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죽음과 죽어감 - 10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이진 옮김/청미



추천사

헌사

기념판 발간에 부치는 글

서문

제 1 장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제 2 장 ―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태도

제 3 장 ― 제1단계: 부정과 고립

제 4 장 ― 제2단계: 분노

제 5 장 ― 제3단계: 협상

제 6 장 ― 제4단계: 우울

제 7 장 ― 제5단계: 수용

제 8 장 ― 희망

제 9 장 ― 환자의 가족

제10장 ― 시한부 환자들과의 인터뷰

제11장 ― 죽음과 죽어감의 세미나에 대한 반응

제12장 ― 시한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치료

참고 문헌

독서 모임 가이드

심화 토론 가이드

옮긴이의 말






제 1 장 ― 죽음에 대한 두려움

32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의 문화와 사람들을 연구하다 보면,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정신과 의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며, 어쩌면 죽음이란 결코 나 자신에게만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절대적인 믿음이야말로 그러한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은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어렵고, 따라서 인간의 삶이 끝나야 한다면 그것은 외부 누군가의 악의적인 개입으로 인한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만 가능할 뿐, 자연적인 원인이나 노화로 죽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불길한 일이고, 두려운 사건이며, 그 자체로 심판 혹은 처벌을 요하는 일인 것이다.


36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여전히 두렵고 끔찍한 사건이다. 비록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달라진게 있다면 죽음과 죽어감, 그리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다루고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40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종종 익숙한 환경을 떠나 응급실로 내몰리기 때문에 죽음은 더욱 외롭고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몹시 아프거나 특별히 휴식과 안정이 필요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갔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소동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만이 단지 기나긴 시련의 시작일 뿐인 그 불편하고 냉혹한 소동에 감사할 것이다.

 

41 시한부 환자는 종종 아무 권리도 의견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언제, 어떤 병원에 입원할 것인지도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결정한다. 그러나 환자에게도 자신만의 감정과 소망과 의견이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 2 장 ―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태도

53 사후세계는 어쩌면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을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의 고통이 더는 천국에서 보상받지 못한다면 고통은 그 자체로 이미 아무 목적이 없다. 우리가 사교 활동을 하고 춤을 추러가기 위해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과거 교회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 목적이란 바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비극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목적을 주고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앙이 아니 였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고통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 사회가 죽음을 부정하는데 기여하는 동안 종교계는 사후세계, 즉 인간의 불멸성을 믿는 사람들을 잃었고, 그런 점에서 죽음을 부정하는 경향은 감소했다.

 

60 위의 사례야말로 수많은 젊은 의사들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배웠지만 '삶'의 정의에 관한 토론이나 훈련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이 환자는 '뇌까지 죽은' 환자 취급을 당하고 있었고, 모든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튜브가 목을 눌러 통증을 느껴도 그는 간호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간호사는 상시 그의 곁을 지켰지만 그와 의사 소통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72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자유로이 그리고 기꺼이 쳐다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죽을 가능성을 때때로, 혹은 마지못해, 흘긋 쳐다볼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그런 경우 중 하나다. 환자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제 3 장 ― 제1단계: 부정과 고립

87 우리가 인터뷰했던 200여 명이 넘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아니야. 내가 그럴 리 없어. 사실이 아닐거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초기, 부정은 발병 초기에 불치병이라는 얘기를 들은 경우는 물론이고 명확하게 얘기를 듣지 못한 경우나 추후에 스스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88 부정은 얘기치 못했던 충격적 소식에 대한 완충 장치 역할을 하고, 환자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벌어주고, 시간이 지날수록 환자는 전보다 덜 과격한 방어 기제들을 동원한다.


89 나는 환자가 원한다면 실제로 죽음이 닥치기 훨씬 이전에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기력이 있는 사람들이 죽음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고, 우리 환자 중 한 명이 너무도 정확하게 표현한 바와 같이,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쳤을 때보다는 '저만치 멀리' 있을 때 죽음이 덜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92 요약하자면, 이러한 환자의 첫 반응은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상태로 환자는 서서히 그 상태에서 회복된다. 초기의 멍한 상태가 잦아들기 시작하면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그때 대부분이 보이는 반응은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이다.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불멸의 존재이고, 우리자신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 전달받았느냐에 따라 불가피한 일을 서서히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에 따라,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긴장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얼마나 잘해왔느냐에 따라 환자는 서서히 부정을 버리고 덜 과격한 방어 기제를 채택할 것이다.


제 4 장 ― 제2단계: 분노

105 끔찍한 소식을 접했을 때 첫 번째 반응이 "아니, 사실이 아니야. 아니,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리 없어."라면, 이 반응은 머지않아 새로운 반응, 즉 "아, 그렇군, 나한테 일어난 일이 맞네. 착오가 아니었어."로 바뀌게 된다.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건강하고 평안한 척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첫번째 부정의 단계가 더는 유지될 수 없을 때, 그 단계는 분노와 광기, 시기, 원한의 감정으로 채워진다. 그다음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왜 하필 나야?"이다.

 

제 5 장 ― 제3단계: 협상

155 3단계는 협상의 단계로, 이 시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환자에게는 무척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환자는 첫 단계에서 슬픈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 신에게 분노했다면, 그 다음엔 피할 수 없는 일을 조금 미룰 수도 있는 일종의 협상 단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말하자면 '만약 하나님이 기어이 나를 지상에서 데려가실 생각이고 분노에 찬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거라면 내가 좀 더 공손하게 부탁하면 들어주실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는 시기다.


157 협상이란 사실 다가올 일을 미루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협상에는 선한 행동에 대한 보상의 요구와 스스로 정한 '시한'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여진다면 더는 바라지 않겠다는 철석 같은 약속도 포함된다. 우리 환자들 중 그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마치 "한 번만 용서 해주시면 다시는 동생하고 싸우지 않을 게요"라고 말하는 어린 아이처럼 말할 것도 없이 그 꼬마는 동생과 다시 싸운다.


제 6 장 ― 제4단계: 우울

162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우울증의 요인들이다. 그러나 준비성 우울의 단계야말로 시한부 환자들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기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163 준비성 우울은 과거의 상실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상실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제 7 장 ― 제5단계: 수용

201 만약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고 (즉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죽음이 아니고) 앞서 설명한 단계를 이겨내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다면, 환자는 마침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우울해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환자는 이전 단계에 느꼈던 자신의 감정들, 즉 살아있는 사람들과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 너무 일찍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지않아 잃게 될 소중한 사람과 장소들에 애도를 표할 것이고 어느 정도의 조용한 기대감으로 다가오는 자신의 마지막에 대해 사색할 것이다. 환자는 대체로 피곤해하고 상당히 허약해질 것이다. 자주 졸거나 짧은 간격을 두고 잠이 들지만 우울의 단계에서 느끼는 수면 욕구와는 다르다. 이것은 회피의 수면이 아니고 통증, 불편함, 혹은 가려움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휴식도 아니다. 서서히 증가하는 수면의 욕구는 마치 신생아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다만 순서는 그와 반대로 나타난다.

 

202 수용의 단계를 행복한 상태라고 잘못 인식해서는 안된다. 이 단계는 거의 감정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사라지고 투쟁이 끝나고 나면, 어느 환자가 표현했던 것처럼,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온다. 이 시기에는 환자보다는 가족들에게 더 많은 도움과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 죽어가는 환자는 평화를 얻고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관심사의 범위가 줄어든다.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하거나 외부 세계의 소식들이나 문제들로 인한 혼란을 원치 않는다.

 

제 8 장 ― 희망

243 항상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절망의 포기가 아닌 수용의 포기일 때, 우리는 더는 희망을 강요하지 않는다.


제 9 장 ― 환자의 가족

271 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줄곧 환자를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숨을 들이쉴 때가 있으면 내쉴 때도 있어야 하듯이 사람들은 병실 밖에서 '배터리를 충전 할' 시간이 필요하고, 틈틈이 정상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

 

274 죄책감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동반자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잠재적으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으면 가족들은 혹시 내 잘못은 아닌지 자책하곤 한다.

 

286 아마도 가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환자가 가족들을 포함한 자신의 세계에서 서서히 자신을 분리하는 마지막 시기일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서 평화를 얻고 그것을 수용하기에 이른 죽어가는 환자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조금씩 스스로를 분리하려 한다는 것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이 일구어 온 수많은 소중한 인간 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죽음을 준비 할 수 있겠는가?

 

제11장 ― 죽음과 죽어감의 세미나에 대한 반응

423 신앙이 있는 환자들도 그렇지 않은 환자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 차이를 단정하기는 어려웠는데, 그 까닭은 신앙이 있는 사람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의 진정한 신앙인은 지극히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그들은 신앙의 도움을 받았으며 무신론자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대다수의 환자들은 그 사이에 있었다. 일정한 형식의 종교적 믿음은 갖고 있지만 갈등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의 환자가 최후의 수용과 데커섹시스에 도달했을 때에는 외부 개입이 큰 혼란을 일으켰고, 몇몇 환자들은 그로 인해 평화롭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다. 그 혼란은 임박한 죽음의 신호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혹은 거의 징후가 없는데도, 몇몇 환자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환자는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는 내면의 신호에 반응한다.

 

426 한 학생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 세미나의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죽음 자체에 대해서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썼다. 죽음이란 죽어감이 끝나는 순간이라고 몽테뉴가 말했던가. 우리는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에 수반되는 절망감, 무력감, 소외감으로 인한 죽어감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세미나에 참석하고 그 문제를 생각해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체험했으며, 환자를 덜 불안한 마음으로 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제12장 ― 시한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치료

438 환자의 삶에서 고통이 멈추고 정신이 꿈이 없는 상태로 빠져 들고, 최소한의 음식만 필요로 하고, 주변 상황에 대한 의식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때가있다. 가족들이 복도를 서성이고, 기다림의 고문을 당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나서야 할지 아니면 임종을 위해 병원에 있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말하기엔 이미 늦었지만 가족들은 말로 혹은 말없이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때이다. 의학적 조치를 취하기에도 너무 늦었지만 (좋은 의도에서 일지라도 그런 조치는 너무 잔인한 일이다), 죽음으로 마지막 이별을 하기엔 너무 이르다. 가족들로서는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왜냐하면 환자가 그만 떠나고 싶어하고 그만 끝내고 싶어하거나 혹은 이제 곧 영원히 잃게 될 것에 절망적으로 매달리기 때문이다. 환자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침묵 치료가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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