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문학 고전 강의 — 30 제12강(1) 구약 성서 〈욥기〉

 

2023.06.27 문학 고전 강의 — 30 제12강(1) 구약 성서 〈욥기〉

⟪문학 고전 강의 - 내재하는 체험, 매개하는 서사⟫, 제12강(1)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1.1)

 

《문학 고전 강의》 제12강 경건한 사람, 욥. 여기 1장 1절을 먼저 보겠다.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제가 이걸 강의하고 이렇게 책에 적어놓은 것은 욥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밋밋한 해석이다. 《욥기와 만나다》를 봐도 그렇고, 다른 욥기 해설서들을 봐도 그렇고 욥이 누구인가, 즉 욥의 정체에 관한 물음이 있다. 이것은 유대교회 랍비들이 언제나 고민했던 문제이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첫째 문장인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고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쓰여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둘째 문장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정도로까지 얘기할 수는 없고 무모한 해석이다.  저의 문장 자체도 두 개인데 그 다음 문장을 보면 "그의 성격은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과 대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실마리이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문장 3개를 써놨는데, 이 문장 세 개가 사실 굉장히 무모하고도 단적으로 기존에 나와 있는 그런 해석들을 무너뜨리는 그런 언급이다. 예를 들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랍비들이 언제나 고민했던 문제가 욥의 정치에 관한 물음이다. 욥이 누구인가, 우수는 어디인가 이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70인역이라든가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유대교회 랍비들이 욥을 이스라엘의 계보에 넣으려고 수차례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욥은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는가 또는 도대체 우수는 어디인가.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은 모세와 동시대인이었다 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아주 진지하게 제기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등장하는데 사탄이 누구인가. 이런 것들을 굉장히 심각하게, 그리고 이제 대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욥기를 굉장히 유념해서 읽은 사람인데, 특히 이 욥기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또는 문자적 의미를 보기보다는 그것에 감추어진 영적인 의미를 구별해서 읽는데,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까 알레고리칼 즉 우의적 해석을 하게 되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이제 신비적 해석까지도 나아가게 된다. 우의적 해석이라는 건 알레고리 즉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수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비유로 쓰여 있는가, 그것을 찾아 들어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욥기〉 1.1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욥기 2장에 보면 또 토기 조각으로 긁는데 이 토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냥 저는 완전히 리터럴하게 읽었다. 이 욥기를 읽을 때 글자 그대로 읽어버렸다. 우스라는 곳이 있었다. 그냥 장소의 명칭. 그 다음에 이름이 욥이다. 욥이든 톰이든 삼돌이든 그 단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저는 그래서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 네 가지의 욥의 성격, 욥에 대해서 설명하는 4개의 형용사가 중요하다, 이렇게 읽어 나갔다. 그래서 욥의 이름을 가지고 글자 풀이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알레고리를 찾아내고 것,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알레고리를 알레고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러면 제가 욥기를 공부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니까 일단 저의 능력에 부치고,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랍비들의 그런 것들을 찾아내기도 어렵고, 그 다음에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알레고리를 가지고 읽으려면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세계를 구축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멋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것 자체로 허구적인 이야기의 세계, 즉 네러티브 월드를 구축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욥기를 읽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욥기를 해석하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를 하나 창작해내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면 이건 욥기를 읽는 게 아니라 욥기를 빙자하여 그냥 창작을 하나 해버리고 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해석의 한계를 넘어간다고 본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읽었다. 이것이 제가 욥기를 읽은 방식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다. 

제12강 133 첫째 문장인 “우스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를 보면, 이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고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쓰여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둘째 문장입니다. 그의 성격은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과 대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실마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을 어떤 번역본에서는 ‘악에서 떠난’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욥은 경건한 사람이 라고 하는데, 이 문장에 나오는 네 가지 성격이 그의 경건함을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완전”과 “진실한”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성격입니다.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성격도 신적인 기준과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선을 적극적으로 행하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욥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 중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의 원리들입니다. 

정리해보자면, 욥을 묘사하는 말들 중에서 ”완전”하다, “진실”하다.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말들은 윤리적인 표현이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라는 것은 종교적 표현입니다. 윤리적 표현이 종교적 표현보다 많기 때문에 욥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건하며 지혜로운 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장 1절에서는 누가 보더라 도, 즉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 보더라도 욥이 경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강조되어야 독자가 〈욥기〉를 신앙의 텍스트로만 읽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기〉 2.8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다시보면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고 진실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이것은 굳이 어떤 유대교도가 아니어도 즉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도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는 욥은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건한 사람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해석하기에는 1장 1절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 보더라도 욥이 경건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신정론에 관한, 신의 올바름에 관한 얘기는 뒤에 나오기 때문에 그때 가서 다시 얘기를 하겠지만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제외하고도 욥이 경건한 사람임을 얘기해야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신에 대한 불평, 처음에는 신에게 순종을 하는 듯 하지만 결국 욥도 신에 대게 대해서 불평을 한다.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자신을 저주하다가 급기야는 신에게 반항을 하게 된다. 그 사건들을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서로 앞뒤가 들어맞는 것으로 이해하려면 욥은 적어도 윤리적인 차원에 있는 사람으로 설정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욥기〉 2.10 그러나 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그 다음에 이제 이어지는 절들인 1장 2절에서 4절까지 거기 보면 아들 일곱과 딸 셋 얘기가 있고, 그 다음에 욥이 키우는 짐승들 얘기가 있다. 그러면 욥이라는 사람이 사회 상층부에 있는 사람임을 아주 뚜렷하게 암시하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 이런 것들은 이제 꼭 그 숫자가 아니고, 상징적으로, 알레고리로 읽어야 되겠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그의 아들들은 번갈아 가며 자기 집에서 잔치를 차리고 세 누이도 불러다가 함께 먹고 마셨다." 아들들도 이제 살림이 썩 괜찮은 그런 쪽이다. 1절에서 5절까지가 욥의 경건함과 풍족함,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이제 6절에서 12절까지가 야훼와 사탄의 대화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땅과 하늘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야훼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 그러니까 사탄이 도발을 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당신께서 잘 돌봐주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탄은 욥의 경건함과 욥의 번영을 연결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게 경건하면 번영을 한다, 복받는다 그런 얘기이다. 경건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번영을 이루게 해주었으니 감사의 마음으로 욥의 경건함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앞서서 욥이 굳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없더라도 경건한 사람인데 그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즉 욥은 하느님이 잘해 주니까 하느님에게 잘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그것과는 무관하게 본래 사람이 착해서 그런 것인가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문제를 삼는다. 그러니까 욥의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연 신에 대한 신앙과는 무관한 것인가 아니면 신에 대한 신앙심 때문인가. 즉 신이 그를 돌봐주었기 때문에 경건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가 아니면 신과는 무관하게 경건한 것인가. 사탄은 신에 대한 신앙심이 있기 때문에, 신이 그를 돌봐주었기 때문에 경건하다, 돌봐주어서 번영을 이루었기 때문에 경건하다 라고 말하기 때문에, 사탄은 신앙심과 경건함을 연결시키는 입장에 있다면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욥기에 나와 있는 얘기인데 욥기를 일단 떠나서 우리도 한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할 때 그것에 대한 보답이 있는가. 그 보답과는 무관하게 선함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욥기를 읽으면서 욥기를 얼마나 잘 읽는가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 텍스트와는 무관하게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렇게 본다. 

〈욥기〉 1.2-4 그의 슬하에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다. / 그에게는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겨릿소가 오백 쌍,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있었고 종들도 매우 많았다.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 그의 아들들은 번갈아 가며 자기 집에서 잔치를 차리고 세 누이도 불러다가 함께 먹고 마셨다. 

〈욥기〉 1.7-11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 야훼께서 사탄에게, "그래,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하고 말씀하시자, / 사탄이 야훼께 아뢰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겠습니까? / 당신께서 친히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울타리로 감싸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셨고 그의 가축을 땅 위에 번성하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보십시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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