  

제5부 279 마르크스는 진정한 혁명은 이 기구를 인수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데에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토크빌 같으면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칼한 응답을 하였을 것이다. 즉 만약 생산 수단의 소유가 집단화되고 경제운영이 중앙집권화되어야 한다고 선포한다면, 무슨 기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기구가 파괴되거나 감축될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에 있어 국가의 역할에 관한 두가 지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 그가 파리 코뮌에 관해 말한 것을 보면 코원━이것은 중앙국가의 해체와 그 지방분권화인 것인데━은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 바로 그것이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우리는 마르크스 속에서 정반대의 사상도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과 국가기구의 중앙집권화가 최대한도로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마르크스만 그런 게 아니다. 토크빌도 그렇다. 사실 여기서 레이몽 아롱이 토크빌은 비판을 하고 있지 않은데, 토크빌이 주장하는 바는 중앙집권적 행정국가가 전체주의로 빠져든다. 그러니 그것은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토크빌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중앙집권주의 국가를 해체하고 지방분권화를 해야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즉 자율적 사회체, 자율적 결사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잘 보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는 자율적 결사체를 성립시키는 일 자체도 국가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그 목가적인 풍경에 자율적 결사체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제 토크빌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레이몽 아롱은 자기가 토크빌 라인에 서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토크빌에 대해서 그 점을 얘기하고 있지 않는데 우리는 그 점을 좀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토크빌을 읽다보면 이 사람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지점이 있다 라고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즉 자율적 결사체와 토크빌의 전체주의 비판 이 두 개가 맞물려 있는 것 같은데,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율적 결사체를 원한다. 그런데 자율적 결사체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누가 만들 것인가 이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자율적 결사체는 자율적 결사체를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자율적 결사체를 만들자고 하는데 그 자율적 결사체를 어떻게 구조화할 것이고, 각각의 결사체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라든가 다른 결사체와의 관계라든가 이런 것들은 누가 조정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전에 데비이드 밀러의 《정치철학》을 읽으면서 자유방임주의자들 또는 공동체주의자들 또는 무정부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바로 국가 기구를 극도로 혐오하고 그것을 없애야 된다 라고 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논의했던 점이 있다. 토크빌에서도 그런 점이 있다. 그러니까 토크빌은 전체주의 비판이라든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보여주는 그런 보고서가 탁월한 점은 있는데 아무래도 이 사람이 《아메리카 민주주의》에서 보면 미합중국의 타운들, 타운의 민주정 이런 것들에 굉장히 호감을 가졌던 것 같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이 사람이 자율적 결사체에 대한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국가 기구를 배제한 상태에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건 토크빌 만의 잘못은 아니다. 이게 참 힘든 것이다. 나라가 폭력적이고 사람을 괴롭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를 벗어나서, 더군다나 지금 우리는 국민 국가에 살고 있다, 어디로 가서 아주 유토피아적인 목가적인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가능하다. 국가가 이미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쨌든 마르크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지점들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롱이 지금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혁명이다. 볼쉐비키는 루이 보나파르트보다 더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 사회 전체 구조를 변경시켰고 전능한 국가기구를 기초로 사회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은 국가 기구의 상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거의 절대적 자율성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사회주의의 확립에 아주 첩경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아롱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주장을 배신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그의 이름을 내건 사람들에 의해서 사실은 부정되었다고 하는 미묘한 시치미 떼기,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5부 280 사회 갈등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질서가 자율성을 갖는다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증명한 것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그때 한 집단의 사람들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한 것과 비슷하나 더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장악함으로써 러시아사회의 전체구조를 변경시켰고 더 나아가 소수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고 국가기구의 전능을 기초로 하여 이를 테면 사회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식적 마르크스주의자 이론에서 배제된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 분석에서는 나타나 있고 또는 마르크스 자신의 이름으로 그 참여자들이 행하였던 여러 사건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겠다. 


이렇게 해서 1848년 혁명과 사회학자들에 대해서 거론을 하고 여기서 이제 아롱은 정리한다. 세 가지 학파 또는 학풍을 이야기하는데 첫째가 몽테스키외를 창시자로 하는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인물은 토크빌, 프랑스 정치사회학 학풍이 있다. postype에서 통독을 하고 있는 엘리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엘리 알레비가 1870년에서 1937년까지 살았던 사람인데 엘리 알레비도 이 전통에 속한다고 아롱이 거론을 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고, 사회의 하부 구조, 경제적 생산의 활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데 정치적 질서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리버럴들이다, 아롱도 자기도 여기에 속한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그다음에 프랑스식 사회학은 콩트에서 시작해서 튀르켕에서 절정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제적 현상과 정치적 현상 이런 것들에 대한 어떤 분석을 조금 가볍게 여기면서 사회적 실체의 통일에 강조점을 두고 사회 전체 사회 구조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이를 프랑스 사회학이라고 하는데 요즘에는 사실 거의, 튀르켕의 《자살론》이라든가 《사회분업론》이라든가 이런 것을 읽어보면 정치에 관한 얘기는 하나도 없다. 세 번째는 마르크스주의 학파, 경제 조직과 사회 하부 구조의 관점에서 사회적 실체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의 진보의 도식을 결합한다. 물론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정치라고 하는 영역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학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경제적 결정론 또는 경제적 규정론의 입장에 선다. 그러면 그것을 잣대로 해서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여타의 것들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다른 영역이 가지고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사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유일하게 한 가지만이 본질적인 것이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절대적 결정론의 입장에 서버리면 그것 자체가 이미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관찰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를 메타적으로 사유하고 있지 못하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나 콩트나 토크빌 모두 다 읽어야 된다. 콩트는 이것을 밀고 가다가 이것을 고려하지 않아서 뭔가 균형 감각 있는 그런 통찰을 하지 못했구나, 마르크스는 또 이것이 문제였구나, 토크빌은 이건 잘했는데 이건 문제구나 이런 것들, 이것은 양비론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제5부 280 이제까지 고찰한 네 명의 저자들은 세 가지 운동 또는 학풍의 기초를 이룬다. 첫째는 정치사회학의 프랑스 학풍이라고나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그 창시자는 몽테스키외요 그를 이어받은 위대한 인물은 토크빌이다. 엘리 알레비와 같은 사람도 오늘날 이 전통에 속한다. 이 전통에 속한 사회 학자들은 독단적인 것이 별로 없고 정치에 관해 본질적 관심을 가지 고 있으며 사회의 하부구조를 무시하지는 아니하나 정치 질서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또한 자유주의자들이다. 아마 나 자신도 현대의 이 학풍의 후예라 해두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제5부 281 둘째 학풍은 콩트에서 시작하여 금세기 초 뒤르켕에서 극에 달했는데 감히 말해 보자면 오늘날의 공식적 전문직을 가진 사회학자들로서 구성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학풍에 속하는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현상에 관련하여 경제적 현상뿐만 아니라 정치현상을 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적 실체의 통일에 강조점을 두고 합의라는 관념을 근본개념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분석과 개념을 구성함으 로써 전체 사회구조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제5부 281 세째 학풍━이것은 강단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무대에서 가장 성공한 학풍인데━은 분명히 마르크시스트 학파이다. 이 학풍은 수백만 인간들이 해석한 그대로, 경제조직과 사회 하부구조의 관점에 서의 사회적 실체에 대한 설명과, 그 추종자들에게 승리와 또한 평화적이건 폭력적이건 이단자들을 제거할 것을 보증하는 진화의 도식을 결합시킨 것이다. 


콩트는 산업사회를 찬양했다. 그리고 아롱이 지적하듯이 콩트든 토크빌이든 마르크스든 모두 다 근대 사회에 관한 해석들을 내놓았다. 특히 콩트와 마르크스는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해석을 내놨다. 그런데 콩트는 산업사회를 찬양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산업사회에 대한 콩트적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에 반항하는 의분심을 겸비하여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 낙관적이다. 이건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극대화되면 그것이 사회주의로 이행해 간다 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먼 미래에 관해서는 비관적이다. 그게 계속 이어져 나가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얻을 건 자유이고 잃을 것은 족쇄 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얘기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정치사회학자들은 근대사회는 민주정 사회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 성취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콩트는 낙관주의에 자족했고, 정치사회학은 신중하고 회의적이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토피아적이어서 그 유토피아가 성취되기 전에 겪게 될 거대한 참화라고 하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제5부 281 사회학의 이러한 세 가지 학풍은 가치체계와 세계사관의 상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근대사회에 관한 해석들이다. 콩트는 근대 사회 즉 그가 산업사회라고 불렀던 것을 거의 절대적으로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화롭고 콩트적이고 또는 말하자면 실증주의적인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치사회학적 학풍의 관점에서 볼 때 근대사회는 민주사회지만 그러나, 토크빌이나 알레비 같은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기뻐 날뛰지도 않고 또는 반대로 분개하지도 않으며 단지 여러 다른 사회들 중의 한 가지 사회━즉 말할 것 없이 독특한 특징을 지닌 사회이나 결코 인간 운명의 궁극적 성취라고는 볼 수 없는 그러한 사회━로 관찰한다. 세째 학풍은 산업사회에 관한 콩트적 열성과 자본주의에 반항하는 의분심을 겸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먼 미래에 관해서는 심히 낙관적이고 가까운 미래에 관해서는 어두운 비관론을 편다. 그것은 장기간의 참화, 계급투쟁, 전쟁들이 계 속된 후에 여러 계급과 모든 인간사회가 서로 최후의 화해를 하게 된다고 예견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콩트 학풍은 낙관주의에 자족하는 경향을 보이고 정치사회학적 학풍은 심중하고 회의적인 색채를 띠며 마르크스학파는 유토피아적이어서 참화를 결국 바람직한 것으로서 그리고 어떻든 필연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고 있다. 


마지막에 나와 있는 얘기가 재미있다. 각각의 학풍은 제 나름대로 사회적 실체를 재구성하며, 사회의 다양성에 대해 고유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다 읽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들에는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이 다 섞여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사회과학이 정교한 과학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도덕적 신념이 있고 그 도덕적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과학적 가설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신념은 가치의 영역인데 그런 것들을 과학적 사실들과 분리해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아롱의 평가이다. 

제5부  282 이 세 학풍들은 저마다 제 나름대로 사회적 실체를 재구성한다. 그것들은 각기 역사상의 여러 사회의 다양성에 관해 고유의 이론을 제공한다. 그리고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 움직이며 사고한다. 나는 이제까지 해볼 만한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도덕적 신념과 과학적 가설들을 분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우리가 이 두 요소를 구분하려고 기도할 때조차도 대개는 우리 자신의 신념의 관점에서 구분하게 된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내일은 베버를 읽음으로써 《사회사상의 흐름》 논의를 마무리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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