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28 제11강(2) 구약 성서 〈욥기〉

 

2023.06.20 문학 고전 강의 — 28 제11강(2)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1강(2)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에서 등장한 텍스트들
잠언: “범세계적인 지혜전승과 전통적인 경건을 융합”
욥기, 전도서: “보편적이고 비평적인 경향”
참고. 마르틴 헹엘, ⟪유대교와 헬레니즘⟫ 
‘지혜문학’(Wisdom Literature)을 구성하는 텍스트들이 잠언, 욥기, 전도서에 외경外經에 속하는 집회서와 솔로몬의 지혜서를 묶어서 ‘사상서’思想書

 

〈욥기〉를 보겠다. 중요한 게 있는데 우선 이런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텍스트들을 강의를 한다는 게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요즘에 제가 목요일에 하는 고급 철학 연습 시간에는 구약성서에 있는 탈출기exodus를 강의하는데 그 시간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일단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려면 그 신학대학이 원하는 것을 맞춰서 한다. 자기네 교리라고 할 것도 없는, 아주 하찮은 인간들의 잡생각에 불과한 것에 어긋나면 바로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에서 열까지 검열을 할 테고 학문적으로 exodus를 읽어내는 것, 그러려면 유대인 아닌 사람은 애초에 읽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가. 당사자가 아니면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무슨 문학은 쓴 사람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되어버리지 않겠나. 그러면 이제 비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지금 제가 발터 옌스와 한스 큉 신부님이 쓴 《문학과 종교》를 읽어가는 강의를 하려고 독일어판과 대조하면서 하나 하나씩 이렇게 살펴보는데 제가 모르는 텍스트들이 있어서 고통스럽다. 읽는 게 고통스러운데 언젠가 그걸 한번 꼼꼼하게 읽는 것을 해보려고 한다.  근데 그런 종류의 종교 서적들 강의하는 것이 일단 어렵고, 그 다음에 종교라고 하는 것이 미신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에서 열까지 철두철미하게 과학적으로 사는가 과학도 한때는 마술이었다고 해보면 가당치도 않은 황당한 변명들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제가 이 《문학 고전 강의》에 〈욥기〉를 넣어둔 것이, 저는 누가 검열을 하는 게 아니니까 넣었고, 혹시라도 이것을 읽는 독자분이 이런 거는 종교 서적 아니야 종교 서적이 왜 문학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미리 얘기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예 읽을 필요가 없다. 저는 그런 분들까지 설득해서 이걸 읽어야 한다고 말할 의도도 없고 말할 설득해낼 자신도 없다. 

 

〈욥기〉는 일단 내용으로 보면 인간의 파토스, 고난을 다룬 텍스트인데 인간의 고난을 다루지 않은 텍스트라는 세상이 없다. 그 다음에 이건 과연 무엇일까, 우주론적인 논의들이 배경에 있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epic에 해당한다. 세상의 모든 문학은 아주 단순하게 보면 서사시와 로만, 루카치인데 책 제목이 《소설의 이론》 Die Theorie Des Romans이다. 로만이라는 게 로만 가톨릭 할 때 로마적인이라는 말이다. 그 단어가 낭만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그것이 왜 그렇게 쓰이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헬라스의 고전적 세계에 비하면 로마는 그런 형식적인 완결성 서사시를 가지지 못한 시대이기 때문에 로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 로마 고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고, 저는 로마 시대에 나온 텍스트는 고전 클래시컬 텍스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비디우스의 서사시라든가 이런 것은 안 가르친다. 한 번 읽고 말았다. 그걸 연구해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걸 연구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 그 다음에 키케로 이런 것은 고전 텍스트 아니니까 그냥 쓱 지나가면 그만이다. 서구의 고전은 헬라스 시대에 나온 서사시 그 다음에 단테, 단테는 헬라스 시대에 나온 게 아니지만 서사시니까 셰익스피어도 epic이다. 드라마지만 5막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epic에 속한다. 〈욥기〉도 마찬가지이다. 로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non epic, epic이 아닌 것, 이것을 로만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소설이라는 말로도 번역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게 낭만입니다. 낭만은 형식이 없는 게 낭만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 문학전집에 들어있는 건 그건 다 로만들이다. 단테 《신곡》도 들어가 있긴 한데 그걸 같이 분류해서 넣기는 어렵다.  크게 보면 에픽과 로만으로 나눌 수 있고 그걸 소설小說이라고 번역을 한 건 참 잘한 것 같다.  작을 소 小이다. 불량이 적다 그럴 때는 적을 소자가 아니라 작을 소자인데, 소설, 작은 이야기이다. 작은 이야기니까 소설이고, 작은 이야기하는데 형식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자잘한 이야기이다.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안 궁금한, 일기하고 다를 바 없는, 사소설이라고 그러면 더 작은 얘기이다.  남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인데 내 얘기 중에서도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떼내어서 얘기한다, 그 에피소드를 구조적으로 서로 구조화시켜서 엮지 못한다 그러면 소설인 것이다. 박경리의 장편 대하소설 《토지》는 아무리 길어도 그건 소설이다. 대하 소설이라고 하니까 서사시를 시도한 것 같지만 소설이다. 어쨌든 에픽과 로만 이 두 가지가 있는데 로만는 잘 모르겠고 에픽에 대해서는 구조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다.  로만은 공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김경식 박사가 번역한 《소설의 이론》을 한번 읽어보면 근대적 서사 양식으로서의 소설이라고 하는 게 어느 지점에 들어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근대적 서사 양식이라고 하면 말은 굉장히 멋있는데, 근대라고 하는 시대 자체가 파편화된 시대라는 걸 전제하고 그렇게 파편화된 시대에 자잘한 얘기들을 어떻게 하는가, 그런 것에 대해서 탐색해 보는 것 그게 이제 《소설의 이론》의 핵심이다.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는 125페이지를 보면 "구약 성서에 속하는 〈욥기〉는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에서 등장한 텍스트"라고 했다. 이게 아주 먼 옛날에 쓰여진 게 아니라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는 말은 드로이젠Droysen이 만든 말인데 저는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용어로는 널리 학문적으로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시대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는 건 그냥 멀티컬처럴 하이브리드 에이지이다. 다문화적인 혼종의 시대, 이게 바로 헬레니즘인데 다문화적 혼종이라고 하는 말, 멀티컬처럴 하이브리드 뭐 이렇게 얘기하면 복잡하니까 그냥 헬레니즘이라고 말을 하는데, 헬레니즘이라는 말이 이 시대의 특징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단어는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아주 먼 옛날에 등장한 텍스트가 아니다. 그래서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시대의 유대교가 어떠했는가, 이 시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  〈욥기〉가 이해가 된다.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를 시대 배경을 떼어놓고 이해를 하려고 하면 그냥 고만고만한 고통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시대에 놓고 보면 아 이 시대에 유대교가 어떤 정신적 삶을 추구했는가 이것을 알 수 있다. 마르틴 헹엘의 《유대교와 헬레니즘》, 유대교와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굉장히 많다. 《초기 유대교와 예수 운동》 그 다음에 제임스 던의 3부작인 《형성기 기독교의 통일성과 다양성》, 《초기 교회의 기원》,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이 있다.  

제11강 125 구약 성서에 속하는 〈욥기〉는 헬레니즘 시대 유대교에서 등장한 텍스트이므로 이를 읽으려면 그 시대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르틴 헹엘의 이 책은 나온 지 오래됐으니까 버려도 된다 그건 아니다.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 다양한 정신적 삶을 보여주는 문학들을 검토를 하고 있는데 "범세계적인 지혜전승과 전통적인 경건을 융합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태도는 대략 〈잠언〉 1~9장에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보면 범세계적인 지혜전승과 전통적인 경건, 전통적인 경건이라고 하는 건 유대인들의 전통이겠다.  그것과 범세계적인 지혜 전승이 어떻게 결합이 되느냐 융합되느냐 이 시대가 그러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헬레니즘이라고 불리는 시대는 다문화의 융합 시대에 해당하니까 이 지중해 세계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여기저기서 아주 많은 지혜를 담은 전승들이 흘러 들어왔을 것이고, 그것을 유대인들이 전통적인 경건과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그런 텍스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는 그냥 구약성서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만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시대적인 배경을 떼어놓고 보아도 상당한 정도로 호소력이 있는, 그 다음에 이제 〈잠언〉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고, “〈욥기〉와 〈전도서〉에서 보편적이고 비평적인 경향을 갖는 두 번째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마르틴 헹엘에 따르면 첫 번째 흐름이 범세계적인 지혜 전승과 전통적인 경건인데 그것이 〈잠언〉이라면, 두 번째로는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보편적이고 비평적 경향을 갖는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이렇게 둘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잠언〉에서는 전통적인 경건이 융합돼 있으니까 신에 대한 경건함이 들어가 있다.  신에 대한 경건함이 들어가 있는데 〈욥기〉와 〈전도서〉에서 "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도 분명해 보이지 않고, 인간과 신의 관계도 유대교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욥기〉 마지막에 가면 그래도 결국 신에게 귀의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유대교 전통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욥기〉만을 해설을 했는데 기회가 되며, 보편적이고 비평적 경향을 갖는 두 번째 흐름이 〈전도서〉에 들어가 있으니까, 과연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잠언〉과 그러니까 경건한 텍스트 〈잠언〉, 그 다음에 비평적, 비평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비판적이다, 신의 세계 지배에 대한 비판의 의식이 있다는 것, 그래서 경건한 〈잠언〉과 비판적 〈전도서〉 이렇게 대조를 해서 읽어보면 〈욥기〉, 〈잠언〉, 〈전도서〉 이렇게 세 개의 텍스트, 이 세 개가 종합 세트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제11강 125 헹엘에 따르면 이 시기 유대인 민족공동체 내부에는 다양한 정신적 삶을 보여주는 문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가장 강력했던 그룹은 범세계적인 지혜전승과 전통적인 경건을 융합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태도는 대략 〈잠언〉 1~9장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11강 125 "〈욥기〉와 〈전도서〉에서 보편적이고 비평적인 경향을 갖는 두 번째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들 텍스트에서는 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도 분명해 보이지 않고, 인간과 신의 관계도 유대교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서〉에 비판적 경향이 있다 라고 말은 하는데 〈전도서〉 주석서 이런 걸 보면 그냥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그냥 하느님 하느님하는 게 많아서 별로 재미가 없다. 어쨌든 〈잠언〉, 〈욥기〉, 〈전도서〉가 이런 맥락 속에서 등장했다 라는 것, 그 다음에 그런 점에서 〈잠언〉은 좀 모르겠는데 〈욥기〉와 〈전도서〉는 기독교도가 아니어도 유대교도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욥기〉는 일단 지혜 문학Wisdom Literature이라고 불리는 영역에 속하는 문헌이다. 정식 경전에 들어간 건 〈잠언〉, 〈욥기〉, 〈전도서〉이고, 외경으로 분류되는 〈집회서〉, 〈솔로몬의 지혜서〉도 있다. 이렇게 5개를 묶어서 사상서이다. 그러니까 〈잠언〉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경건함인데 경건함이라는 게 엄청난 얘기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는 얘기, 도덕적 인과응보에 아주 충실하게 서술된 게 〈잠언〉이고 〈욥기〉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렇다 해도 신의 권능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태도가 있는데 〈전도서〉는 아니다. 이 〈전도서〉에 관한 것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러니까 128페이지에 제가 적어둔 것처럼 〈잠언〉는 〈잠언〉과 〈전도서〉의 중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읽어볼 때 이 세 개 텍스트 중에 가장 사실 흥미가 당기는 것은 〈전도서〉이다. 127페이지에 전도서 1장 1절부터 8절까지를 인용해 놓았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신 앞에서 이런 얘기하면 되겠는가. 세상만사가 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러니 〈전도서〉는 신이 정해 놓은 섭리를 의심하기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잠언〉, 〈욥기〉, 〈전도서〉 이 순서로 읽으면 이제 나중에는 완전히 신이 외면당하는 것이다.  〈전도서〉부터 〈욥기〉, 〈잠언〉 이렇게 가면 신을 향해 가는 것이다.   

〈전도서〉 1.1-8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 떴다 지는 해는 다시 떴던 곳으로 숨가삐 가고 / 남쪽으로 불어갔다 북쪽으로 돌아오는 바람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 강물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 세상만사 속절없어 무엇이라 말할 길 없구나. 아무리 보아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수가 없고 아무리 들어도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수가 없다.  

제11강 127 〈전도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정해 놓은 섭리를 의심하기도 하고, 자연적 인과관계가 작동하는 세계에 대해 인간이 알 수 있을지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오늘 〈잠언〉, 〈욥기〉, 〈전도서〉 이 세 개의 텍스트가 어떤 것들인지 그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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