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8. 28.
아웃사이더 - 콜린 윌슨 지음/범우사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머릿말 / 아웃사이더 그후 20년
제1장 맹인의 나라
제2장 무가치한 세계
제3장 낭만적 아웃사이더
제4장 자제의 시도
제5장 고뇌의 역
제6장 동일성의 물음
제7장 거룩한 합일
제8장 비전의 아웃사이더
제9장 회로에서의 탈출
자전적 후기
27 아웃사이더란 언뜻 보면 사회문제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52 로깡땡은 <지옥>의 주인공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의식의 활동 영역은 거의 자기 방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벽속의 인간보다도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숙히 들어가 있다. 그의 태도는 웰즈와 같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으며, "인간이란 헛된 정열이다"고 하는 말도 <궁지에 몰린 마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여기에는 엘리의 시 <공허한 인간>에서와 같은 철저한 부정이 있다. 우리들은 '텅 빈 인간', 바로 사르뜨르가 말한 속물인 것이다. 로깡땡은 <맹인의 나라>의 주인공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만이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며, 만약 모든 사람이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되면 인생은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52 "그러나,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있다." 그에게 자신의 무의미함을 알려주고 마침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고 믿게 만든 문명 세계 속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가에 대한 권리가 그에게 남아 있다고 느낀다. 무엇에 대한 권리일까? 자유? 이 자유라는 말은 잘못 사용되고 있다. 이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옥>을 조사해 보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사르뜨르와 바르뷔스는,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너무 어리석은 나머지 그것을 알 수 없을 뿐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렇다면 아웃사이더가 갖는, 떼어낼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무엇에 대한 권리일까?
83 인간의 약함을 깊이 명상하면 최후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사고', 헤밍웨이의 소위 "잃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에 도달한다. 즉 단념과 규율의 논리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84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순간에 살며, 의지력을 함부로 발휘하지 않는다. 또 의지를 움직였다가도 곧 그 노력을 단념하든지, 아니면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무언인가 다른 것에 주의를 돌려버린다. 어떤 강렬한 의식 상태를 잠깐 보았지만, 자기로서는 어떻게 하여도 그것을 꽉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자각한 시인이 심한 절망을 느끼는 것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사르뜨르나 까뮈나 헤밍웨이가 암시하고 엘리엇이나 올더스 헉슬리가 분명하게 제시한 이 주제는, "어떻게하면 인간이 강하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환경의 노예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데로 귀착한다.
99 혼돈을 직시해야만 한다. 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동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이것이 헤세의 결론이다. 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타락이 필요한 것이며, 인간은 선악과를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116 <황야의 이리>에서 헤세는 아웃사이더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즉 자기가 비참한 것은 자기가 자칫하면 타협하게 되어 온건하고 문명적인 부르주아의 영역을 취하려 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며, 자기의 구제는 열광과 냉정, 정신과 자연이라는 양극단의 하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다음 단계, 즉 양자 중 어느 한쪽으로 나아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자연 쪽을 택한다. 그러나 자기실현의 경지에는 조금도 근접하지 못했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은 정신을 택하나 그 역시 실패를 의식하면서 죽어간다. 헤세가 실패한 것은 아마도 그가 자기실현이란 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 같다.
117 그는 인간이 미지근한 일상 범사의 차원에 생존하는 데에 깊은 불만을 품으며, 예술가가 창조시에 느끼는 법열의 강렬함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길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낭만적인 낙관론이라고 일소에 부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아웃사이더 공통의 이상의 하나로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123 근대 작가 중에서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선에서 발전을 계속해온 사람으로서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은 엘리엇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다. 즉 어느 한도를 넘으면 아웃사이더 문제는 단순한 사고의 영역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것이다.
139 로렌스는 이상할 정도로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 의지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가 실패한 원인은 자기 안에 움직이고 있는 막연한 욕구를 분석하고 그것에 의식의 조명을 맞출 수 없었다는 점에 있다.
153 고흐에게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점은, 사고에 지친 성질이 완전히 배척되어 있고 그 결과 로렌스가 말하는 감각에 의한 직접적인 지각이 실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긍정 대 부정은 이미 소멸되었으며, 감각이 깨어난 지금 인간의 불행을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라하겠다. 분명히 불행은 존재한다. 그러나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인간이 생각한 바 그 어떤한 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감각에 의한 직접적 미각뿐이다.
154 테오에게 그가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패배는 불가피하며 인생이란 먹이가 달린 함정이다"는 말이었는데, 이 말은 먹이를 다시 물어야 할 필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살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65 니진스끼의 인생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장은 "내 처를 비롯한 전인류의 인생은 죽음이다"고 한 말이다.
179 이 장의 제목은 윌리엄 제임스가 그의 저서 <종교적 체험의 제상>에서 쓴 표현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최근 심리학에선... 인간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필요한 소음이나 압력의 자극의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 일반에 대하여 역(閾)이라는 말을 흔히 쓰고 있다. 높은 역을 갖는 자는 낮은 역을 갖는 자가 잠을 깰 만한 소음 가운데서도 잠잘 수가 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역, 또는 두려움의 역, 혹은 불행의 역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어떤 자의 의식은 손쉽게 그것을 넘을 수 있으나 다른 자의 경우엔 그것이 너무 높아 의식이 미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낙관적이어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평소 불행의 경계선 양지 쪽에 살며, 비관적이고 우울한 심정의 소유자는 그 반대편, 어둠과 근심의 세계에 산다. 괴로움의 역 한쪽 편에 사는 자는 다른 편에 살고 있는 자와 다른 종류의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ㅇ낳을까?
187 어떤한 신념을 갖든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는 운명과 무관하다는 이 공포는 곧 실존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근거다. 동시에 어떠한 신의 배려나 숙명을 믿는 것이 모든 종교와 대부분의 철학의 필수적인 기본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다.
188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결국 자유의 문제다. 그가 궁극적인 긍정과 궁긍적인 부정에 전년하였다는 사실은 절대적 자유 혹은 절대적 속박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189 아웃사이더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기를 언제나 목표로 삼고 있다고 결론짓고, 이 목표를 지향하는 세 가지 수련을 열거했다. 그 때 거기에 나타난 의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아웃사이더임을 바라지 않고 또한 평범한 사회인이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이 되고자 할까?
194 제임스 역시 이 장에서 인용한 구술의 마지막에서 이와 같은 문제를 자문하고 있다. 즉 한 번 태어났을 뿐인 인간이 옳으냐, 두 번 태어난 인간이 옳으냐?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냐, 혹은 아웃사이더냐?
공정한 방관자의 태도를 버리지 않고 우리는 이 논제에 대하여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겐 체험 범위와 전망의 여러 측명에서 병적인 정신 상태 쪽이 보다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악에서 눈을 돌리고 선의 빛 가운데에서 단조로이 사는 것은,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 한 더할 나위 없는 생활방법이다. 그러나 우울이 찾아들면 그것은 쉽게 허물어져버린다. 설사 우울을 모르는 인간이 있다 해도 건강한 정신 상태란 철학의 교의로서 부적당한 것임에 틀림없다.
236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공헌을 개괄할 수 있다. 그는 육체 - 감정 - 지능의 등식을 해명하고 우리가 제 4장에서 도달하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웃사이더란 가장(假裝)한 예언자 -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가장한 예정자 - 며, 그 구제의 길은 자기의 가장 심원한 목적을 찾아내어 거기에 정신(挺身)함에 있음을 느끼고 표현하였다. 사르뜨르적인 참가의 교리, 즉 어떤한 목적이건 그것이 애타적인 것인 한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교리에 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예언자의 목적을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의 귀에 입을 대고 "잠을 깨라"고 고함치고 싶은 욕구라하겠다. 그러나 어디서, 무엇을 위해 잠을 깨라는 말일까? 모든 인간이 잠자고 있다는 말인가?
239 어느 지점에 이르면 아웃사이더는 번연의 질문을 내뱉는다. 즉 "구제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하고, 이에 대한 해답이 스트로드의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라면 구제의 가망은 없으며 목을 찔러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글나 다행히 스트로드의 해답은 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이라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아직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아 "무엇으로부터 구제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은 곧 다음의 의문 "구제될 수 있는 최학의 것은 무엇이냐?" 다시 말하면 "궁극적인 부정의 최악의 형태는 무엇이냐?"하는 의문을 잉태시키기 때문이다.
253 우리의 목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지하 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까마라조프의 형제들>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군대 문학에 있어서 아웃사이더 문제를 취급한 최초의 대작이다. 이는 헤세의 <황야의 이리>아 함께 아웃사이더 문제를 해명해주는 작품으로서 중요하다.
265 연민이야말로 라스꼴리니스코프의 파멸의 원인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 잡은 생각은 불행으 결코 그치지 않으리라고 하는 고흐의 생각이었으며, 이 생각이 소설에 끝까지 일관해 있다.
269 즉 언제까지나 아이로 있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혼돈과 직면해야 한다. 암흑의 세계로 내려가야 한다.
294 인류에 대한 대심문괌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갚은 연민의 정이다. 아웃사이더는 인간의 비참함의 깊이를 알 수 있겠으나, 맹목적인 생활을 하는 가엾은 벌레들에 대해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자기를 감싸고 있는 속박과 비참을 알게 할 것인가? 아니 눈을 뜨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가?
298 인간은 이반의 차원에 살 수도 있고 조시만의 차원에 살 수도 있다. 혹은 그 양자보다 하층인 부르주아의 차원에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상한 대낮의 세계를 떠나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는 무인 지대에 들어가며, 그때 인간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다.
301 두뇌만은 동키호테와 같은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으나, 인간 자체, 전인격은 정해진 운명을 따라 전진할 수밖에 없다.
314 아웃사이더는 대부분의 인간을 실패자로 보고 있다. 아니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인간은 남김없이 실패자라 생가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반형의 인간은 "자기를 실패자라 보지 않게 살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전지능을 다 쏟는다. 이와 같이 높은 수준을 마련한 결과 날마다 이 문제에 마음이 사로잡혀 티끌만한 여가도 없어져 박차가 마음을 치갈기는 듯한 끊임없는 긴장감과 절박감에 신경이 조각조각나 버린다. 그는 기준을 찾아 더듬는다. 그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저 사람을 실패자라고 부르자면 성공이란 무엇인가를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
317 토마스 마은 도스또옙스끼 이상으로 그 입장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결법은 "이해하기 위해 믿어라"는 것이었다.
317 자기의 온몸과 마음이 어떠한 감정적 충족을 희구하며 확고한 현실과 접촉하고자 고민하면서도, 한편 이성의 움직임은 거기서 떠나 그러한 감정적 충족의 가능성을 비웃고 충족의 근접을 방해한다.
320 가장 위대한 인간이란 아웃사이더의 문제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 어떨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전력으로 부딪치는 인간이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는 "어찌하여 대부분의 인간은 실패자일까? 아웃사이더는 어찌하여 몰락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내뱉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320 이제까지의 결론을 간결하게 요약해 보기로 하자.
아웃사이더는 아웃사이더이기를 그치려 한다.
그는 균현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지각을 날카롭고 생생하게 하고자 한다(고흐, 로렌스, 헤밍웨이)
인간의 영혼과 그 작용을 이해하고자 한다(바르뷔스와 미짜 까라마조프)
번거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힘에의 의지보다 훙실한 생명을 희구하는 의지에 사로잡힐 것을 바란다.
322 비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
351 마르크스주의자와 낭망주의적 아웃사이더의 진정한 차이는 전자가 천국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려 하는 데 대해 후자는 지구를 천상에까지 끌어올릴 것을 꿈꾸는 점에 있는 것이며 아웃사이더의 눈에는 지상에서 천국을 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절망적인 근시며 인간 심리의 잏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보이는 것이다.
431 아웃사이더의 문제는 결국 '바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관에 귀착되는데, 이 비관론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내가 주장해 온 바이다. 이 비관론을 취하는 한 "인간은 죽은 자기를 디딤돌로 하여 보다 높은 것으로 향상한다"고 하는 휴머니즘의 이상은 사라지고, 철학자가 자기를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세계를 알려고 노력하여도 무의미하다는 철학적 비판이 성립한다. 비관주의의 입장은, '객관철학'이라는 이상을 쌓아올리는 자는 단순한 사상가는 아니고 사상가와 시인과 행동인을 자기 안에 결집한 인간들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이 말할 수 있는 첫번 째 질문은 "우주란 어떤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아니면 안 된다. 즉 철학의 목표는 지성적으로 논리가 정연한 '체계'가 아니라 개인의 구제다. 그리고 나는 이신조가 보편적으로 종교적임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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