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 07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1


인간 불평등 기원론 - 10점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책세상


2017년 11월 4일부터 CBS 라디오 프로그램인 변상욱의 이야기쇼 2부에서 진행되는 "강유원의 책을 읽다보면"을 듣고 정리한다. 변상욱 대기자님과 강유원 선생님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주소: http://www.podbbang.com/ch/11631



20180331_22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 1

오늘부터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는다. 루소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루소는 흔히 프랑스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제공했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이념을 제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제공했다고만 얘기를 하고 있다. 그것도 이번에 한번 보려고 한다.


고등학교에서 서양윤리사상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까지 배우고, 대학에서 기초교양 과정으로는 '프랑스혁명과 루소'를 대개 베운다. 제가 단언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일단 거짓말이고, 루소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루소와 자연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문명이 인간에게 불평등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문명의 반대가 자연이다라고 생각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추론에서 나온 것.


자연으로 돌아가라, 사회계약론, 민주주의, 프랑스혁명, 이렇게 네가지 정도가 루소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데,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도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헌법론이다. 공화국을 창설하는 헌법에 관한 얘기다.  


루소의 저작에서 핵심적인 것은 《인간불평등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출간연도를 따지지 않고, 《학예론》이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이다. 사실 《학예론》은 최초의 논문이기 때문에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루소는 프랑스의 사상가로 간주되고 있지만, 단테처럼, 단테는 피렌체의 시인이기는 하지만 죽기를 피렌체에서 죽지를 못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 출신. 아버지는 시계수리공이었고, 어머니가 목사의 딸이었다. 1700년대의 제네바라고 하면 캘빈주의가 딱 자리잡고 있는 상황. 지금 오늘날의 제네바를 생각하면 안되고, 정말 모범인들의 삶이 아주 억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청교도적인 것도 아니다. 청교도는 간단하게 말하면 자영업자들의 세계다. 캘빈파는 똑같은 기술을 가진 자들의 그냥 기계적 평등과 같은, 사생활이 없는, 이런 환경 속에서 루소가 태어나고 그 아버지 손에서 양육된 사람이니까. 그 당시 프랑스에 와서 이런 생각을 펼치고 하는 것이 굉장히 신선했던 것이다. 루소는 강력한 제도적인 장치와 억압 속에서 자랐다고 하는 것, 이것을 굴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루소의 심성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이다.


지난 주에 멜빌을 얘기했지만 자기가 자기를 돌이켜보면서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굉장히 강한 힘인데, 루소는 그렇게 보인다. 루소의 자서전을 보면 자기를 분리시켜서 대화를 시킨다. 극단적인 자기분열 양상이 드러나 보이는데 루소 개인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면 자서전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두번째 작품이 《인간불평등기원론》이고, 그리고 《사회계약론》이 그 다음에 나오는데 여기에 《에밀》까지가 연결이 되어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불평등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고, 《사회계약론》은 그런 불평등이 없는 사회는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가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책이다. 《에밀》은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은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를 연속체 속에 읽어야 한다. 따로따로 읽으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1부와 2부로 되어있다. 이 책 자체가 디종 아카데미에서 질문을 내놓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왔다. 공모에서 나온 논문이다. 그 질문이라는 것이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의 의해 허용되는가"이다. 여기서 자연법이라고 하면 굉장히 학문적인 용어처럼 느껴지는데 그냥 '원래부터 그런 것인가'라고 이해하면 된다. 자연법이라는 용어가 학문적인 의미에서 쓰인 경우는 굉장히 많은데 적어도 루소에게 있어서는 '원래부터 그런 것인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질문에 일단 불평등의 종류를 열거하고, 어쩔 수 없는 불평등, 키가 크고 작은 것, 이런 것은 자연적인 불평등이다, 그리고 자연법에 의해서 허용되지 않는 불평등이 무엇인지 따져 묻는다. 그런데 키 큰 사람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배풀어 주면 그것은 문명에 의한 제도적 불평등이 되는 것. 그러면 문명, 제도, 세습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평등을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니다. 사실 루소는 자연상태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없는 사람. 


루소가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의 의해 허용되는가"를 들은 다음에, 첫째로 불평등의 종류를 나누고 있는데 이 종류가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이고 있고, 그 다음에 관습적·정치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인간에게 핵심적인 불평등의 원인은 후자, 관습적·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는 소유를 반대했다고 얘기하고, 소유를 반대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연결된다고 하는 게, 업계에서 '루소와 마르크스'의 주제이다. 그런데 그것도 87%정도는 거짓말이다. 소유에 관한 루소의 논변이 단순하지 않다. 


루소가 자연적·신체적 불평등과 관습적·정치적 불평등을 나누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통찰이다. 불평등을 이렇게 나누는 것, 그리고 관습적·정치적 불평등이 생겨나게 된 어떤 원인을 부유함, 재산과 명예욕과 권력을 얘기하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다음 주부터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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