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1 제12강(2) 구약 성서 〈욥기〉

 

2023.06.27 문학 고전 강의 — 31 제12강(2)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2강(2)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욥기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 인간의 선과 이해의 한계, 대화와 독백, 침묵 속에서 언어의 한계 등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욥기처럼 그 모습과 해석의 틀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본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마크 래리모어, ⟪욥기와 만나다⟫, p. 276)

 

지난번에 《문학고전 강의》 12강 경건한 사람, 욥을 이야기를 했었다. 경건한 사람, 욥을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욥이 과연 경건한가, 아닌 점도 굉장히 많다고 말씀을 드렸다.  욥이 하느님에게 반항하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정말 도대체 욥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에 대해서 정말 수없이 많은 성서 학자들이 또는 주석가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뭔가 정해놓지 않으면 그 다음에 13강 인과불명의 고난에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는 욥, 13, 14, 15강을 들어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욥기〉라고 하는 텍스트 안에는 신정론, 신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신의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계에 관철되고 있는가, 그것에 관한 논의들이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벌이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신정론의 관점을 가지고, 선한가 악한가, 선과 악의 관점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면 답을 낼 수가 없을리라고 저는 생각한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제가 죽을 때까지 이 견해를 견지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견해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범주는 아주 지극히는 아닌데 상당한 정도로 상황 의존적이고 상황 의존적이기 때문에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그런 정신에 의해서 훼손되기 쉽고 그에 따라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 또는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떤 확률적으로 또는 개연적으로 규정할 수는 있을지 언정 절대선, 절대악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지금은 이 사람의 이론이 논박되어서 거의 인용되고 있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굉장한 통찰력이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안토니오 다마지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쓴 책의 원문이 feeling & knowing이다. 느낌과 앎(한국어판 제목 《느끼고 아는 존재》). 이 책이 2021년에 출간되었는데 출간되자마자 2021년에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느끼고 아는 존재》라고 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도대체 뭘 안다, 느낀다, 느낀다고 하는 것에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뇌의 전기화학적 현상이 있는데 그건 분명히 어떤 물질적인 현상인데 그것이 현상적 실체인 느낌을 만들어내고 그리고 그렇게 느낌이 된 것들 것이 기억된 이미지가 되어서 그 기억된 이미지들의 공통 부분이 개념이 되고, 그 다음에 그 이미지가 부호로 전환되어서 언어가 출연하고, 그렇게 해서 언어로 표상되면 이제 그것이 정보가 되니까 인출하기가, 끄집어내기가 쉬우니까, 그것을 의식이라고 그러고, 이런 느낌과 의식의 작용으로 통합된 정보, 그게 바로 지식이고 앎인데, 그 과정에는 선과 악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의식과 앎이라고 하는 것이 있은 다음에 그 다음에 윤리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나쁜 것은 그냥 자기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이런 생각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책을 그 전에는 한 번 읽고 그냥 이렇게 내버려 두었는데 요즘에 다시 생각을 해 보고 있다. 왜냐하면 결국 이게 요즘에 읽고 있던 《사회지리학 개론》에서 생각이 나오다 보니까 그런데,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했고, 자식도 죽고 그런데, 거기서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 라고 하는 것에 그런 고통의 느낌이 있을 텐데 그 고통의 느낌을 어떻게 했을까, 저는 그 정도의 고통을, 자식이 죽는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얘기를 하지 않는가. 〈욥기〉를 다시 읽어보니까 욥이 인과불명의 고난에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도대체 중간에 뭐가 개입되길래 이 사람이 이런 것을 고통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욥기와 만나다》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그러면서 욥이라고 하는 사람을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규정했는가. 지난번 12장에서 경건한 사람, 욥을 읽었는데, 과연 경건하다는 게 무엇일까. 그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절대적 경건이라는 게 있을까.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크 래리모어의 책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읽어봤는데 별다른 얘기가 없고, 그래서 어쨌든 여러분들에게도 이것은 답이 없는 문제니까 한번은 더 생각해 봐야 된다 라는 의미에서 오늘은 제12강을 마무리 짓지 않고 마크 래리모어의 이 책 결론 부분을 한번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에서 욥기를 연구하고, 욥기를 바탕으로 기도하고, 욥기를 상연한 면면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옵 이야기를 보충하고 그의 말을 바꾸고 때로는 뒤집어 읽었다.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유대인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욥이라고 하는 사람의 정체가 완전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딱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유대인이었다. "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일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은 욥을 이방인이라고 보고 어떤 이들은 유대인으로 보았다 이것이다. "욥기는 역사이자 비유였다." 욥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어날 만한 이야기 그럼직한 이야기들의 역사이자 비유일 수도 있다.  그 다음에 "욥은 하느님의 시험을 받았고 심판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욥의 하느님을 시험하고 심판했다." 읽어보면 욥이 하느님의 시험을 받았고 심판을 받았는데 어찌 보면 그 과정에서 신이 인간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는 신은 인간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게 아주 유의미한 물음이겠다.  시험하고 심판했다. 하느님을 시험하고 심판했다.  다시 말해서 욥기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말이다. 욥기를 통해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탐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를 탐색하지 않고 우리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신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욥기를 통해서, 고통받고 시험받고 심판받는 욥을 보면서, 욥을 시험하고 심판하는 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래리모어가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신 양쪽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욥기라고 하는 이 텍스트는 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는 그런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그 신과 만나고 신을 거부하고 신을 저주하고 또는 신에게 깊이 경건한 마음으로 굴복하는 그런 인간, 가운데 얘기이다. 중간. 신과 인간의 교섭에 관한 인터렉션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욥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내가 똑바로 살아야지 라는 생각만 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욥기를 읽으면서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욥기가 지혜 문학에 속한다고 하는데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한다. 그냥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또는 무턱대고 경건함, 그게 지혜가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서 확신을 얻지 못하고 계속 갈등하고 고민하고 그런 것이겠다. 예전에는 강의할 때는 욥기에 대해서 또 신에 대해서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욥기와 만나다》를 다시 읽어보면서, 마크 래리모어의 책을 강의할 때 읽었었다. 그런데 이게 번역되어 나온 다음에 다시 읽어보니까 내가 욥기를 제대로 안 읽은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든다. 또 이번에 《문학고전 강의》 해설 녹음을 하면서는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켜켜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무의미한 그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소거되는, 사라져 버리는, vanish 정도가 아니라 아주 perish되는 그런 경험들이 있다. 그러면 정말 아득해진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욥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일단 잠정적으로 정해놓고 경건한 사람이다 라고 정해 놓고, 이제 강의를 진행했고 책을 썼는데, 지금 보니까 정말 경건한 사람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크 래리모어의 문장을 다시 한번 보면 "욥은 하느님의 특별한 친구이자 교만한 사람이자" 이거 말이 안 된다. 교만한 사람이자 겸손한 사람이자 고결한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욥기는 비인간적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 누구나 다 자신을 욥에게 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욥과 같은 면면이 있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온갖 종류의 인간의 특성을 욥이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욥기는 온갖 종류의 인간들의 이야기이고, 그 온갖 종류의 인간들을 상대하는 신의 이야기니까, 욥기에 등장하는 신마저도 정말 온갖 종류의 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욥의 고난을 통해 신의 정의와 불의, 배움과 망각, 항복과 저항을 숙고했다."  이게 이제 꼭 이렇게 정의, 불의, 배움, 망각, 항복, 저항, 여섯 가지 만이 아니라, 이렇게 쭉 마크 래리모어가 나열한 것은 온갖 종류의 겪음,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파토스들을 숙고했다는 것이겠다. "언약 전통 주변부에 있던 욥은 탈중심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욥 이야기와 욥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욥기를 읽도록 자극했고 때로는 욥기를 읽는 것에 저항했다." 읽다 보면 안 읽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내가 왜 이런 걸 읽고 괴로워해, 그냥 정말 살아온 대로 살면 되겠지 라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이제 욥기는 한 번 읽어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욥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잘 파악이 안 된다. 이렇게 욥기가 독자들에게 손쉽게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저자가 여러 명이기 때문일 텐데, 이건 문헌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그렇지만 "욥기라는 문헌의 역사 내내 욥기와 나란히 읽힌 욥의 전설이라는 생생한 대항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여러 명이고 욥기와 마찬가지로 욥의 전설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욥기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 인간의 선과 이해의 한계, 대화와 독백, 침묵 속에서 언어의 한계 등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읽으면서 이제 그동안 알고 있었던,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켜켜이 쌓아온 그런 것들에 확실성들이 무너져 버리니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욥기처럼 그 모습과 해석의 틀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본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우리가 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욥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이 경건해지라 이런 얘기가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해야 한다라는 말이 되겠다. 이것에 대한 성찰들, 이게 저는 실존적 성찰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이라고 그러면 역사적 성찰의 반대말인데, 역사적 성찰에서 켜켜이 쌓아올리는 그런 것들을 완전히 무로 돌려버리고, 니힐리즘의 입장에 서서 그냥 다시 근원으로 내려가는 것, 이런 게 실존적 성찰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또 안 된다. 역사적 성찰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딱 중간선을 잡아야 한다. 길이라고 하는 게 이제 라티움어로 via이다. 그 중간이라는 게 media니까 중간의 길via media라고 하는 말이 사실 성공회의 모토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 실존적이면서도 역사적이다, 이게 이제 모순인데, 그런 길을 찾아보는 것이 욥기를 읽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13강으로 넘어가기 전에 욥은 누구인지 모르겠고, 욥기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모르겠으니 그것에서 혼란스럽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준다. 뚜렷한 명징한 통찰을 얻어내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지만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중간 길에 서서, 실존적 통찰과 역사적 통찰 그 중간에 있어야 되지 않나 한다. 다시 여기 보면 "좀 더 근본적으로" 그게 근본적인 태도이다. 중간에 있는 게 오히려 근본적인 태도일 수 있다.  


《욥기와 만나다》 결론 275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에서 욥기를 연구하고, 욥기를 바탕으로 기도하고, 욥기를 상연한 면면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욥 이야기를 보충하고 그의 말을 바꾸고 때로는 뒤집어 읽었다. 욥은 이방인이었으며 유대인이었다. 욥기는 역사이자 비유였다. 욥은 하느님의 시험을 받았고 심판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욥의 하느님을 시험하고 심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신 양쪽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욥은 하느님의 특별한 친구이자 교만한 사람이자 겸손한 사람이자 고결한 사람이었고, 그리하여 욥기는 비인간적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욥의 고난을 통해 신의 정의와 불의, 배움과 망각, 항복과 저항을 숙고했다. 언약 전통 주변부에 있던 욥은 탈중심 세계의 상징이 되었다. 

《욥기와 만나다》 결론 276 욥 이야기와 욥의 목소리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욥기를 읽도록 자극했고 때로는 욥기를 읽는 것에 저항했다(때로 이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욥기는 커다란 해석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책이다. 누군가 욥기의 독법을 제시할 때마다 본문에는 그 틀에 들어맞지 않는 요소들이 있었다. 욥기를 개작한 이야기들에서도 욥기의 갈등과 복잡한 요소들은 자리를 바꾸어 다시 나타났다. 대사와 역할이 바뀌더라도 욥기의 진실성은 유지되었다. 

《욥기와 만나다》 결론 276 이렇게 욥기가 독자들에게 손쉽게 파악되지 않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저자가 여러 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욥기라는 문헌의 역사 내내 욥기와 나란히 읽힌 욥의 전설이라는 생생한 대항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욥기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 인간의 선과 이해의 한계, 대화와 독백, 침묵 속에서 언어의 한계 등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욥기처럼 그 모습과 해석의 틀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본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욥기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 인간의 선과 이해의 한계, 대화와 독백, 침묵 속에서 언어의 한계 등과 관련된 우리의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인간 실존과 관련된 가장 어렵고,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기 위해서는 욥기처럼 그 모습과 해석의 틀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본문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부분이 그러니까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볼 때 저는 이것이고, 그렇게 보면 근본적이라고 하는 것이 달리 말하면, 중간에 있는 것, 나가르주나(용수)가 얘기했던 것처럼 중도, 중간에 있는 것, 그 중도의 길 그것이 어떻게 보면 근본적인 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음에는 이제 13강 인과불명의 고난에도 입술로 죄를 지지 않는 욥으로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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