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 01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세계의 근본문제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 "책과 세계" 강의노트 1 | 2004

인용된 책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칼 폴라니: 사람의 살림살이

운명의 아트레우스 家(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이 책은 서양문명의 바탕이 되는 몇몇 고전들을 골라내어 서양 사상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압축되어있다. 190*120mm 의 크기에 96쪽으로 쓰여진, 한손에 잡히는 아주 얇은 분량의 책이다.


그야말로 압축되어진 책이기에 그것을 좀더 쉽게, 그리고 자세하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의 부탁이 있었고 저자는 이를 흔쾌히 응해주었다. 이로써 네 차례에 걸친 강의가 무료로 제공되게 되었다. 


수강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태껏 공부해온 성과와 왜 이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가에 대한 답을 미리 제출함으로써 수강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유식한가가 아니라, 알려고 얼마나 노력하는가가 아닐까. 내가 이번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용기 덕분이었다. 


아래는 『책과 세계』를 집필한 강유원 철학박사의, 네 차례에 걸친 특강을 필사한 강의노트이다. 같이 수강한 신기철님의 필사를 바탕으로 하여 약간 덧붙이고 문장을 다듬은 것으로 99%는 신기철님의 노고임을 밝인다.


제 1 강  :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세계의 근본문제  2004. 7. 6. 

제 2 강  :  인간과 사회  2004. 7. 13.

제 3 강  :  매체,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2004. 7. 20.

제 4 강  :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2004. 7. 27.



제 1 강  :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세계의 근본문제  2004. 7. 6.


이 책은 고전 해설서가 아니라 이전에 쓴 [서양문명의기반]의 압축판이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서양 사상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구조를 가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우선 책 날개를 보자. 


>>나는 이 책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진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혀지고 버려지기 위해 쓰여진 셈이다.


>>관심사와 연구계획

인간의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탐색하고 정리하여, 가능하다면 그 오고감과 산물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철학은 객관세계를 잊은 채 공상에 몰두하고, 자연과학은 인간을 내버려둔 채 물신숭배에 빠져, 그 둘이 도저히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다. 


위의 책 날개 부분은 책을 다 쓴 후에 쓰여졌다. [책과 세계]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 글 안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 책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라는 문장에는 이 책에 담긴 글들의 구조를 암시하는 부분이다. 사실 이 책의 내용들은 어디선가 서로를 가리키고 있다. 챕터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내용도 앞에서 언급된 부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이 있다. 


"인간의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탐색하고 정리"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주관적 정신의 표출이 텍스트라면 객관적 세계는 콘텍스트이며 그 접점을 인터페이스라고 할 때,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인 것이다.


이쯤에서 목차를 한번 보자.


03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06 세계의 근본 문제

16 인간과 사회

35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

40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50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67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

71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92 에필로그 


'세계의 근본문제'에 속하는 세 챕터, '쓸쓸한 세계 : 『길가메시 서사시』, 텍스트의 힘 : 모세 5경, 정지된 영원함 : 『사자의 서』'는 4대 문명 발생지 중에서 중국과 인도가 빠져 있고 그 대신에 히브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때는 原 문명시대(신석기 농업혁명의 직접적 성과 위에 성립된 문명)이다. 이 세 챕터를 읽으면 세계의 근본문제는 다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류사의 근본 문제는 이미 이 시기에 탐구되었던 것이다.


'인간과 사회' 부분은 고대 문명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세 챕터 모두가 원고지 20매씩의 분량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원고지 20매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 세 챕터 말고도 몇 개 더 있다. '물음이 없는 단순한 세상' 안의 '단순한 실천 : 『갈리아 전기』', '지상과 천국, 두 세계의 갈등' 안의 '세속의 재발견 :『군주론』', 그리고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에 해당하는 네 개의 챕터들이 그것이다. 왜 로마를 고대 세계에 넣지 않았는지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다.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Ⅰ)'는 고대와 그 이후의 시기를 나누어 주는 시대 구분용 챕터이다. 역사적 시대 구분이 아니라 사상사적 시대 구분인 것이다.

로마와 중세가 한 묶음이 되는데, 이 때는 아무 생각이 없는 시대에 속한다. 반성적 사유, 즉 사상이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매체 : 또 다른 컨텍스트(Ⅱ)'는 근대와 그 이전 시대를 나누기 위한 시대 구분용 챕터이다.

'세속 세계의 폭력적 완결'은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고통스러운 세계이다.


챕터의 제목들을 훑어보자. 

첫번째 챕터는 쓸쓸한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마지막 챕터는 쓰라린 세계이다. '쓰라린'이 더 강한 느낌을 준다. 살이 찢어진다. 길가메시가 슬퍼하는 것은 쓸쓸한 거다.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 속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쓰라린 세계이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 챕터와 마지막 챕터가 서로 상응한다. 이런 방식을 몇 개의 챕터에 사용하였다. 챕터 제목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텍스트에 의한 전통의 전복 : 『백과전서』'는 '텍스트의 힘 : 모세 5경'에 상응한다. 

텍스트가 가진 힘을 알아보자면 모세5경이 가장 강한 예가 되겠지만 그 다음으로 강한 힘이 백과전서이다. 

'영웅의 운명 : 『일리아스』'와 '환상적 불명성 : 『신국』'이 내용상으로 대응된다. '단순한 실천 : 『갈리아전기』'와 '차가운 현실 법칙 : 『리바이어던』이 대응된다. 그리고 '행복한 시대의 징후 : 『우정론』'과 '행복한 날들 : 『국부론』도 상응한다.


'세속 세계의 폭력적 완결'에 속한 챕터들은 앞에 나오는 모든 챕터들을 집약한 것이다. 내용으로도 그렇고 제목으로도 그렇다. 원문명시대의 즉자적 정신이 고대문명기의 대자적 정신을 거쳐, 현실에 완전히 파고든 근대에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선행하는 시대가 나중에 나오는 시대에 다 집약되어 있다는 일종의 역사철학적인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순환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펴서 읽어도 무방하다.


에필로그 끝 문장을 읽고 나면 이 책을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애매해 진다. 그러나 서문 첫 문장으로 가면 에필로그 끝 문장과 서문의 첫 문장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문과 에필로그를 하나로 작성한 뒤 적절한 분량으로 잘라서 앞뒤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이 책이 일종의 순환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 책을 두 달 동안 썼는데, 그 중 목차 작업에만 소요된 시간이 2주였다. 자기 완결적인 텍스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제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겠다.


03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p3)에서부터 다음장의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기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p4)"까지는 인문학적 대상으로서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냐하는 저자(나)의 관점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글을 쓸 때에는 반드시 인간 존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해 놓고 글의 첫 머리에 그것을 밝혀야 한다. 어떤 책을 읽든 그 저자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떤 차원에서 보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압축시킨다. 아주 명쾌하게 인간을 돈 되는 놈, 돈 안 되는 놈, 이렇게 이분법으로 갈라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칼 마르크스에 대해 공부한다면 우선 마르크스가 인간을 보는 관점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소외개념 등을 인문학적으로 명료하게 밝힌 다음에야 비로소 마르크스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문 첫머리는 책을 읽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 책은 어떤 사람이 읽는가?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이것이 인간을 보는 저자의 관점인 것이다. 


인간을 이렇게 규정했으면 다음으로는, 이 책이 책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책은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책, 즉 넓은 의미로의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나 그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 그 자체가 일정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세계와 동떨어진 신비주의적인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고,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인간의 불행"인 것이다.


이제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컨텍스트의 산물일지도 모를 텍스트들 스스로가 말하게 하고, 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컨텍스트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이 책의 서술방식이다.


그러면 이 책에 선택된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선정방식은 뭘까? "임의로 골라"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서양 사상사를 원고지 300매로 정리하면서 선택된 것들이다.


이번 강의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개념사이다. 

이를테면 postmodern이라는 것이 있다. postmodern에 대해 알려면 modern부터 알아야 한다. postmodern은 중세, 근대와 같은 구분이 아니라 modern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른 분류이다. 

리오따르 하버마스 논쟁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였다. 포스트모던의 개념이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책상머리에서 나온 개념이 아닌 것이다. 모던이라는 개념에는 적어도 500년 이상의 역사가 담겨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편집한 {역사적 기본개념들}을 읽어보면 왜 이런 사전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코젤렉처럼 개념사를 전공한 사람은 그 개념이 형성된 콘텍스트를 많이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콘텍스트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한 순간에 무식해지곤 한다. 혹은 야후사전에서 찾은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기도 한다. 역사적인 콘텍스트를 배제한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면 먼저 추체험(追體驗, 미루어 겪어봄)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다. 추체험과 가장 연관된 개념은 이해(Verstehen)이다.

딜타이(Dilthey)의 해석학(Hermeneutik) 저작에서 보면, "우리는 무엇을 파악함에 있어 모든 마음의 힘을 함께 작동시키고 그 마음의 힘을 대상 속으로 몰입시킴으로써 이해한다"는 말이 있다. 이 때 이해의 주체는 마음이다. 이처럼 뭔가를 이해할 때 마음을 이해의 주체로 삼으면 이는 심리주의적인 것일 뿐, social context를 배제한 것이다. 

이렇듯 체험을 즉물적으로 이해한 입장은 생심리주의(生心理主義)이다. 그 기원이 생철학에서 온 것이든 니체에서 온 것이든지간에 한 마디로 욕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곧바로 딜타이는 생심리주의에서 객관적 정신주의로 전환해 간다. 객관적인 방향, 즉 객관적인 의미구조, 객관적인 작품, 역사와 역사의 문화적 가치, 그것들의 구조와 법칙성을 파악하는 방향으로 전향한다. 마음만 가지고는 이해에 한계가 있다. 만일 이해가 절대적 차원까지 가면 종교가 되는 것인데, 적어도 객관적인 차원으로 올라서야만 진정 뭔가를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 정신주의로 갔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추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체험의 구체적 사례를 [에필로그]에서 언급했다.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를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p92-93)다는 문장에서 "몸에 넣어보"는 것은 생심리주의의 차원이며, "빠져나와보"는 것은 바로 객관적 정신의 차원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추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정신주의에서 텍스트를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텍스트를 즉자적으로 보는 것(an sich)이고, 그런 다음에는 그 텍스트에서 빠져나와 그 텍스트가 속한 시대, 당대성 속에서 보는 것이다. 텍스트를 볼 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책과 세계]는 이러한 추체험의 방법으로 텍스트를 보려는 시도이다.


그러면 요즘 잘 거론되지 않는 딜타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한국 사람들은 what's new를 좋아한다. 그러니 인터넷이 발달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상황이 이러하니 딜타이를 거론하는게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딜타이의 문제 상황은 결코 무심코 보아 넘길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딜타이는 생철학(生哲學)이라고 하는 시대적 조류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이전 시대, 이른바 칸트, 헤겔의 독일 관념론 시대의 끝물에서 생철학의 강한 도전에 맞서 그것에 대한 변증론을 폈던 사람이다. 

*이성주의(헤겔) -> 생철학(니체) -> 객관적 정신(딜타이)


여기서 딜타이의 글 하나를 인용해 보겠다. {Entwuerfe zur Kritik der historischen Vernunft 역사적 이성비판을 위하여} 라는 논문이다.

"생의 현실성에 속박되고 규정된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것의 이해를 통해서 해방된다." 

'생의 현실성'은 즉자적 인간, 즉 책 안 읽는 인간, 욕망에 매어있는 인간이다. '예술'은 헤겔이 말하는 절대적 정신의 영역에 속한다. '역사'는 객관적 정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워 지려면 즉자적 상태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쾌락을 좇으면 쾌락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다른 영역에서 이를 극복할 무언가를 구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생의 현실성이며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생의 현실성이라는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고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객관적 정신은 정확하게 뭘 말하는가? Nicolai Hartmann을 한번 거론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읽히지 않지만 학문 그 자체에서 보면 중요한 사람이다. 저서중 [존재론의 정초 Zur Grundlegung der Ontologie]가 있다. (형설출판사에서 [존재학 원론]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객관적 정신은 "정신세계가 심리생활(Seelen leben) 상부에 형성하는 특수한 존재영역"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아주 중요한 것이니 반드시 외워야 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그 중에서 심리 생활의 층위가 있는데, 그것이 젤레Seele(영혼 psyche)이다. 여기에서 정신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신Geist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의 정신이며, 인간의 정신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mind가 아니라 spirit인 것이다. 

가령 민족정신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spirit이다. 정신현상학은 마음을 탐구하는 심리철학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가장 저급한 수준부터 신을 탐구하는 종교까지 정신의 모든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다. 


정신의 여러 측면 중 Seele, 즉 심리생활의 상부를 형성하고 있는 특수한 존재 영역이 바로 객관적 정신이다. Seele가 social context를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 객관적 정신이 형성되고, 그것이 법과 제도로 구체화 된다. 그런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객관적 정신에 관한 논의이다. 가령 헤겔이 말하는 "역사는 정신의 진보이다"라고 할 때의 정신은 mind의 진보가 아니라 객관적 정신의 영역이 진보한다는 의미이다. '역사의 진보란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특수한 존재영역에서의 법과 제도의 발전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에서 논의를 할 때에는 상대가 심리 생활의 영역에서 얘기를 하는지 객관적 생활의 영역에서 얘기를 하는지 그 출발점부터 따져봐야 한다. 가령 홉스철학의 출발점은 인간을 physical body로 생각하여 인간을 동물과 동격으로 본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리바이어던 국가는 폭력적인 국가로 귀결되는 것이다. 철학은 제일전제를 안고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인데 폭력 말고는 처치할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철학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 책이 인간 존재의 어떤 층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칸트의 도덕 철학 - "저 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의 도덕률" - 에 나타난 인간은 욕망적 존재가 아니라 감성이 빠진 이성적 존재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는 인간은 공동체, 즉 폴리스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살고있는 상황은 무시하고 달랑 사상만 떼어와서 이렇듯 출발점이 다른 칸트의 윤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같은 차원에 두고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텍스트를 보든 그 텍스트가 인간 존재의 어떤 층위에서 출발하는지를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한다. 또한 대상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심리생활의 구조, 정신의 구조, 객관적 세계의 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처럼 진리파악은 존재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서 함께 가는 것이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과거가 오늘이며, 오늘이 과거일지도 모르고, 내일은 아예 없을 수도 있으며, 저 아래 어느 차원에는 부동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p5)

이것은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나가는 일상적인 방법이다. Popper가 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놓여있는 부동의 시간에서 과거를 들여다본다.(背進的) 


변증법Dialektik에는 관념 변증법, 실재 변증법, 유물 변증법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러나 사실 헤겔의 관념 변증법,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 등은 소련 스탈린 시대의 교과서에 나온 것으로 원래는 없던 용어이다. 변증법적 운동을 전개시켜 나가는 주체에 따라 정신적인 것이면 관념 변증법이고, 유물론적 변증법은 통속적인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체가 실재Readitat에서 나온 것이면 실재 변증법이다. 

변증법의 종류에는 전진적 변증법과 배진적 변증법이 있다. 헤겔이 변증법을 구상하게 된 핵심적 계기는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변증법적 논리를 개발했다. 전진적 변증법은 시행착오를 전제로 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나가는 실험적 방법을 말한다. 

문명사를 보든 텍스트를 보든 사람들은 심리생활의 관점이든 객관적 관점이든 어떤 고정적 점을 두고 볼 수 밖에 없다.


● 여담

자본주의 논리에서 공동체가 붕괴되는 요인은 돈 때문이다. 이 강의에서 강의료를 안받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본주의 논리에 따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계량화 시킨다. 지식이 계량화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연구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는 부류도 있지만 이 경우 연구소를 유지하려면 자본주의 논리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연구소에서 고민하는 것과 연구소가 돌아가는 방식은 전혀 따로 돌아간다. 목적과 수단이 따로 노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 논리를 개발하면서 개발비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만드는거다. 지역화폐라도 도입해야 할 판이다.



06 세계의 근본 문제 


쓸쓸한 세계 : 『길가메시 서사시』


이 본문 텍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한 부분과 저자의 Kommentar 부분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 챕터에서는 그것이 반반씩을 차지한다.


"사람의 삶은 고되다. 고됨은 여가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생은 고됨(work)과 여가(leisure), 이 두 가지로 되어 있다. work(askolia)와 leisure(skol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따온 용어이다. 여가라는 건 그저 마시고 노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에서 사람의 인생은 askolia(일)와 skole로 나뉘어 있었다. skole에서 school, schola, Schule, ecole 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내가 처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읽어서 askolia, skole를 안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한번 서술해겠다.

한나 아렌트의 책 [인간의 조건(condition), 한길사]을 읽었는데, 이 책에 vita activa(active life 활동적 삶)라는 개념이 나온다. 어떤 책을 읽든 각주가 중요하기 때문에 각주에 나오는 개념 설명은 꼭 읽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각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나온 구절을 인용했다. 


"all of life can be divided into work and leisure, war and peace, and something done have moral worth, while others are merely necessary and useful."(1333 a30 - 33) 

인간의 모든 삶은 일과 여가로 나눌 수 있고, 전쟁과 평화로 나눌 수 있고,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것과 필요하고 유용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good이라는 단어는 moral thing을 일컫기도 하고 necessary and useful thing 을 지칭하기도 한다. 

근대 자본주의시스템에서는 moral thing과 necessary and useful을 동일시 한다. 깊게 고민할 필요 없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이 시스템의 생명력이 강한지도 모르겠다.


skole는 askolia를 하지 않는 것이다. askolia = labor (노동)

학적으로 work(Werk)는 고통스럽지 않은 일을 말하며, labor (Arbeit)는 고통스러운 일을 말한다.

worker는 대상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전유한 자이다.

예술활동을 하는 것은 work이지만 예술작품을 팔면 arbeit가 된다.


labor(arbeit)에서 벗어나는 것이 skole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예를 거느린 사람들은 necessary and useful에서 벗어나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 성립하려면 국가제도나 헌법이 아니라 necessary and useful에 빠지지 않을 단단한 중산층이 있어야 한다. necessary and useful에 빠지지 않아야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가 주는 교훈이다. 경제활동의 압박에서 벗어났을 때 도덕적인 삶도 정치적인 삶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뭘 그리 신경써서 따져가며 사는가 하는 소리가 가속화 할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정치제도고 자본주의는 경제시스템인데 경제시스템이 왜 정치제도를 무너뜨리는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경제시스템이 사람들로 하여금 necessary and useful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가 급속도로 탈 민주화되는 이유는 이러한 경제적 피폐함에 있다. 


덧붙여 설명해 보겠다. 칼 폴라니, [사람의 살림살이], 풀빛.

이 책에서 폴라니는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는 즉, socially embeded 경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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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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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 정신 : politeia / oik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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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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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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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정신의 영역을 세분화하면 oikos(경제)와 politeia(정치)의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politeia는 oikos의 상부에 구축되는 것이므로 oikos가 해결이 되어야 politeia가 구축 가능하다. 즉 칼 폴라니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를 경제가 "socially embedded"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대는 경제를 위해 정치를 어떻게 하자고 하지만, 고대 그리스는 정치가 경제를 이끌어 가는 시스템이었다. 즉 necessary and useful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반드시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기본적으로 이런 이항들을 가지고 인간과 객관적 정신 세계를 설명한다. 객관적 사회 현실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 같은 경우는 다르다. 그의 도덕률의 성립 근거는 인간 자체에 두고 있다. 인간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과는 무관한 도덕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객관적 현실 없이는 논의가 불가능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제지간이라 기본적 정신이 똑같으리라 생각하지만 둘은 전혀 다르다. 순수하게 이념적인 차원만을 다룬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살아가는 객관적 사회적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플라톤은 극단적인 추상화의 단계까지 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노동자는 신체건강을 해치는 모든 직업, 여가와 정신의 교양을 희생하며 보수를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오디세우스에 보면 아킬레우스가 오디세우스에게 '인간의 최악의 생활환경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야하는 생활환경이다'라는 말을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러한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고됨과 여가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인류역사는 늘 고됨의 역사였다. 텍스트만을 봐서는 인류의 역사를 알 수 없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수메르 지역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책들은 상인들이 남긴 기록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지역은 '초생달(메소포다미아)'이라 불린다....... 이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서구의 전통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명들], [시공디스커버리-책의 역사]를 참조했다.


길가메시 서사시가 수메르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이다. 수메르는 예나 지금이나 분쟁의 땅인데 이런 곳에서 비일상적인 얘기, 극히 일부분이 발견된 점토판에 이런 얘기가 써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놀라운 고고학적인 성과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은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다. 그는 그리스 영웅보다 1500년 이상을 앞선 영웅이다. 길가메시에 나오는 영웅, 그리스 영웅은 모두 난폭자이자 약탈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천성적으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환경이 극단적인 세력충돌로 인해 죽기 아니면 살기인 폭력적 시대였기 때문이다.


배포된 자료 <운명의 아트레우스 가>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족보가 있다. 아가멤논이 속한 집안이다. 완전히 패륜과 범죄로 점철된 집안이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열린책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남은 인생동안 여러분은 문학의 수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검열에도 홀연히 맞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오클라호마 침례파 여신도 단체(극보수적인 단체)에서 어떤 책이나 연극에서 사악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항의해 온다면, 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이라고 알려져 왔던 몇몇 작품들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가 다룬 이 사악한 악당들의 행위에 기초해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살인, 모친살해, 근친상간, 배신, 부친살해.. 이 계보도의 인물들에 의지하였던 위대한 작가들,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유피디데스... 그들은 우리들에게 길을 열어준 작가들입니다."


고전은 당대를 가장 래디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고전이다. 그것에는 미케네 문명의 생활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길가메시 서사시보다는 상인들의 점토판이 고전인 셈이다. 다만 그 난폭한 세상에서, 영생을 얻고자 하나 좌절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런 영웅 조차도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제이며, 이 책의 위대성이다.


길가메시는 불멸을 찾았다. 아킬레우스(영웅의 운명)는 불멸이 불가능함을 알고 명예를 찾았다. 죽어야 하는 인간이 얻어야 하는 것은 명예인 것이다. 그러다가 개인의 힘으로는 명예를 얻지 못함을 깨달은 사람들은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끄집어낸 나라가 로마(단순한 실천)다. 그리고 현대에서 로마적 군국주의의 전통을 가장 잘 이용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렇게 보면 길가메시 서사시의 모티브가 일리아드, 로마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명예가 부로 치환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려고들 하는 것이다. 


"길가메시여 그대가 찾는 것을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인간,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인간의 유한함,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이것이 존재론(有와 無), 인간론(삶과 죽음)의 첫 번째 문제이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며, 그래서 길가메시의 세계는 쓸쓸한 세계이다. 또한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세계의 근본문제이다.



텍스트의 힘: 모세 5경


모세 5경에 이르러 영원한 존재 신이 나온다. 야훼는 복합적 성격의 신이다.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에서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라는 논문을 참조하면 된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탐욕이다. 공포는 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요, 탐욕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즐거움에 의해 생겨난다."(p.11)

공포와 탐욕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심리도 아닌 physical한 것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을 원초적이라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제1차원이다. 아무리 고상한 것도 내 몸에서 안 받아 주면 안 된다.


구약이 보여주는 히브리 민족의 종교는 아주 야만적인 종교이다. 야훼는 인간이 자기에게 순응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인다.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신이 할 짓이 아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지만 그것도 성의 주민을 모두 칼로 죽인 후에야 들어갈 수 있다. 야훼는 하나의 군신, 전쟁신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 민족은 고도의 정신력을 발휘한다. 

공포와 탐욕이라는 것이 절대적 존재와 연결될 때 인간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메조키스트적인 모습이 여기에 나타난다. 

길가메시가 영원한 삶이라고 하는 철학적 주제를 제기했다면 모세5경은 인간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논의하고 그러한 인간과 실존적으로 맞닿아 있는 초월적 절대자인 신을 이야기한다. 이 역시 근본문제이다.


공포와 탐욕이라는 주제를 더 보자.

"그(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며, 야비하고 잔인하며, 짧다. 인간은 본성상 탐욕적이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삶이 비참해지는 것이다."(p.74)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적, 경쟁적 인간관이다. 부르주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관이다. 이것을 모세5경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는 생명운동에 도움이 되는게 기쁨이고 방해가 되는게 고통이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가 홉스의 인간학이다. 도덕이 없는 necessary and useful 밖에 없는 자유주의적인 윤리관이다. 홉스의 이러한 인간관은 이렇듯 오랜 전통이 있는 것이다.


모세 5경의 핵심은 텍스트의 힘이다. 

요한복음 첫 머리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시작한다. "야훼는 말로써 만물을 만들어낸다. 야훼의 전지전능함, 잔인함의 원천은 바로 '말', 텍스트, 로고스인 것이다"(p.11)

말씀logos가 곧 하느님이고, 또한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빛이 있어라하면 빛이 생긴다. 이처럼 히브리의 신은 말로써 세상을 만든다. 말 만으로 無에서 有가 창조되는 것이다. 


서양문명의 흐름을 두 가지로 꼽는데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전통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결합할 수가 없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헬레니즘은 有에서 有를 만들어내는 시스템(nihil ex nihilo)이기 때문이다.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질료가 있어야 그로부터 현실태가 된다. 반면 히브리철학은 무에서 유를 만든다. 형이상학 자체가 다르니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융합될 수 없는 것이다.


모세5경이 보여주는 또 다른 테마는 '非可示的 것의 진리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는 현상/본질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게 현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게 본질이며 곧 진리라는 서양철학적 전통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공포와 탐욕에 의해 사는 상태와 결합하여 야훼와 같은 신이 탄생한 것이다. 진리는 확인할 수 없다. 안보이니까 진리가 되어 버린다. 인간의 실존과 비가시적 진리가 결합되어 야훼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층위로 이루어진 삶을 산다.


절대적 정신 세계(예술,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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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정신 세계(사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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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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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생활


광신도들은 육체생활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사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심리생활과 객관적 정신 세계에 걸쳐서 산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까지 올라가야 할 것인가?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은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대상을 취급하는 능력이다. '가장 탁월하게'에 포인트가 있다. 철학하는 사람은 가장 탁월해야 하고 대상을 볼 때도 가장 탁월한 위치에서 보아야한다. 심리생활이나 육체생활의 차원에서 보면 안된다.


인간을 의지로 환원시키는 니체같은 경우는 인간을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본 것이 아니다. 심리생활의 차원에서 인간을 보고 탐구하면 심리학이고, 육체생활의 차원에서 보고 탐구하면 킨제이 보고서다. 

스콜라 철학은 좀 다르다. 즉자적으로 종교를 믿으면서도 탁월한 학적 성과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이징가는 중세시대가 히스테리 시대라 했다. 육체적 생활의 시대면서 동시에 신에 대한 고도의 사변적 논의(스콜라 철학)가 벌어진 시대였으니.


그러면 플라톤은 사물을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취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물론 플라톤을 읽어야 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박홍규의 『형이상학 강의2』를 읽으면 된다. 이렇게 고전을 잘 주해한 책들을 읽은 다음에 익숙해지면 고전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지적으로 탁월해지려면 감각에서 떠나야 한다. soma(신체)에서 벗어나 고양되어야 한다. 그렇게해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간다. 이 과정을 추상화(abstrahieren)라고 한다. 감각과 육체에서 벗어나 비가시적 진리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진리인지 사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육체에서 벗어나고 감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물리적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학이다. 이런 과정으로 사유를 하여 성과물을 내놓는 것이 학적 결과물인 것이다. necessary &useful이 아니라 abstrahieren(추상화)을 해서 내놓는 것이 학이다.


이런 세계로 가서 비가시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순수주의이다. 그런 차원에서야 도덕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직관주의, 순수주의적 도덕론이다. 순수추상의 세계에서 도덕을 성립시키는 사람들이 Platon, Kant이다. 인식론에서 말하는 진리와 윤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이 한 차원에 놓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존재론, 진리론, 윤리론이 별개의 분과가 아니라 같이 움직이는 쌍들인 것이다. 이것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홉스는 원인과 원인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인과론적으로 따지는 것이 철학이라 했다. 이는 soma 차원의 철학이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인간론은 폭력적 인간이고, 그가 내세우는 국가 역시 같은 차원에 있다. 

반면 객관적 정신 차원에서 철학하는 이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내놓는다. 가령 헤겔의 인륜(Sittlichkeit)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칸트의 Moralitaet(도덕)와는 차원이 다르다. 칸트는 soma를 벗어난, 순수주의 차원에 있다.


각각의 철학자를 공부할 때 이 사람이 철학을 무엇으로 보느냐를 따져 묻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다룬 영역. 그들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객관적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심리생활을 주로 따지는가 등을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 

어떤 책이든 저자가 어떤 차원에서 그 문제를 보고 있느냐를 먼저 알아야한다. 


200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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