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2 제13강(1) 구약 성서 〈욥기〉

 

2023.07.04 문학 고전 강의 — 32 제13강(1)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3강(1) 
프롤로그
1.1-5: 욥의 경건함과 풍족함[땅]
1.6-12: 야훼와 사탄의 첫째 대화[하늘]
1.13-22: 욥에게 일어난 재난[땅]
2.1-7a: 야훼와 사탄의 둘째 대화[하늘]
2.7b-10: 욥(자신)의 고난[땅]
2.11-13: 프롤로그와 이후 대화의 연결

 

오늘은 《문학 고전 강의》 제13강을 읽는다. 13강은 〈욥기〉 1장과 2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욥기〉 1장과 2장은 프롤로그이다. 1장의 1절부터 5절까지가 욥의 경건함과 풍족함, 땅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다음에 1장 6절에서 12절까지가 야훼와 사탄의 첫째 대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다음에 1장 13절에서 22절까지가 욥에게 일어난 재난, 땅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다음에 2장 1절에서 7a절이 야훼와 사탄의 둘째 대화, 그 다음 2장 7b절에서 10절까지가 욥 자신이 겪은 고난, 욥에게 일어난 재난이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욥을 둘러싼 환경들인 자녀들에게 일어난 일이고, 하나는 욥 자신이 겪게 되는 고난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2장 11절에서 13절까지가 프롤로그와 이웃 대화를 연결하는 부분이다. 별 건 아닌 것 같은데 한번 보겠다. 욥기의 프롤로그는 그냥 읽으면 이런 얘기가 있구나 저런 얘기가 있구나 그런 느낌만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일종의 점층법으로 되어 있다. 점층법으로 되어 있으니까 뻔한 거 아니냐, 그런 형식적인 완결성이 갖춰져 있는 텍스트들을 보고 그걸 보고 본받는 것이 사실은 글을 잘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창의적으로 하려고 하기보다는 아주 오랫동안 텍스트의 형식으로 고정되어 왔던 것을 충실히 받아들여서 자꾸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제13강은 제가 붙여놓은 제목이 인과불명의 고난에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 욥으로 되어있다.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좁은 의미로는 말로 신세한탄 하지 않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런 것들이겠다. 조금 범위를 넓혀보면 말 그대로 말 조심하는 것이겠다. 

제12강 131
1장의 1~5절: 욥의 경건함과 풍족함 [땅]
1장 6~12절: 야훼와 사탄의 첫째 대화 [하늘]
1장 13~22절: 욥에게 일어난 재난 [땅]
2장 1~7a절: 야훼와 사탄의 둘째 대화 [하늘]
 2장 7b~10절: 욥(자신)의 고난 [땅]
2장 11~13절: 프롤로그와 이웃 대화를 연결

 

〈욥기〉 1장 13절에서 17절까지가 이제 세 가지 재난이 욥에게 닥친다. 고난보다 재난. 첫째가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었는데 스바 사람들이 달려들어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 그것을 약탈해 간 사람들이 스바 사람들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양떼와 일꾼들을 모두 살라버렸습니다." 재앙이 하나는 스바 사람인데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셋째는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달려들어 낙타떼를 모두 약탈해 가고 일꾼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스바 사람, 갈데아 사람이 왔다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재앙이 닥쳤다는 것, 그리고 소, 나귀, 양, 낙타, 일꾼 이제 뒤로 갈수록 중요한 것들을 약탈당한 것이다.  

〈욥기〉 1.13-17 하루는 욥의 아들과 딸들이 맏형의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 한 심부름꾼이 욥에게 뛰어와서 고하였다.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었는데 /  스바 사람들이 달려들어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꾼들을 모조리 칼로 쳐죽였는데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양떼와 일꾼들을 모두 살라버렸습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는 것이었다. "갈대아 사람 세 무리가 달려들어 낙타떼를 모두 약탈해 가고 일꾼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단절이고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욥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를 지금 읽고 있는데, 〈욥기〉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면 〈욥기〉를 만든 이들은, 편집한 이들은 이 정신적인 것, 이 텍스트로서 우리에게 살아있다.  저는 이것도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욥기〉의 저자가 되었건 에디터가 되었건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욥기〉라고 하는 이 텍스트로서 텍스트를 매개로 해서 우리에게 살아있는 것이다. 

여기 이제 1장 13절에서 17절까지 하인들이, 심부름꾼이 와서 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것이 맨 끝에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아주 급박함을 표현할 때,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러니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런 말들이 이제 급박함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표현을 할 때 예를 들어서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양떼와 일꾼들을 모두 살라버렸습니다.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되풀이해서 똑같은 말을 하면 읽는 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급박함을 느끼게 된다. 굳이 여기서 급박하게 말하였다 라고 형용사 또는 부사어를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표현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을 익히는 것이 〈욥기〉를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오래된 텍스트들을 읽을 때 아주 신기하고도 산뜻한 또는 요즘에 신박하다고 그러는데, 그런 표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그냥 있는 것들, 기왕에 있는 표현들을 가져다가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급박함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느릿느릿함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렇겠다. 일단 이제 1장 18절 19절은 "주인님의 자녀분들이 맏형님의 집에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광야에서 모진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퉁이를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다 죽었다는 얘기이다. 이게 이제 욥에게 닥친 재난들인데 그제서야 욥은, "그제야 욥은 일어나", 그전까지는 가만히 있었다는 것인데 보통 사람은 아니다. 1장 20절에 " 그제야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입을 열었다." 

〈욥기〉 1.18-22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였다. "주인님의 자녀분들이 맏형님의 집에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 광야에서 모진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퉁이를 쳐서 무너뜨렸습니다. 젊은이들은 모두 깔려 죽었고 저만 가까스로 살아 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 그제야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 입을 열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느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순서가 이렇다. 첫째는 침묵이고 그 다음에는 일어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다음에 겉옷을 찢는다. 그리고 다음에는 머리를 깎았다. "그제야 욥은 일어나", 침묵하고 있다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우리가 이런 걸 읽을 때는 하나하나 쪼개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제야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오뒷세이아》에서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본 다음에 가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뭔가 행위하는 것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그런 것처럼 이 표현도 그렇게 돼 있다.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고 땅에 엎드려, 행위의 강도가 세지는 것이다. 땅에 엎드린다는 것이 왜 세지는 것인가,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이렇게 절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죄를 짓지 않았고 하느님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비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건 이게 참 어려운 일이다. 비난하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서도 원망을 가지 않고, 자녀가 죽기 전이라도 무슨 재산이 잃어버리고 그러면 바로 신정론 튀어나온다. 하느님의 올바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신정론이 튀어나올 텐데 욥은 그러지 않는다. 자기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에게 굉장히 기쁜 일이 있었을 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신나는 일이 생겼을 때.  

 

가령 이제 심부름꾼이 와서 욥에게 고하였다. 밭을 갈던 소와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던 나귀가 갑자기 100마리로 불어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라든가. 지금 재앙이 강력하게 나왔는데 기쁨에 넘치는 일들이 이렇게 왔다고 해보겠다. 그럼 어떻겠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제야 일어나 허허 웃고 그 다음에 박장대소하면서 즐거워하면서 좀 속된 말로 널부러져서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겠는가. 재앙이 닥쳤을 때는 참고 견디는 것은 있다. 그런데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참고 견디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그래서 욥은 이 모든 기쁜 일을 당하여도 하느님께 잘난 척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 이런 텍스트를 우리가 한번 구상해 볼 수 있겠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걸 보았다. 무슨 책을 번역했다든가 또는 무슨 책을 썼다든가 과연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뽐내는지 그것을 본다. 그러면서 그래 잘했는데 그렇게 뽐낼 일인가, 재앙이 닥치면 슬퍼하지 말고 기쁨이 닥쳐왔을 때도 그렇게 뽐내지 않고 그냥 평탄하게 고요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겉옷을 찢지도 않고 머리를 깎지도 않고 땅에 엎드리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것 그게 정말 어렵다. 재앙이 닥쳤을 때도 그러하고 기쁜 일이 닥쳤을 때도 그렇다. 이게 조금만 지나고 나면 그렇게까지 잘난 척 할 일이었는가 그렇게까지 기쁜 일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금방 든다.   

 

고난을 당하고 재난을 당했을 때도 신을 원망하지 않듯이 기쁨이 닥쳐왔을 때도 신에게 과도하게 감사하지 않는 것, 고요하고 잔잔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경건함이 아닐까. 오늘은 〈욥기〉 1장 욥에게 닥친 재난과 그에 대한 욥의 반응 그런 것들을 한번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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