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29 제11강(3) 구약 성서 〈욥기〉

 

2023.06.25 문학 고전 강의 — 29 제11강(3)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1강(3) 

❧ 대화 부분의 구조
3-11장: 세 친구들과의 첫째 대화
12-20장: 세 친구들과의 둘째 대화
21-31장: 세 친구들과의 셋째 대화
32-37장: 엘리후의 일방적인 연설
38-42장 6절: 야훼와 욥의 대화

❧ “일종의 다성 음악 작품”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욥기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욥기라는 본문의 위력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욥기 안에 다양한 목소리는 서로 뒤얽히면서 효과를 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욥기는 일종의 다성 음악 작품, 솜씨 좋은 단일 저자의 저작으로 볼 수도 있다.”(참조. Carol Newsom, The Book of Job: A Contest of Moral Imaginations)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이 명백하게 억울하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그 탓을 자기 스스로에게 돌리는 일이라는 건 거의 없다.  남탓을 한다.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에서 욥의 억울함을, 누가 봐도 억울하다. 그래서 이 〈욥기〉를 읽을 때는 이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을 해보면 내가 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금 당하는 억울하다고 여기는 사태의 원인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있게 된다. 그런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있게 되면 남탓을 하기에는 조금 걱정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고민의 연쇄를 계속하다 보면 그것은 매저키스트적인 생각으로까지 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게 없다 그렇게 되면 이제 가령 신을 믿는 자라면 또는 인격신까지는 아니어도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라고 하는 세상 탓을 하게 된다. 그런 문제들을 이제 기독교에서는 신정론이라고 부른다. 신의 올바름, 신이 도대체 올바름을 이 세계에서 행하고 있는가. 신은 왜 올바르게 사는 이에게 그 올바름의 대가를 주지 않고 고통을 주는가를 물어보는 게 그런 것이다.  살다 보면 이제 맺힌 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저라고 해서 맺힌 게 아주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러다 보니 〈욥기〉라고 하는 이 텍스트 자체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문학 고전 강의」를 강의를 할 때 꼭 〈욥기〉를 넣어야겠다.  그리고 공부를 할 때 읽은 책 중에 하나가 바로 《The Book of Job:  A Biography》으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나온 책이다. 이것은 great religious book 시리즈로 나오는 것이다. 2013년에 원서가 나왔는데 한국어판은 2021년에 비아 출판사에서 《욥기와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나왔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마크 래리 모어인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그러니까 라이프니치의 신정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까 이제 〈욥기〉에 관한 책을 쓰기에는 아주 적절한 그런 전문 연구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욥기〉 부분을 읽으면서 이 《욥기와 만나다》에 있는 내용들을 좀 곁들여가면서 함께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문학 고전 강의》에는 없는 얘기, 또 《욥기와 만나다》에 있는 얘기, 그런 것들을 할 텐데 《욥기와 만나다》 서론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다. "욥을 싫어하는 독자가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 독자는 그의 편에 서려 한다. 어떤 독자들은 욥의 하느님에게 저항감을 느낀다. " 그렇다. 옆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하느님이 이렇게 옆에게 벌을 주는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욥의 신보다 더 잘 처신할 수 있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신이 못마땅하니까 내가 신이라면 이렇게 안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와 만났을 때 우리의 자리는 욥의 친구들이 서 있는 자리, 어쩌면 뒤늦게 도착한 엘리후가 선 자리다." 이제 우리가 〈욥기〉를 읽다 보면 엘리후라는 사람의 위치가 참 수수께끼와 같은 그런 자리이다. 그런데 이제 많은 경우에 어쨌든 이 〈욥기〉에 대한 마크 래리모어의 책은 그동안 〈욥기〉라는 텍스트가 만들어진 이후에 〈욥기〉가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가 그런 얘기를 계속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욥기〉에 등장하는 친구들의 입장은 어떠한가를 설명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좀 하면서 읽어보면 굉장히 괜찮다.  

《욥기와 만나다》 서론 31 욥을 싫어하는 독자가 있기도 하지만 대다수 독자는 그의 편에 서려 한다. 어떤 독자들은 욥의 하느님에게 저항감을 느낀다. 그리고 대다수 독자는 "가까운 친구가 적보다 더 원수일 수 있다"는 격언의 원형과도 같은 욥의 친구들을 경멸한다. 우리는 우리가 욥의 신보다 더 잘 처신할 수 있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그러나 욥기와 만났을 때 우리의 자리는 욥의 친구들이 서 있는 자리, 어쩌면 뒤늦게 도착한 엘리후가 선 자리다. 


전에 어떤 분이 《모비딕》을 잘 읽어보려면 성서를 좀 읽어봐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고 저에게 물었다. 그래서 《욥기와 만나다》를 한번 참조해 보라고 얘기했다. 저는 에이해브가 이른바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에서 나온 텍스트들의 주인공 중에 가장 속된 말로 꽂힌 사람이다.  에이해브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본받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숨은 신을 찾아서》에서도 에이해브를 찬양하고 있다.  저는 〈욥기〉에 등장하는 욥처럼 하는 것보다는 에이해브처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제 생각에는 에이해브가 욥과 정반대되는 자리에 서 있는, 그리고 욥의 친구들처럼 말로만 뭐라고 떠든 게 아니라 그냥 신을 들이받아버린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해서 목숨 걸고 자신을 관철해버린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욥기〉와 《모비딕》 사이에 어떤 굉장히 강력한 대결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얘기를 차차 해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 〈욥기〉를 읽을 때 구조를 살펴보겠다. 1장, 2장이 프롤로그이고 그 다음에 3장부터 42장 6절까지가 본문이다. 그 다음에 42장 7절부터 끝까지가 에필로그이다. 그래서 이제 프롤로그는 산문으로 되어 있고 본문은 대화체 운문이고 그 다음에 다시 에필로그는 산문이다. 다시 말해서 대화체 운문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산문이 이렇게 감싸고 있는 그런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마크 래리모어 그 부분을 지적한다.  "욥기는 분명 성서에 속한 어떤 책보다도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산문으로 시작해서 산문으로 끝나지만, 욥과 친구들과 하느님의 연설은 운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되어 있다. 중간이 운문으로 되어 있고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다.   

《욥기와 만나다》 서론 12 욥기는 분명 성서에 속한 어떤 책보다도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산문으로 시작해서 산문으로 끝나지만, 욥과 친구들과 하느님의 연설은 운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음에 본문이 이제 대화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이 대화 부분은 제3장에서 11절까지가 세 명의 친구들과의 대화, 엘리바르, 빌닷, 소바르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세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3장부터 31장까지 세 친구들과의 대화가 끝났는데, 갑자기 31장 40절에서 "이로써 욥의 말이 끝난다"라고 했는데, 이제 엘리후가 등장한다. 엘리후는 문제적 인간이다. 엘리후라는 사람을 주제로 해서 뭔가 얘기를 해볼 수도 있을 만큼 이 사람은 문제적 인간이다. 교양인 출판사에서 문제적 인간이라는 시리즈 책을 내는데, 시리즈 명은 굉장히 좋은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가 문제적 인간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래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궁리를 많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때가 있다. 어쨌든 32장에서 37장까지가 엘리오의 일방적인 연설이다. 그리고 이제 38장부터 42장 6절까지가 야훼와 욥의 대화이다. 중간에 이 대화 부분, 엘리후의 일방적인 연설부분만 빼면 대화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마크 래리모어도 지적하듯이 이게 완전히 매끄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이 부분들이 그러니까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의 이야기처럼 읽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게 구조적으로 이게 들어맞지 않는다 라고 하는 상황에서 이걸 맞춰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크 래리모어는 이렇게 지적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욥기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욥기라는 본문의 위력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욥기 안에 다양한 목소리는 서로 뒤얽히면서 효과를 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욥기는 일종의 다성 음악 작품, 솜씨 좋은 단일 저자의 저작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해석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내놓은 사람은  Carol Newsom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각주에 보니까 《The Book of Job: A Contest of Moral Imaginations》, 도덕적 구속력의 대결, 그런 책이다. 이렇게까지 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이 안에 다양한 목소리를 일부러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효과를 낸다.  그렇게 보면 일종의 다성음악 작품이다.  polyphony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부러 다성음악 작품처럼 만들었다는 것, 그렇게 보면 굉장히 솜씨 좋은 단일 저자의 저작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과연 그러할까 라는 좀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그렇게까지 볼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제11강 130 본문인 대화 부분의 상세한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3-11장: 세 친구들과의 첫째 대화
12-20장: 세 친구들과의 둘째 대화
21-31장: 세 친구들과의 셋째 대화
32-37장: 엘리후의 일방적인 연설
38-42장 6절: 야훼와 욥의 대화

욥은 자신의 친구들인 엘리바르, 빌닷, 소바르 세 명과 세 번에 걸쳐서 대화를 합니다. 모든 경우에 세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의 대화가 주로 진행됩니다.

《욥기와 만나다》 서론 17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욥기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기 때문에 욥기라는 본문의 위력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욥기 안에 다양한 목소리는 서로 뒤얽히면서 효과를 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욥기는 일종의 다성 음악 작품, 솜씨 좋은 단일 저자의 저작으로 볼 수도 있다. 


그 다음에 구조 얘기가 나왔으니까 어쨌든 〈욥기〉는 어떤 양식을 가지고 있는가 이렇게 참 말하기가 어렵다, 《문학 고전 강의》에서는 그런 얘기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보면 산문으로 시작하고 산문으로 끝나는데 중간에 대화가 있다. 플라톤의 이제 대화편들은 대게 다 그런데 특히 《향연》이 그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양식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양식비평style criticism, 즉 〈욥기〉의 양식이 어떠한가. 내용은 차치하고, 〈욥기〉의 내용은 욥의 인내다, 경건함이다, 저는 경건함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것은 일단 좀 논외로 해두고, 양식이 어떤가를 찾아내면 〈욥기〉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수수께기가 또는 그것이 내용에 끼치는 영향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그런 얘기도 있다.  그래서 마크 래리모어는 그것도 서론에서 간단하게 거론을 한다. "근대 이전의 여러 주석자는 욥기의 양식을 식별해내면 욥기라는 수수께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욥기는 서사시epic인가? 비극tragedy인가?  행복한 결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희극comedy처럼 보이기도 한다. 욥기는 그 안에 여러 양식을 품고 있다." 여러 양식을 품고 있다. 그렇다. 여러 양식이 있다. "하지만 전체 작품으로서 욥기는 그 어떤 양식에도 들어가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결론이 안 났다. 어떠한 양식에도 들어가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이게 이제 〈욥기〉가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양식이 이제 안 나와버리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형식적인 것부터 분별을 해내야 되는데 그게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문학 고전 강의》 130페이지에 보면 본문인 대화 부분의 상세한 구조가 이러한데 이것도 그렇게 일관성 있는 그 형식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는 건 아니다 라는 걸 꼭 고려해야 되겠다.  

《욥기와 만나다》 서론 23 근대 이전의 여러 주석자는 욥기의 양식을 식별해내면 욥기라는 수수께기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욥기는 서사시epic인가? 비극tragedy인가?  행복한 결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희극comedy처럼 보이기도 한다. 욥기는 그 안에 여러 양식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전체 작품으로서 욥기는 그 어떤 양식에도 들어가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다음에 131페이지를 보면 프롤그인 1장과 2장을 보면 굉장히 잘 구조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1장부터 2장 13절까지를 보면 1장 1절에서 5절까지는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1장 6절에서 12절은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땅, 하늘, 땅, 하늘, 땅 이렇게 해서 땅이 세 번 나온다. 그 다음에 2장 11절에서 13절까지가 프롤로그와 그 이후 대화를 연결하는 부분, 이렇게 얘기가 된다. 이런 것들을 이제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가지고 얘기를 한다고 하는 것 이런 게 굉장히 중요한 점이다. 사건이 일어났다,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장소가 말하자면 그 내용을, 어떤 장소에서 일어났는가라고 하는 것이 그 내용을 규정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욥기〉는 일단 산문이 앞뒤로 놓여 있는 중간 본문은 대화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 양식이 규정되느냐,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마크 래리모어의 지적처럼 서사시도 비극도 희극도 아닌 어떤 양식에도 들어가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그런데 아주 좀 많이 나아간 해석을 따라가 보면 어떻게 보면 바로 그러한 양식의 문제야말로 〈욥기〉가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다.  즉 일종의 다성 음악 작품, 솜씨 좋은 단일 저자의 저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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