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알레비: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10점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한국문화사

▪ 옮긴이 서문
▪ 벤담과 철학적 급진주의 관련 연보
▪ 일러두기

서언
제1장 / 경제사회의 자연법칙
제1절 / 리카도
제2절 / 제임스 밀과 맥컬럭
제2장 / 정의의 조직과 국가의 조직
제1절 / 사법절차와 사법조직
제2절 / 헌법
제3장 / 사유의 법칙과 행동의 규범
제1절 / 지식
제2절 / 행동
제4장 / 결론

▪ 옮긴이 해제
▪ 언급된 저작의 목록
▪ 찾아보기

 


제4장 / 결론

330 정선에 관한 하나의 과학이 있다. 이것이 이 철학의 첫 번째 명제다. 정신은 처음에는 흩어져 있는 수많은 감각들로 이뤄진다. 이 현상들이 서로 어떻게 결합해서 하나의 체계로 귀결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단순한 인력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법칙의 개수는 어쩌면 둘 또는 어쩌면 하나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두 개의 원소 감각이 종전에 서로 인접해서 지각되었다면 또는 서로 비슷하다면 그것들은 나중에도 서로 결합되어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순결합의 사례들이 연이어 복잡해지는 것으로 정신생활의 모든 작동구조가 설명된다. 감각들을 서로 비슷하게 만드는 여러 특질들 가운데에는 흔쾌하거나 고통스러운 특질, 또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우리 욕구의 대상이거나 반감의 대상이 되는 특질이 있다. 정신의 작동 법칙에 따라서, 흔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감각들과 결합되는 감각들은 욕구나 반감을 일으키는 수단이며, 이어서 욕구나 반감의 대상으로 된다. 이로부터 우리의 도덕 생활의 전체 메커니즘이 나온다. 우리 정신생활을 구성하는 원소 감각들의 묶음 가운데, 보다 제한된 경험에 기초하는 부류의 결합들은 해당 개인에게 특유한 반면에, 다수의 개인들에게 그리고 때로는 인류 전체에게 공통되는 결합들은 이른바 진실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전자와 후지를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기예다. 마찬가지로 어떤 쾌감의 결합 또는 쾌락의 느낌에 수반되는 감각들의 결합은 해당 개인에게 특유한 반면에, 같은 종류에 속하는 여타 감각들의 결합은 오히려 인류 전체까지도 망라할 수 있는 여러 명의 개인들과 공유된다. 개인의 이익과 인간 종의 이익을 동화하는 이러한 결합들은 이른바 선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그리고 도덕이란 우리로 하여금 전자와 후자를 분간할 수 있게 해주며, 후자를 실현하기에 알맞은 수단을 알게 해주는 기예다. 영혼에 관한 이러한 실증적 과학의 원리들을 흄과 하틀리가 정형화했다. 그 원리들은 새로운 논리와 새로운 도덕의 기초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나아가 흄의 영향, 그리고 하틀리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이 공리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미쳤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심리학 논리학 그리고 도덕에 관한 연구를 등한시했다. 개혁가들은 사변을 즐기지 않았다. 실증적인 사고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하틀리의 철학이 귀착한 종교적 결론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념가들이라서, 그들은 홈의 회의적인 역설들을 귀찮아했다. 벤담은 경력의 막바지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사회체계에서 기초로 깔린 도덕이론을 정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제임스 밀도 1832년에 가까워지면서 마찬가지로 벤담의 도덕이론에서 기초로 깔린 심리학을 과학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법학과 정치경제학과 헌법에서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도달한 결과들을 정당화하는 과제에 그들이 눈길을 돌린 것은 단지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이었을 뿐이다. 

332 사회 전체는 규칙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그 규칙들은 실효를 발휘하기 위해서 성문법의 형태를 띠어야 하며, 사회 현상들의 총합을 망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법전으로 체계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입법자는 사회 안에서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는 대단한 존재다. 도덕적 질서, 이익의 평형을 입법자가 창출한다. 사회는 그가 꾸미는 책략의 산물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라고 불렀던 것이 이런 식으로 적용된다. 영국에서 이 원리를 최초로 정형화한 이는 17세기의 홉스였다. 그러나 1688년의 혁명 이후, 철학은 다른 방향을 따라왔다. 벤담이 자기 법철학의 원초적 구상을 차용한 것은 18 세기 대륙의 철학지들, 엘베시우스와 베카리아 같은 계몽 독재정의 이론기들로부터였다. 영국에서 이름을 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그는 처음부터 유럽의 공중을 상대로 자선을 표현했고 성공했다. 자기 나라 안에서는, 범죄를 원천에서 차단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고 범죄지들을 정직한 사람으로 기계적으로 변모시킬 것으로 계산된 감옥체제가 채택되도록 노력하는 와중에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334 애덤 스미스가 창시한 것으로 공인되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의해서 토머스 페인이, 그리고 특히 고드윈이, 도달한 결론이 실제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 철학을 자신의 공리주의와 융합했다. 후일 리카도와 제임스 밀의 시대에, 주변 사정과 시대적 배경의 이중적 영향 아래서, 애덤 스미스와 그 계승지들의 정치경제학은 벤담의 체계에서 주도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기실 벤담주의란 우연히 경제학자를 겸하게 된 법학자의 작품이었다. 그래도 오귀스트 콩트는, 벤담이 사망한 지 10년 후에, "정치경제학이라 불리는 것에서 파생한 가장 뛰어난 결실"이 벤담의 신조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적인 오류 기운데 가장 용납해줄 만한 오류를 저질렀다.  

이제, 벤담주의자들의 법철학과 경제철학이 각각 기초로 삼는 두 가지 원리는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원리들이다. 그 모순은 당대 벤담주의의 공식들 안에서 줄곧 터져 나왔다. "자연법"은 "이치"가 아니라고 『입법론』에서 벤담은 말한다. "자연법"이란 하나의 "비유적 표현"이자, 하나의 "은유"이고 하나의 "허구"다. 블랙스턴이나 몽테스키외가 준거로 삼고자 했던 자연법들이 만일 실지로 있다면, 실정법의 기초로서 복무하기는 커녕, 실정법이 쓸모없다는 증명이나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의 법칙"을 향한 탐색은 벤담 학파의 경제학자들이 정치경제학에 부과한 목표였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라는 문구로써 그들이 이해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성향들과 연계된 물리적 자연의 일반적 사실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화의 원리 그리고 정의와 선의 법칙을 그 문구로써 떠올리는 경향을 명백히 보였고, 그런 원리와 법칙이 존재하기만 해도 인간에 의해 서툴게 만들어진 모든 실정법들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었다.  

339 공리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합리주의자들이었다. 그 학파의 역사에서 그리고 그들의 산조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들을 지칭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표현들은, 그들을 감각주의자라고 부르든지 경험주의자라고 부르든지, 요컨대 그들에 관한 자리매김으로서 잘못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그들을 "감각주의자"라고 부른다. 벤담이 금욕주의의 도덕이론을 공격했다고 해서, 그들의 신조에 관해 이보다 잘못된 관념을 자아낼 단어는 없다. 공리주의자들은 필요의 충족에 대해 자연이 걸림돌로 설치해둔 (고통스러울 때가 많은) 조건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의 논리적 귀결에 해당하는, 맬서스의 표현을 사용하면, "도덕적 제약들"을 규정하는데 관심이 있었지, 본능을 해방한다든지 모든 사람에게 모든 향락에 대한 권리를 확립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인생의 막바지로 가면서, 벤담은 자신의 용어들을 수정했다. 

341 "게다가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도 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쾌락의 양이, 그 자신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창출되는 비참의 양에 비해 작다는 사실은 하나의 슬픈 통찰이다. 인류에게 비참의 비율이 행복의 비율을 초과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비참의 총합은 겪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크게 제한되기 때문에, 모종의 구제할 힘을 그는 대체로 보유한다". 공리주의 급진파에게는 스토아주의적인 무언가가 있다. 벤담은 1790년에 랜즈다운 경에게 자신을 "에피쿠로스학파와 견유학파 사이에 위치한 (중략) 일종의 잡종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스튜어트 밀이, 자기 아버지에게는 근대적 의미가 아니라 고대적인 의미에서 스토아주의적이면서 에피쿠로스학파 같고 견유학파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때에도 벤담의 그 문구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