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크리츨리: 유럽 대륙철학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2


유럽 대륙철학 - 10점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이재만 옮김/교유서가


1. 지식과 지혜의 간극

2. 대륙철학의 기원들: 칸트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른 경로

3. 안경과 눈: 철학의 두 문화

4.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비판, 실천, 해방

5. 무엇을 할 것인가? 니힐리즘 대응법

6. 오해에 관한 사례연구: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7. 과학주의 대 몽매주의: 철학의 전통적인 곤경 피하기

8. 감히 알고자 하라: 이론의 고갈과 철학의 장래성

부록: 「독일 관념론의 가장 오래된 체계-계획」(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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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과 지혜의 간극

20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지혜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탐구할 주제는 철학일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가르치는 지혜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고대 철학자들이 보기에, 철학이 가르치는 지혜는 좋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느냐는 물음과 관련이 있었다. 대다수 고대 철학자들에게 좋은 삶은 곧 행복한 삶이기도 하다는 것은 공리나 마찬가지였다.


25 17세기 초반 수십 년의 잉글랜드와 프랑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적 세계 파악은 우리가 사물들을 보는 방식을 지배하며, (이 점이 더욱 중요할 텐데) 사물들을 어떻게 볼 것이라고 우리가 예상하는 방식까지 지배한다.


25 과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전문 철학자가 철학에 배정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지식/인식을 가리키는 희랍어 낱말 에피스테메 (episteme)를 상기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식론(epistemology)이 된다. 다시 말해 철학은 우리가 아는 바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 그리고 무엇 덕분에 그런 앎이 타당한지에 관한 논리적·방법론적 물음들과 압도적으로 관련이 있다.


30 요점을 되풀이해 말하자면, 고대 철학의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했다는 것, 또는 적어도 지식과 지혜를 통합하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고대 철학에 따르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어떠한가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삶에서 행위의 지혜로 이어질 것이었다.


30 근대 세계 들어 17세기부터 현재까지 과학의 놀라운 진보는 이 통일성을 깨뜨렸다.


32 내가 보기에 대륙철학이라 불리는 철학의 주된 호소력은 지식과 지혜, 철학적 진리와 실존적 의미를 통합하려고 적어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다는 데 있다.


35 이 책 전반에 걸친 나의 요지는 그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모든 철학함의 필요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대륙철학의 기원들: 칸트에서 독일 관념론에 이른 경로

40 대륙철학이란 무엇인가?

대륙철학은 철학의 역사에서 1780년대 칸트의 비판철학 출간부터 시작하는 200년의 기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대륙 철학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 운동들로 이어졌다.

1.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그 여파

(피히테, 셀링, 헤겔, 슐레겔과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쇼펜 하우어)

2. 형이상학 비판과 '의심의 대가들'[폴 리쾨르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가리켜 한 말━옮긴이]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베르크손)

3. 독일어권 현상학과 실존철학

(후설, 막스 셀러, 카를 야스퍼스, 하이데거)

4. 프랑스 현상학, 헤겔주의, 반헤겔주의

(코제브,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바타유, 보부아르)

5. 해석학

(딜타이, 가다머, 리쾨르)

6.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벤야민, 호르크 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7. 프랑스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라캉, 알튀세르),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들뢰즈), 포스트 모더니즘(리오타르, 보드리야르), 페미니즘(이리가 레, 크리스테바)


44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에 공통으로 속한 마지막 위대한 인물이자 두 철학의 이별을 알린 인물인 칸트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두 전통을 구별하는 두번째 방법이다. 우선, 후설이 아닌 칸트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두 가지 단순한 이유가 있다. 첫째, 20세기 대륙철학의 전개는 19 세기에 활동한 선배들, 특히 헤겔, 마르크스, 니체를 고려하지 않고는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 1930년대 이래 프랑스 철학의 경우가 그러한데,이 시기 프랑스 철학을 일련의 복귀라는 관점에서, 즉 헤겔로의 복귀, 니체로의 복귀, 마르크스로의 복귀라는 관점에서 기술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45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차이는 대부분 그야말로 칸트를 어떻게 읽는지, 그리고 칸트를 얼마나 많이 읽는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제1비판인 『순수 이성 비판』(1781)의 인식론적 쟁점들에만 몰두하는지, 아니면 제3비판인 『판단력 비판』(1790)에서 더욱 폭 넓은 체계를 정립하려는 야심에 주목하는지에 달려있다.


51 이성이 모든 것을 비판해야 한다면, 이성에 대한 메타비판도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런 메타비판이 있다 할지라도, 그 비판이 회의주의, 근본적이고도 전면적인 회의주의가 되지 않도록 과연 무엇이 예방할 것인가?


51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니힐리즘 개념에 근거하여 구별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니힐리즘은 18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엄청나게 중요한 분쟁에서 핵심 쟁점이었으며, 야코비는 두 분쟁━범신론 분쟁과 무신론 분쟁━에서 공히 중심에 있었다.


54 야코비의 요점은 첫째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합리주의의 패러다임이라는 것, 더욱이 합리주의를 일관되게 고수할 경우 무신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몽주의자 칸트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성은 종교적 믿음이나 도덕적 삶의 어떠한 기반이든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57 칸트는 이 비판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 고전적 형이상학의 사변적 대상들(신, 영혼)에 접근 할 수 있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물자체를 인식할 가능성과 자신이 자아의 '본체적' 근거라고 부른 것 ━ 현상으로 현전하지 않는 것 ━을 인식할 가능성을 둘 다 제거하기까지 했다. 야코비의 기본 테제는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을 변경하는 피히테의 작업이 객관도 주관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빈약한 자아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65 칸트 체계의 자기 파괴적인 이원론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이런 비판에 영향받지 않을 어떤 상위의 통일 원리였다. 피히테 철학과 독일 관념론은 이 물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66 통일 원리는 헤겔에게는 정신 개념이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 개념이었으며, 니체에게는 힘, 마르크스에게는 실천,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 하이데거에게는 존재였다. 이 목록은 늘어날 수 있다.


3. 안경과 눈: 철학의 두 문화

78 대륙철학은 본질적으로 전문적 자기기술이다. 다시 말해 대륙 철학은 철학자들과 철학과들이 자기네 연구와 강의를 조직하고 지적 충성을 나타내는 방 법이다.


84 밀이 보기에 벤담은 오래된 학설이든 두루 받아들이는 의견이든 "그것이 참인가?"라고 묻는 반면에 콜리지는"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따라서 '대륙 철학'은 의미와 관련되고 반대편의 벤담주의는 진리와 관련된다.


86 사회적 격변의 강력한 적으로서 전통을 지키려는 쪽은 '콜리지주의적 대륙철학'이고, 사회적 변화와 진보의 친구로서 전통을 파괴하려는 쪽은 벤담이다. 우리는 두 전통 또는 경향의 차이에 관해 거꾸로 생각하곤 한다.


91 요약하자면, 나는 대륙철학에 관한 두 가지 역사적 주장을 했다. 대륙철학은 전문적 자기기술이자 문화적 특징이다. 전문적 자기기술로서의 대륙철학은 이 분과를 전문화하는 데 필요한━그러나 아마도 일시적으로 필요한━악이다. 문화적 특징으로서의 대륙철학은 적어도 밀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2 밀의 더 깊은 함의는, 사태의 철학적·문화적 진리는 그것이 어떠한 진리든 간에 한쪽을 선택하고 그리하여 부분을 전체로 오인해서는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헤겔의 말대로 진리는 전체이며, 전체는 그 체계적 운동과 역사적 전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98 툴민은 두 문화가 있는 이유는 근대성의 출발점이 둘이기 때문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편다. 하나는 인문주의적 출발점이요 다른 하나는 합리주의적 출발점이다. 우리가 데카르트의 이름을 으레 합리주의적 출발점과 연관짓는다면, 17세기 초기에 시작된 과학적 근대성 때문에 인문주의적 근대성이 가려지고 심지어 왜곡된다는 것이 툴민의 주장이다.


4. 철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비판, 실천, 해방

127 후설이 '위기'라고 부르는 이 상황은 과학의 이론적 태도가 모든 존재자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게 될 때 발생한다.


127 하이데거에게 파괴란 존재론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과거를 파괴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긍정적인 경향들을 찾아내고 그가 말한 전통의 '해로운 선입견'에 맞서는 방법이다. 파괴는 전통의 산물이며, 이는 반복 또는 되찾음 과정을 통해, 즉 하이데거가 말한 반복을 통해 만들고 빚어내는 무언가를 뜻한다.


129 대륙 전통 철학의 시금석은 실천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는게 세계에서 유한한 자아로서 역사와 문화에 묻어 들어가 있는 우리 삶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현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는 해방적 요구로, 철학·예술·사고·정치의 변혁적 실천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도록 철학을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실천이라는 시금석이다.


130 대체로 보아 대륙 전통에서 철학은 현재를 비판하고 현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반성적 자각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위기를 부르주아의 속물 근성에 물든 세계에서 신앙의 위기로 표현하든(키르케고르), 유럽 학문의 위기(후설), 인간과 학의 위기(푸코), 니힐리즘의 위기(니체), 존재의 망각의 위기(하이데거),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마르크스), 도구적 이성의 헤게모니와 자연 지배의 위기(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로 표현하든 다른 어떤 위기로 표현하든 말이다.


130 철학자━후설 특유의 표현에 따르면 '인류의 공무원' ━의 책무는 위기를 생산하는 것, 전통을 고사시키는 퇴적물의 느린 축적 과정을 역사적 비판의 재 활성화라는 이름으로 어지럽히는 것이며, 그럴 때 철학자의 지평은 해방된 생활 세계일 것이다. 대륙 전통 철학은 해방을 지향한다. 철학자에게 진짜 위기는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5. 무엇을 할 것인가? 니힐리즘 대응법

138 러시아적 맥락에서 니힐리즘의 문제틀은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치, 엄청난 영향을 끼친 체르니솁스키의 1863년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명확히 표현된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40 니체는 최고 가치들이 비판을 통해 탈가치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야코비나 투르게네프의 논점에 해당할 것이다. 오히려 니체는 최고가 치들이 스스로를 탈가치화하는 일이 그것들의 전개 과정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41 니힐리즘은 의미의 질서의 붕괴다. 그렇게 되면 칸트 이전 형이상학에서 가치의 초월론적 원천으로 상정했던 모든 것이 무효가 되고 공허해지고, 삶의 의미를 걸어 둘 인식론적 갈고리가 사라진다. 삶의 의미를 옹호하는 모든 초월론적 주장들은 그저 가치들로 격하되고 그 가치들은 믿기 어렵게 되어 니체가 말한 '가치 전환'이나 '재평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150 철학적 근대성의 문제는 이제껏 말해온 대로 계몽주의의 가치들이 일상생활을 파악하는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점차 해체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목격한 마당에 어떻게 니힐리즘이라는 문제에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륙 철학자들은 하버마스와 데리다처럼 이 문제에 대응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식으로든 로티처럼 이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철학적 용어들을 거부하는 식으로든, 이 문제로 몇 번이고 되돌아온다.


6. 오해에 관한 사례연구: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163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의 역사', 플라톤에서 시작해 플라톤주의를 도치한 니체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기본 물음에 내놓은 일련의 답변들이다. 그러므로 존재 물음을 급진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형이상학을 의문시하고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이데거와 카르나프 둘 다 '형이상학 극복'이라는 상투적 표현을 사용한다 해도,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저마다 현저히 다르다.


7. 과학주의 대 몽매주의: 철학의 전통적인 곤경 피하기

190 대륙 전통 철학의 태반이 근대 세계의 위기 의식에 대응하려 하고 또 해방을 위해 현재에 대한 비판 의식을 내놓으려 한다는 사실은 대륙철학과 대부분의 분석철학의 가장 현저하고도 극적인 차이, 즉 대륙 철학의 반과학주의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0 대륙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에서 과학주의를 채택할 경우 철학의 비판적·해방적 기능을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과학적 세계 파악과 니 체가 말한 니힐리즘이 공모할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193 내가 보기에 철학에서 피해야 할 양극은 과학주의와 몽매주의다. 카르나프와 하이데거의 분쟁에서 확연히 드러난 대로, 이 양극은 분석철학과 대륙철학 각각에 내재하는 극히 해로운 경향을 반영한다.


200 중요한 점은 현상학적 반과학주의가 반과학적 몽매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몽매주의는 여러모로 과학주의를 뒤집거나 곡해하는 과학주의의 대항개념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지적 치안 활동에 참여할 만큼 주의한다면, 몽매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몽매주의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인과적 설명을 거부하고 그런 설명을 다른 인과적 이야기, 더 고차원 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이야기로 대체하는 태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몽매주의는 과학적 형식의 설명을 과학주의적 설명으로 여기고 그 설명을 반과학적이고 신비적이지만 그럼에도 인과적인 설명으로 대체한다.


8. 감히 알고자 하라: 이론의 고갈과 철학의 장래성

213 나는 이 이야기에서 유럽 대륙 쪽 상황을 약술하기 위해 칸트 이후 이성의 위기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 위기가 촉발한 니힐리즘의 문제들을 기술했다. 바라건대 이 이야기가 더욱 분명해지고 좀체 사라지지 않는 분파주의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는 철학적으로 전진하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깊은 지적 관심을 불러일으켜온 쟁점들, 이를테면 지식과 지혜의 간극과 관련된 쟁점들을 직시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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