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제국의 시대 - 10점
에릭 홉스봄 지음, 김동택 옮김/한길사


파국에 처한 부르주아 세계/김동택 

서문

머리말

1. 혁명 100주년 

2. 경제가 속도를 바꾸다 

3. 제국의 시대 

4. 민주주의의 정치 

5. 세계의 노동자들 

6. 휘날리는 깃발 : 민족들과 민족주의 

7. 누가 누구인가? 부르주아의 불확실성 

8. 신여성 

9. 변화된 예술 

10. 손상된 확실성 : 과학 

11. 이성과 사회 

12. 혁명을 향하여 

13. 평화에서 전쟁으로

글을 마치며




87 100주년이란 19세기 후반의 발명품이다. 미국 형명 100주년(1876)과 프랑스 혁명 100주년(1889) 사이의 어느 시점에서 - 둘은 일상적인 만국바람회에서 축하되었다 - 교육받은 서구세계의 시민들은 세계 최초의 처교 건설과 미국의 독립선언 그리고 바스티유의 폭풍 사이에서 태어난 이 세계가 벌써 한 세기가 지나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1880년대의 세계는 1780년 대의 그것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가?

우선, 1880년 대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지도화되었다. 무시할 만한 예외가 있지만, 탐험이란 더 이상 '발견'이 아니라 남극과 북극처럼 가장 열악하고 비우오적인 물리적 환경을 지배하려는 시도로로 유형화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이제 개인들이나 민족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일종의 경기가 되어버렸다.


192 제국의 승리는 문젯거리와 불확실성을 함께 야기 했다. 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중심부 지배계급들의 자국 국민들에 대한 지배간의 모순이 해결될 수 없는 한, 문제는 분명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중심부 내에서는 민주적 선거 제도에 의한 정치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확대되었고 혹은 확대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식민지 제국 내에서는, 물리적인 탄압과 우월성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의 혼합에 기초한 지배가 도전받지 않고 따라서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한, 귀족주의가 지배했다. 고국에서는 무지하고 열등한 대중들이 점차 정치를 휩쓸었던 반면, 식민지에서는 군인들과 왕국의 크기에 맞먹는 영토에 대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고립된 인간이자 자기규율적인 총독들이 대륙을 지배했다. 여기서 하나의 교훈 - 나체의 '권력에의 의지'라는 의미에서의 교훈 - 이 학습되지 않았겠는가? 


236 정치적 민주주의와 번영하는 자본주의 간의 결혼이 갖는 안정성은 지나간 시대의 환상일 뿐인가? 돌이켜보건대 1880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절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결합이 갖는 취약성과 제한된 전망이었다.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입헌정부의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의 번영하고 잘나가던 경제는 어디까지나 소수에 한정된 것이었다. 민주적 낙관 주의, 즉 역사적 불가피성에 대한 믿음은 역사의 보편적인 진보를 중지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미래에 대한 보편적인 모델이 되지는 못했다.


246 돌이켜보건대, 역사가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현대의 역사가들은 노동자 대중이 엄청나게 켜졌고 그들이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갖고 있지 않으며, 기존의 사회와 정치질서에 짙은 어둠이 드리우게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었다면 어떤 일이 생겨났을까?

실제로 유럽적 규모에서 갑자기, 그리고 대단한 속도로 발생했던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민주적이고 선거에 의한 정치가 허용했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고무되었던 그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믿었던 사람들이 지도했던, 노동 계급에 기반을 둔 대중정당들이 역사무대에 등장했으며 또 놀랄 만한 속도로 성장해갔다. 1875년에 통합되어 이미 선거에 참여할 역량을 갖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라는 예외를 제외한다면, 1880년까지도 이러한 정당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6년이 되면 이들의 존재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한 독일인 학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할 정도였다. 노동자 대중의 존재와 사회주의 정당들의 존재는 이미 하나의 규범이었다. 그것들이 부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276 민족과 신념이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은 다수의 노동계급을 동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프롤레타리아 자체는 영국을 제외하면 아직은 인구의 대다수가 아니었음은 -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들은 신념을 지닌 채 '아직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회주의 정달들이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자마자, 그리고 선동적이고 선전적인 분파와 분산되 지역적 근거지를 바탕으로 한 간부 집단이기를 멈추자 마자, 노동 계급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주의를 한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은 명백했다.



284 민족주의란 단어 자체는 외국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에 대항하여 국가의 깃발을 열렬히 휘두르는, 그리고 그 운동의 특성이 되어버린 자기 국가의 침략적인 확장을 선호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우파 이데올로그 무리들을 설명하기 위해 19세기 말에 최초로 나타났다. 제국의 시대는 또한 [다른 모든 것들 위의 독일]이란 노래가 경쟁하는 다른 노래들을 젖히고 실질적인 독일의 국가가 되어버린 시대였다.


320 부르주아들의 세기에서 역설적인 것운 그들의 생활양식이 뒤늦게야 '부르주아적'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변화가 중심에서가 아닌 주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독특한 부르주아적 생활양식과 방식은 잠간 동안만 유행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그리고 그토록 깊은 향수에 젖어 1914년 이전 시대를 '아름다운 시절'로 돌이켜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326 민주화, 즉 자각적인 노동계급의 증가와 사회적 이동의 동시적인 등장은 '중산층'의 어느 부분에든 속해 있거나 속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동질성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민주주와 노동운동의 증가는 부르주아에 속해 있는 자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 비록 계급이란 것의 존재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하더라도 -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계급들을 일소했다고 주장되었고, 영국에서도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회학의 여론이 점차 커져나갔다. 그렇게 단순화시키기에는 사회구조와 층위가 더무 복잡해졌다는 것이었다.


327 게다가 '중산층' 또는 사회의 '자산계급'에 누가 속하고 속하지 않는가라는 혼란스러운 문제를 야기시킨 전통적 신분질서의 붕괴 그리고 사회적 이동은 이 중간적인 사회영역의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기존의 분류에 익숙해 있는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현재 그 구분이 부르주아와 중간계급으로 세분화 되었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다시 재산소유에 근거한 '유산자 부르주아'와 높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부르주아의 지위에 오른 '교양 있는 부르주아'로 나뉘었고, 중간계급은 그 밑에 소부르주아 또는 프티부르주아를 갖게 되었다. 다른 서유럽의 언어에서는 '대', 상층', '소', '하층'의 중산층 혹은 부르주아라는 매우 유동적이고 불명확한 범주를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그들간의 경계선은 더욱 불분명해졌다. 이런한 것들에 이러한 사람이 속할 수 있다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358 유럽의 중산층은 새롭게 교화된 존재로서 신체적 안락함을 누리는 가운데 불안해했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명을 상실했다. 한때 부르주아들이 그 본보기로서 자부했던 이성, 과학, 교육, 계몽, 자유, 민주주의, 인류의 진보가 가져다주는 이익을 찬양하는, 가장 솔직하고 제한받지 않는 노래는 이제 그 지적 형성이 이전 시대에 속하고 그 시대에는 뒤떨어진 사람들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노동 계급이었으며 부르주아가 아니었다.


371 사태의 본질에 있어 이러한 과정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19세기에 가장 전형적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급의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즉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여성들이 그들이다.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남자들이 새로운 경제에 끌려들어가기 이전까지 농민여성, 소장인, 소상인 그리고 기타 등등의 딸과 부인네들의 상황은 이전과 비슷했다. 사태의 본질에 있어, 여성들의 열등함이라는 과거의 상황과 경제적 종속이라는 새로운 상황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그다지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 현재에나 과거에나 남성은 지배적인 성이(었)고 여성은 이등 인류였다. 물론 어떠한 시민적 권리도 갖지 못했던 한, 여성들은 이등 시민이라고 불릴 수조차도 없었다. 과거나 현재나, 봉급을 받든 받지 못하든, 그들 대부분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374 돌이켜 볼때, 해방을 위한 운동은 충분히 자연스럽게 보였으며 1880년대에 그것이 급속히 확대되었던 것은 언듯 보기에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정치의 민주화와 같이, 여성의 기회와 평등권에 대한 배려는 자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었으며, 또 아무리 불편하고 부적절한 것이었다 해도, 최소한 조상들의 사적인 삶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1870년대 이 후 부르주아 내에서의 변형은 불가피하게 여성들, 특히 부르주아의 딸들에게 더욱 확대된 전망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찰한 바대로 부르주아 사회는, 결혼과 상관없이 잘살 수 있었고 따라서 비가족적인 활동에 대한 욕구를 지녔으며 독립적인 생활수단을 가진 실질적인 여성 유한계급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나아가 부르주아 남성들이 성장함에 따라 여성들에게 더 이상 생산적인 노동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화적인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완고한 사업가들이 가족 내의 여성들에게 그와 같은 문화적 활동을 떠넘기는 경향을 나타냈을 때, 성의 차이는 희석될 수 밖에 없었다.


402 예술의 역사만큼 1870년 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에 부르주아 사회가 거쳐온 위기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없으리라. 이 시기는 창조적인 예술가들과 대중들 모두가 참을성을 잃어버린 시기였다. 전자는 혁신과 실험을 향해, 즉 유토피아주의와 사이비이론을 급선회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 반응했다. 신사인 척하는 못브을 한 속물 유행에 휩싸이지 않는 한, 후자는 그들이 "예술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다"는 식으로 방어적으로 중얼거리거나, 세대를 거쳐 합의된 바에 의해 보증되는 '고전' 작품의 영역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합의의 개념 자체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520 1905년 혁명은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에 의해 획득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최초에는 정부의 후퇴를 가져왔고 나중에는 10월 17일의 헌법과 같은 것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행사햇던 것은 바로 수도에서의 노동자 대중의 파업과 제국의 가장 산업화된 도시에서의 동정적 파업이었지만, 그것을 두고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이라고 한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표현인지도 모른다. 


521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은 당연한 것이며 그래야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중간계급들은 압도적으로 혁명에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1917년과는 달리) 또한 압도적으로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대열에 동원되었다. 시민적, 정치적 자유의 성격을 가진 체제일 때에야 마르크스주어의 계급투쟁의 후기단계가 시잘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까닭에, 자유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 혁명에 다만 서구적 부르주아 정당체계의 성립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아무런 반대없이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의 건설은 직접적인 혁명의 강령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일종의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524 하지만 엄청나게 넓은 사회적 지진대의 지구적인 함몸들 가운데 러시아 혁명이 가장 커다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1905~1906년의 일시적이고 불완적한 혁명조차도 대단히 극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르시아와 터키 혁명을 분명하게 예고했으며 중국혁명을 가속화시켰고 오스트리아 황제로 하여금 보편선거를 도입하도록 자극함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제 많은 정치를 더욱 불안정하게 했고, 종국적으로 그것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 중심적인 국제 체제에서 5대 주춧둘의 하나인 '열강'이었으며, 그리고 자국의 영토만을 염두에 두고 보더라도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고 자원이 가장 풍족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발생한 사회혁명은 세계적인 범위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분명했으며, 실제로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18세기 후반에 발생했던 다양한 혁명들 가운데서도 프랑스 혁명이 유독 국제적으로 가장 커다란 중요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528 1914년 이후 세계전쟁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유럽인들의 삶을 포위한 채 유령처럼 둘러싸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70세 이상의 나이를 먹은 유럽 대륙의 사람들 대부분은, 살아오는 동안에 적어도 두 차례에 걸친 전쟁 가운데 일부를 경험했을 것이다. 또 50세 이상의 사람들 가운데 스웨덴인, 스위스인, 남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하나의 전쟁은 경험했을 것이다. 1945년 이후, 즉 적어도 유럽 전선에서 포화가 중지된 이 후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해외의 어느 지점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또 자신들이 제3차 세계대전, 즉 핵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대부분의 정부들은 세계의 분쟁은 상대방을 무력화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을 함으로써만 확실하게 진압될 수 있다고 국민들을 설득해왔다. 


566 1914년 8월 이후로 우리는 니체가 예언적으로 선언했떤 재앙과도 같은 전쟁가 동요와 폭발의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노스탤지어의 안개 속을 더듬어 돌이켜보건대, 1914년 이전의 시대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보였던, 질서와 평화의 희미한 황금시대 바로 그것이었다. 상상 속의 좋았던 지난날에 대한 그와 같은 과거로의 투사는 20세기의 지나간 수십 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불빛이 꺼지기 이전인 오느날의 역사가들은 그러한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가진 기본적인 전제는, 그리고 이 책을 관통하는 문제는 평화의 시대, 확신에 찬 부르주아 문명의 시대, 성장하는 부의 시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서구 제국들이 그것을 종결시키게 될 전쟁과 혁명과 위기라는 시대의 싹들을 불가피하게 그 자체 내에서 전파해나갔던 그 시대를 어떻게 드러내 보이고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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