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1 (1-10)

 

신국론 1 (1-10) - 10점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옮김/분도출판사

해제
제1-10권
제1권 시대의 재앙과 하느님의 섭리
제2권 그릇된 도덕을 낳은 다신숭배
제3권 로마사의 비판적 회고
제4권 제국 성장에 아무것도 못해 준 많은 신들
제5권 운세의 이치가 있는가 없는가

제6권참 행복에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신들
제7권 신들에 관한 자연주의 해석과 참 행복
제8권 그리스도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중개자의 역할
제10권 영원한 생명의 종교

 


해제

7. 「신국론」의 정치 사상
55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 예찬자도 정치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신국론」의 두 도성 대조가 교회와 국가 간의 대립을 보여준다는 듯이 정치적 안목으로 해석될 저작은 아님을 학계는 두루 인정한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이상적 정치구조나 체제에 대한 언급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 책자를 전용할 여지도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철학과 신앙에 입각하여 인간사를 관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 시각에 입각한다면 이 저서도 정치의 본질과 그 조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치의 구조적 측면은 아니지만 그 규범적 착안은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국론」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 국민 개념, 그리고 평화 시상 등이 돋보이는 논제가 된다.  

「신국론」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 사상을 간추린다면 "은총에 의한 정치생활의 구원"을 그가 일관되게 암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정치라는 것을 떠나서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초역사적 여정을 안전에 두고 있는 그에게 정치가 안고 있는 근본적 결핍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추구해야 했다. 지상적 공동선에 대한 사랑, 그 성원들 간의 합의되고 질서잡힌 평화, 대신對神 관계와 대인對人 관계에서의 정의, 제도적 통일이 정치를 이루고 정치가 존재하는 조건을 이룬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치를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무엇으로 만들며 공동선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들을 한데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전향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정치 그 자체가 인류의 단절된 부분이요 분열시키는 요소임을 깨닫게 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그것을 존재케 하는 조건 자체가 불화와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는 또 자율적으로는 개인과 인류의 궁극적 최고선을 실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불가능하고 무력함을 드러낸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지성을 비추는 구원의 빛속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정치를 관찰하면서 하느님 도성을 바라보도록 인류의 시선을 돌려준다. 

(1) 인간은 사회적 존재
고대 사상에서 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로마 전통에 입각하여 이 개념을 적극 수용한다. 인간의 사회적 차원은 단지 지성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원리다(19.5). 사회성은 인간의 본성이고 만민에게 공통된다. "인류만큼 악덕으로는 그토록 불화하고 본성으로는 그토록 사회적인 종류가 없을 것이다"(12.28.1).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요 동료 인간들과 결합하려는 자연적 성향이 있다. "인간이야말로 어느 모로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사람들과 더불어,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회관계를 맺고 평화를 달성하려고 힘쓰진 않는가?"(19.12.2).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간을 구성하는 존재론적 원리이며, 이 원리가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갖가지 형태의 사회들을 결성하고 모색하게 만들고, 온갖 갈등과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과의 유대와 평화를 추구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인간에게 있어 사회와 평화는 한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며 어떤 형태로든 평화가 없이는 인간 사회가 아예 불가능하다. ''사물들의 어떤 부분에서, 또 어떤 부분으로 인해서, 또 어떤 부분과 더불어 평화가 유지되려면, ··· 그 질서가 없다면 아예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19.12.3). 이같은 두 본성이 곡해되어 표출되는 것이 인간 역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거되지는 않았다. "어떤 평화든 평화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따라서 어느 인간의 악덕도 평화를 사랑하는 자연본성의 궁극적 자취마저 말살할 만큼 자연본성과 상치되지는 못한다"(19.12.2). 원죄가 인간 본성에 끼친 해악을 누구보다 통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는 예외적 표현이다. 

인간의 이 자연본성적 사회성은 원죄로도 말소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려니와 가정, 도시국가, 그리고 세계라는 세 차원에서 엄연하게 실존하는 현상이다(19.7). 그러니까 사회성은 정치의 토대이며, 도성이라는 정치 조직 역시 사회성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설명을 얻는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사회성은 인간학적 접근에서도 확인되는 성격이다. 도성의 기원은 가족이다. 「신국론」에서도 가족을 사회 기반으로 논하고 있으며(15.16), 가정이란 도성의 시초 또는 부분이라고 정의한다(19.16). 그렇다면 정치란 가족 사회의 자연적 발전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에게 인간 사회의 심원한 의의를 제시한 것은 역시 성서였다. 성서에 의하면 인류가 한 조상에서 유래한다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것이 신이 인류가 "자연본성의 유사성뿐 아니라 혈연의 애정으로"(12.22) 하나되기 바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혈연의 애정이 "조화로운 일치로 평화의 사슬을" 이룬다는 것이다(14.1). 계시는 인간의 이 존재론적 본성을 더욱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거기에 (자연론에서 그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하느님의 부성을 토대로 인간의 유대, 사해동포 사상을 대중적으로 보급했다. 

이처럼 긍정적이고 자연스런 인간의 사회성을 전제하면서도 「신국론」에서 두 도성의 기원을 논할 적에는 상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임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지상 도성은 형제 살인자 카인에 의해서 였고 아벨은 "나그네로서 도성을 세우지 않았다."  

[···]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국민 개념
「신국론」에서 국민 개념이 논의된 것은 제2권(2.21)에서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덕성을 붕괴시킨 결과로 로마제국을 쇠망케 한다는 공격을 반박하면서와, 제19권(19.21-24)에서 하느님 도성과 공화국의 관계를 논하면서다. 제2권과 제19권은 연도상 거리가 있고 용어상으로도 호교적이며 사변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여기 나오는 국민 개념은 정치가 악덕과 천성의 이율배반을 극복해야 한다는 명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적 악을 해소하는 처방은 정의다. 최고의 정의 없이는 공화국이 통치될 수 없다(2.21). 그는 키케로의 정의에 따라서 공화국("공공의 사물")은 "국민의 사물"이라고 단언하며, 키케로에 있어서 정의는 단순히 정치생활의 규범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이라는 것의 구성적 요소다. 국민이라는 것은 키케로에 의해서 "온갖 종류의 모임이나 군중이 아니라, 법(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해 연합된 결사체"라고 정의된다. 음악의 조화처럼 정의는 사회 · 정치생활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일치와 합심을 도모하며 공화국을 이룬다. 정의의 약화는 그런 일치단결이 사라지게 하고 그런 국가는 공화국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 (2.21). 

그 논거는 직선적이다. 정치는 정의에 본질이 있다. "정의가 없는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페가 아니고 무엇인가?"(4.4). 하지만 정의를 결하면 어째서 국가가 강도떼에 불과한 것인가? 강도떼도 나름대로 규약과 공생을 찾는 작은 왕국이기 때문이다. "강도떼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집단도 두목 한 사람의 지배를 받고, 공동체의 규약에 의해 조직되며, 일정한 원칙에 따라 분배한다"(4.4). 키케로의 정의에 들어가는 국민 개념, 곧 법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가 강도집단에도 해당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강도집단도 일정한 대내적 정의에 입각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에 탐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세력 때문에 그 탐욕이 징벌당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집단이 존속하면서 정정당당한 집단처럼 행세하는 것이다(4.4; 19.12). 온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한 로마제국도 이와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참다운 정의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결국 하느님 도성뿐이라는 암시가 나온다. "그리스도가 창건자이며 통치자인 그런 공화국에서가 아니면 참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2. 21.4). 고전적 개념 대로 각자에 게 자기 몫을 돌려줌이 정의라면 인간의 창조주 신에게 맞갖은 몫을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세계에서 신에게 순종하고 신을 사랑하는 기본 정의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면 정의로운 공화국도 정의로운 국민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따라서 정의는 "하느님 사랑"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림이 정의라면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함이 충만한 정의라고 하겠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선은 사랑에서 정의의 절정을 보며 이것이 그의 탁월한 혜안으로 꼽힌다. 그는 일찍이 정의를 일컬어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랑, 그리하여 인간에게 복속되는 다른 모든 것을 잘 통치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요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정의다"라고 선언했다. 

정의를 이처럼 엄정하게 정의한다면 진정한 정의가 구현되는 참다운 공화국은 하느님의 도성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도성은 이 세상 것이 아니므로 현세 국가들은 진정한 공화국이라고도 하지 못한다. 정치는 그 본연의 사명을 결코 구현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새로 보완한 정의에 의하면 국민이란 "사랑하는 사물들에 대한 공통된 합의에 의해 결속된 이성적 대중의 집합"이다(19.24). 

[···]

그리스도교 주교인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정치적 동물" 자체만으로는 인간성의 충만에 이르지 못하고 약육강식의 불행한 현세 인간조건을 드러낼 따름이다. 인간은 공공 사물에 대한 헌신과 지상 조국에 대한 사랑을 통해 개인적 · 집단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탐욕을 극복하는 노력을 경주해 왔으나, 그것으로 얻은 것이라고는 죄악으로 점철된 현세적 영광과 권력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정치철학의 기조인 두 사랑의 이율배반에 입각해서 본다면 국가라는 최상의 정치조직은 양단간의 결단에 처하게 된다. 현세적 공동선에 집착하여 비록 정치적 성공을 거둘지라도 인간조건의 현세적 차원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그치거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amor Dei으로 전향함으로써 지상의 단결을 하느님 도성의 신비적 단결에 합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차원을 초월하고 지상적 성공을 상대화하는 경지에 이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3) 아우구스티누스의 평화 사상
그의 평화 사상은 정치라는 배경을 초월하는 주제이며 평화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도성에서다. 그곳에서야말로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을 향유하며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 경지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과 모순이 전혀 없는 이 완전한 평화,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의미의 평화를 위시해서 지상에서 가능한 모든 평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논제 가운데 하나인 평화가 「신국론」에서는 제19권 거의 전권에 걸쳐 논의되고 있다. 

[···]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는 단죄 받은 자들의 신비로운 도성을 특징짓는 무엇이자 경험상으로도 죄악의 신비를 확인시키는 무엇처럼 등장한다. 바빌론도 로마도 그의 눈에는 죄악의 신비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바 없고 지상 도성에 관한 고찰이 자꾸만 정치 국가에 대한 언급으로 옮겨가는 것도 생소한 바가 아니다. 

그래도 원칙에서는 분명하다. 첫째,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국가가 곧 악마의 도성은 아니다. 국가는 인간의 자연본성인 사회성의 발로이고 가족 사회의 자연스런 발전 결과이기 때문이다. 도회에 시민들의 여러 집안들이 있듯이, 온 세계에 국민들의 여러 왕국들이 존재함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4.15). 둘째, 현세에도 하느님의 배려로 나름대로의 선익이 존재하므로(19.13) 인간의 자연생활을 보장하는 그나마의 상대적 평화라도 보장하는 국가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고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국가는 공통된 사회조직이다(19.26). 따라서 신앙인은 정치와 그 평화를 멸시하지 말고, 본인은 비록 천상 도성을 지향하며 이 세상에 나그네 또는 순례자로서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지상의 평화를 향유해야 마땅하다. "천상 도성도 이 순례의 길에서는 지상 평화를 이용하고 … 지상 평화를 천상 평화에로 귀결시킨다"(19.17). 두 도성이 뒤섞여 있는 이상 우리도 바빌론의 평화를 이용하지는 것이다(19.17,26).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라도 정치가 완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치를 사탄의 통치로 보는 비관론도 배척한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므로 제거될 수는 없으나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 정치의 고유한 수단 방법만을 갖고서는 완전한 치유책 또한 없다. 정치 공동체를 구성원들의 부단한 정화와 회심에 의해서만 정치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들이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서언〕

본서의 집필 계획과 주제

하느님의 지극히 영화로운 도성을 옹호하는 것이 사랑하는 아들 마르켈리누스여, 내가 이 저서에 착수하면서 채택한 주제다. 이 저작은 내가 그대와 한 약속 때문에 그대에게 빚진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불경스런 자들 틈에서 나그넷길을 가는 나라이기도 하고, 저 영원한 처소의 확고함도 아울러  갖춘 나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정의가 심판으로 전환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만, 그때가 되면 최후의 승리와 완전한 평화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훌륭하게 성취될 터이다. 내가 하느님의 나라를 옹호하려는 까닭은 그 나라를 창건한 분보다 자기네 신들을 앞세우는 사람들에 대항하기 위함인데, 이는 실로 거창하고도 험난한 과제이긴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실 것이다. 오만한 인간들에게 겸손의 덕이 얼마나 큰가를 설득하기란 무척 힘들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지고한 덕목은 인간적 허세로 획득된다기보다는 신의 은총으로 선사되며, 지상의 거창한 모든 위업, 곧 가변적 시간 속에서 부침하는 모든 위업을 까마득히 초월한다. 우리가 거론하기로 작정한 이 나라의 임금이요 창건자는 당신 백성의 성서를 통해 신법에 대한 지식을 열어보여주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실 오만한 영혼의 기고만장한 정신마저 하느님의 이 도리를 존중한다고 할 수 있으니, 로마 백성이 다음 시구를 자신에 대한 찬사로 읊으면서 좋아하는 까닭이다: 

굴복하는 자들은 용서하고 오만한 자들은 징벌한다.

그러므로 지상국에 백성들이 예속되어 있는데도 지배욕 자체가 지상국을 지배하므로, 지상국이 지배하기를 탐하는 이상, 이 저작의 명분이 요구하는 경우, 또 그럴 능력만 있다면 지상국에 관해서도 침묵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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