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3. 2. 22.
철학의 위안 - A.보에티우스 지음, 박병덕 옮김/육문사 |
서문
보에티우스 생애와 작품
제1권
제2권
제3권
제4권
제5권
66 "진실로 당신은 모든 덕의 어머니이십니다. 내가 빠른 속도로 영달의 길에 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기억이 날 때마다 나를 슬픔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운명이 주는 불행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예전에는 행복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는 그릇된 신념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고통을 다른 그 무엇의 탓으로도 돌려서는 안 된다."
70 완전한 행복이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겠다. 너에게 너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너 자신을 소유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결코 잃고 싶지 않는 어떤 것, 운명의 여신이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행복이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행복을 바라보라. 만일 행복이 자연의 이성적 최고선이라면, 그리고 최고선은 무엇에 의해서도 빼앗길 수 없으며 빼앗길 수 있는 것은 이미 최고선이 아니라면 - 왜냐하면 빼앗길 수 없는 것은 빼앗길 수 있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 행운은 그 변하기 쉬운 성질 때문에 행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98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하면서 또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길을 따라가지만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똑같은 목적, 즉 행복에 도달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일단 손에 넣게 되면 바랄 나위 없는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좋은 모든 것들의 완성이며 자신의 내부에 좋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뭔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행복일 수 없다. 거기에 내포되어 있지 않고 뭔가가 부족하다면 여전히 그것을 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모든 좋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상태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길을 통해 도달하고자 애쓰는 목표임이 분명하다. 참된 선에 대한 욕망은 본디부터 인간의 정신 속에 심어져 있는데 다만 오류가 인간의 정신을 미혹에 빠지게 하여 거짓된 선으로 향하게 하는 것일 뿐이다.
128
눈먼 사람일지라도 그것(참된 행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방금 당신이 거짓 행복의 원인들을 설명해 주시려고 애쓰실 때 이미 당신은 참된 행복을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란 자족적(自足的, Self Sufficient)인 인간, 강한 인간, 존경 받기에 합당한 인간, 영예롭고 유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행복입니다.
그리고 제가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가지 더 말씀 드리자면 그것들(자족, 강함, 존경, 영예, 유쾌함)은 모두 같은 것이므로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이 알고 있습니다.
133 그렇다면 그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너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물을 창조하신 신은 선하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신보다 더 선한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선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신의 선함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이성은 신이 그토록 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신은 창조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선보다 더 완벽한 선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다른 것이 존재해야 하며, 그 존재는 신보다 우월하고 신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보다 분명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논쟁을 종결하기 위해 우리는 최고자인 신이 최고의 선과 완전한 선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완전한 선은 참된 행복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당연히 최고자인 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34 만일 선이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신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창조주로서의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유능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별개의 것인 그 둘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일을 맡은 어떤 권력자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경우 전자(한 사물)는 후자(다른 사물)와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최고선과 구분되는 것은 최고선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신에 대해서는 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보다 우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자기가 생겨난 근원보다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완벽한 논리로써 만물의 근원인 신은 본질적으로 최고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다.
170 얼마 전에 내가 강조했던 그 추론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찰해 보라. '선은 곧 행복이다. 그러므로 모든 행복한 사람들은 분명 그들이 선한 덕택에 행복을 얻는 것이다.'라고. 우리는 행복을 얻는 사람은 신과 같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런데 선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보상 - 결코 줄어들 수도 없고 그 누구의 힘에 의해서도 감소될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사악함에 의해서도 가려질 수 없는 보상 - 이란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현명한 사람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서로 반대이듯이 보상과 벌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다. 선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 선한 사람들 자신에 대한 보상이듯이 사악함 그 자체가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벌인 것이다.
그런데 벌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재앙을 겪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자신을 반성한다면 그 중 가장 나쁜 재앙을 겪고 있으니 처벌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앙은 형벌이기보다는 일종의 뿌리 깊은 감염인 것이다.
171 선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악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에 그들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육체가 아직도 인간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악함에 빠짐으로써 인간적인 본질도 잃어버린다. 그런데 오직 선만이 인간을 인간 이상의 수준으로 높여 줄 수 있으므로 사악함은 인간의 상태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던져버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172 관심사가 끊임없이 변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은 마치 새와도 같으며, 더럽고 불순한 욕정에 빠져있는 사람은 암퇘지의 더러운 쾌락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신성을 버리고 더 이상 인간이 되지 못할 때에 사람은 신적인 상태에 오르지 못하고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190 그런데 운명은 불변의 섭리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연쇄적인 원인들 또한 불변인 것이다. 만일 신의 정신 속에 내재하는 단일성이 그 원인들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어 내어 자신의 불변성에 의한 모든 것들 - 변화의 지배를 받는 모든 것들 - 을 다스린다면 그것이 우주를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마구 동요할 것이다.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고 거꾸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너희 인간들이 이러한 질서를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의 위치 - 사물로 하여금 선으로 향하도록 그 사물을 다스리는 고유의 위치 - 를 가지고 있다.
악으로 인해 혹은 사악한 사람들의 계략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우리가 충분히 증명한 바 있듯이 그들은 선을 찾다가 잘못과 오류에 의해 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며 우주의 중심에 있는 최고선에서 유래하는 질서는 그 누구도 그의 기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191 설사 어떤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 정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 물리학 용어를 빌리자면 - 기질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너의 놀라움은 똑같이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어째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 것이 맞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쓴 것이 맞는지, 혹은 똑같이 병든 사람들 중에서도 어째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순한 치료법이 유익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강한 치료법이 유익한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놀라움과 같다. 그러나 건강한 상태와 병든 상태 각각의 성질의 차이를 알고 있는 의사에게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의 경우에 있어서 건강은 선성(善性)을 의미하여 병은 사악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고 선한 사람들의 보호자이며 악한 사람들의 징벌자는 다름 아닌 정신의 인도자이며 영혼의 의사인 신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신은 섭리의 망루에서 내려다보며 사람들에게 무엇이 적합한지를 살핀 다음에 그에게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질서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놀라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신은 행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신이 행하는 일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32 "따라서 방금 우리가 입증한 바와 같이 인식의 모든 대상들은 그 자체의 본질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의 결과로서 인식되는 것이므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신적 실체의 본질을 조사해 보기로 하자. 그래야만 신의 인식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 알수 있을 테니까.
신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그러니 영원석의 본질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그에 대한 고찰은 우리에게 신의 본질과 신의 인식 방법을 동시에 밝혀 줄 것이다. 영원성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의 전체적이고 동시적이며 완전한 소유이다. 이점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피조물들과 비교해 보면 명백해 질 것이다.
시간 속에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현재에 존재하면서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갈 뿐이며 자기의 생명 전체를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란 내일은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어제는 이미 잃어버린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오늘의 삶에 있어서도 재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순간을 살 뿐이다.
그러므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상태에 놓인 것은 무엇이건 설사 그것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그 생명이 시간의 무한대까지 뻗친다 하더라도 -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 그것은 영원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무한히 길지 모르지만 자기의 생명 전체를 동시에 포괄하고 이해하지는 못한다. 미래는 아직 소유하지 못하고 과거는 이미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 전체를 동시에 포괄하고 소유하는 것, 미래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과거의 그 어느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원한 것은 필연적으로 항상 자신에 대해 현존하며 자신을 지배하며, 흘러가는 무한한 시간을 항상 현재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Plato)은 세계가 시간상으로 아무런 시작도 가지지 않았으며 또한 끝도 가지지 않을 거임을 믿었다.'라고 얘기를 듣고서, '창조된 세계는 그 창조주와 똑같이 영원하다.'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이론 속의 세계처럼 영원히 계속되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영원히 계속되는 생명 전체를 동시적인 하나의 현재 안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이 신의 정신의 한 특성이다. 신은 시간의 길이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신의 본질인 직접성이라는 특성과 관련하여 창조된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무한히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생명의 이러한 현재 상태를 닳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그것 - 세계 - 은 그러한 상태를 재현하거나 그러한 상태를 똑같이 될 수 없으므로 불변으로부터 변화로, 즉 존재의 직접성으로부터 과거와 미래의 무한함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 - 세계 - 은 자신의 생명 전체를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가 끝나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자신이 성취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그것 - 영원한 것 - 을 어느 정도 흉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이 작은 순간 속에서 어떤 종류의 현재에 매달림으로써 그러한 흉내를 내는데, 그 현재는 저 영원히 변치 않는 현재와 닮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그 현재를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게든 그것이 흉내 내고 있는 대상의 겉모양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까닭에 시간을 통한 무한한 여행을 하게 되고 그렇게 하여 그것은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머물러 있을 때에는 그 전체를 포괄할 수 없었던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합당한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을 따라 신은 영원하고 세계는 영속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판단은 판단하는 주체에게 주어진 일들을 그 주체의 정신의 본질에 따라 이해하는 까닭에, 그리고 신의 상태는 항상 영원한 현재의 상태인 까닭에 신의 인식 또한 시간적 변화를 초월하여 신의 현재의 직접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신의 인식은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며 모든 과거와 미래를 마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인식의 직접성 속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네가 신이 모든 것들을 알아내는 그러한 예지 혹은 선견을 고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지로서가 아니라 결코 끝나는 일이 없는 현재에 대한 인식으로서 생각하는 편이 보다 옳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선견 혹은 '미리 내다보는 것'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섭리 혹은 '바라보는 것'이라고 불리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치 높은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래에 있는 사물들을 멀리 떨어져서 내려다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너는 신의 시선에 의해 자세히 관찰된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고 고집하느냐? 인간은 사물들을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물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물들을 보는 것 자체는 네가 현재 보고 있는 사물들에게 아무런 필연성도 부여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의 현재와 신의 현재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라면 네가 너의 현재 시간 속에 있는 사물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자신의 영원한 현재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의 예지는 사물들의 본질과 특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신의 예지는 다만 자신의 현재 안에 있는 사물들을 그것들이 어느 시기에 미래의 사건들로서 일어나게 될 모양 그대로 보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사물들에 관해 아무런 혼란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의 정신의 시선으로 한 번 봄으로써 일어나게 될 모든 것들이 필연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것이다.
너도 어떤 사람이 땅 위를 걸어가는 것과 태양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동시에 보게 되면 그 두 광경이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너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여 전자는 의지에 의해 일어난 것이고 후자는 필연에 의헤 일어난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시선은 모든 사물을 내려다보지만 그 사물들의 본질을 혼란시키지는 않는다. 신에게는 그것들의 현재의 사물들이지만 시간의 조건하에서 그것들은 미래의 산물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일어날 그 미래의 일에 아무런 필연성도 부과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견해가 아니라 진실 위에 세워진 지식인 것이다.
만일 네가 '신이 미래의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필연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를 이 필연성이라는 말에 묶어 둔다면, 나는 그것이 확고한 진리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것은 신의 연구자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의 통찰할 수 없었던 문제이다.
그렇지만 나는 똑같은 미래의 일일지라도 신의 예지와 관련하여 고찰될 때에는 필연적이지만, 그 자체로서 고찰될 때에는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된다고 대답하겠다.
필연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 필연성으로 예를 들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사실이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건적 필연성으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네가 알고 있다면 그가 걷고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알려진 바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건 적 필연성은 단순 필연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조건적 필연성은 그 자체의 본질 덕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진 조건 덕택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필연성도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걸어가도록 강요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가 발을 내디딜 때 그가 걷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긴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섭리가 어떤 것을 현재의 것으로 보고 있다면 설사 자신의 본질 속에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신은 자유 의지로 일어나는 그러한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건들은 신이 그것들을 본다는 것과 관련하여 고찰될 때에는 신의 인식이라는 조건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것들 자체로 고찰될 때에는 제 본질의 절대적인 자유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의미할 여지없이 일어나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의 발생은 자유 의지의 결과인 것이다.
그것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참된 본질을 앗아가지 않으며 그 본질 덕분에 그것들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실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했던 것이다.
발생이 필연적이 아닌데도 신의 예지라는 조건 때문에 마치 그것들이 필연적인 것처럼 나타나게 될 경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방금 내가 말했던 두 가지 사건 - 태양이 솟는 것과 사람이 걸어가는 것 - 은 일어나고 있으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중 한가지 - 태양이 솟는 것 - 가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부터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다른 한 가지 - 사람이 걸어가는 것 - 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신에게 있어 현재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의심할 여지없지 일어나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의 발생은 스스로의 필연성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며 또 어떤 것들의 발생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신의 예지와 관련하여 고찰될 때에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것들 자체로서 고찰될 때에는 필연성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이성과 관련하여 고찰될 때에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그 자체로 고찰될 때에는 개별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어떤 행위의 계획된 길을 변경시키는 것이 나의 능력 안에 있다면 나는 신의 섭리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예지하고 있는 것들을 내가 바꿔 놓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너는 너의 계획을 변경시킬 수 있다. 그러나 네가 계획을 변경시키든 변경시키지 않든 네가 어떤 식으로 계획을 변경시키든, 항상 현재이며 실제인 섭리는 그것을 다 보고 있으므로 너는 신의 예지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아무리 다양한 행동들을 취한다 하더라도 현존하여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너는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내가 나의 계획을 재조정한 결과로써 신의 지식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의 소망들을 바꿈에 따라 신의 지식 또한 바뀌지 않겠습니까?'라고.
그것은 그렇지 않다. 미래의 모든 일들은 신의 고유한 인식 방법인 현재로 바뀌어 신의 시선에 의해 예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시선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떤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바뀌는 지식과 더불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봄으로써 그 불변의 상태에서 너의 변화들을 예견하고 알아채는 것이다.
신은 그러한 현재적 인식 상태와 모든 사물에 대한 통찰을 미래의 사물의 실현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접성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조금 전에 제기했던 이의, 즉 우리의 미래가 신의 인식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합당치 않다, 라고 함으로써 그 이의는 풀리게 된다.
모든 사물을 현재적 이해 안에서 포괄하는 이러한 인식 능력은 스스로 사물들에게 어떤 한계를 두었으며 그 이후에 오는 사건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의 의지의 자유는 침해 당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또 인간의 의지가 모든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법률이 보상과 처벌을 부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신은 예지를 가지고 있으며 높은 곳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관찰자이다. 그러므로 신의 통찰력의 현재적 영원성이 선한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주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려주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 행위들의 미래의 질(質)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희망이 헛되이 신에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들이 헛되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그것들이 올바른 것들이라면 효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악덕을 멀리하고 덕을 키워라. 너의 정신을 올바른 희망에까지 들어올리고 높은 곳을 향해 겸손한 기도를 올려라.
네가 자신에 대해 정직해지기를 원한다면 너에게는 커다란 필연성, 즉 선해져야 한다는 커다란 필연성이 부과되어 있으니 그 까닭은 네가 만물을 보고 계시는 한 심판관의 시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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