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 02 인간과 사회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 "책과 세계" 강의노트 2 | 2004

인용된 책들:

헤겔: 정신 현상학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W. K. C. 거스리: 희랍철학입문

F.M.콘퍼드: 종교에서 철학으로

피에르 레베크: 그리스의 문명의 탄생(시공디스커버리총서)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2



제 2 강  :  인간과 사회  2004. 7. 13.


이소룡의 절권도를 아는가. 그는 영춘권부터 시작하여 한 20년 정도 몸을 단련했다. 

이렇듯 이소룡의 절권도가 오랜 기간의 기초 체력 단련으로부터 나왔듯이 우리가 듣는 강의도 그저 듣기만 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강의를 듣고 "이게 맞는 것 같애"하는 정도에서 끝내버리면 딱 거기서 끝이다. 그건 강의를 소비하는 일이다. 이소룡 영화를 보고 고양이 울음소리 밖에 흉내내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강의를 들었으면 관련된 책을 사서 읽고 자기가 직접 써봐야한다. 남이 필사해논 글을 읽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프린트 한 후에 본인이 직접 그것을 손으로 써봐야 한다.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강의를 재구성하여 그것이 맞는 것인지 선생에게 확인을 받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강의 내용이 자기 몸뚱이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체화되어야 비로소 그것이 '내 것'이 된다. 머리부터 손 끝까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자기가 들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의 손 끝으로 표현해내기는 훨씬 힘들다. 자기 몸에 배어서 철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가 그렇게 힘들다는 소리다.



지난 시간에 인간의 육체생활, 심리생활, 객관적 정신, 절대적 정신에 대해 얘기했다. 인식주관이건 인식대상이건 모든 것을 고려해서 파악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방법론적 전체주의'이다. 이를테면 사람을 보려면 띠엄띠엄 보지 말고 그 사람 전체를 다 봐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러한 방법이 나름의 학문적 위치를 갖게 된 것은 헤겔에 의해서였다. 


헤겔 정신 현상학 서문에 나와있는 내용을 한번 보자.


"Das Wahre ist das Ganze. Das Ganze aber ist nur das durch seine Entwicklung sich vollendende Wesen. Es ist von dem absoluten zu sagen, daβ es wesentlich Resultat, daβ es erst am Ende das ist, was es in Wahrheit ist; und hierin eben besteht seine Natur, Wirkliches, Subjekt, oder Sichselbstwerden zu sein."

진리는 전체이다. 그러나 전체는 자신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된 본질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과라는 것, 그것은 종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리에 있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 바로 절대적인 것의 본성은 현실적인 것, 주체 또는 자기형성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Hegel, Phanomenologie des Geistes)


"진리는 전체이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한 문구다. 우리가 어떤 사태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그 사태가 생겨난 때부터 끝날 때까지, 밑바닥부터 맨 위까지 전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전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전체란 무엇인가? "전체는 자신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된 본질일 뿐이다." 본질이라는 것이 그 시초부터 시작하여 전개해서 완료시킬때까지 그 과정 전체가 진리다. 

플라톤의 진리는 이와 다르다. 그는 운동, 육체, 감각, soma를 버려야 진리라고 했다. 이같은 존재철학의 입장은 헤겔의 생성철학과는 상이하다.


* Sein(존재)와 Werden(생성)

서양철학의 궁극적 실재, 절대적 진리가 어떤 모습을 갖느냐에 따라 Sein(자인)의 철학이 있고 Werden(베르벤)의 철학이 있다. 

플라톤의 경우는 감각을 벗어나 Soma를 버린 상태 (abstrahieren추상화), 즉 운동이 빠져나간 상태를 진리라고 보는 불변의 존재(Sein)의 철학이다.


이와는 달리 Hegel은, 본질이 있긴 있는데 이것이 자신을 전개(Entwicklung, development) 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인 것, 즉 절대적 진리는 본질적으로 성과(Resultat, result)라는 것이다. 즉 최종적으로 드러난 결과물이다. 그 성과 안에는 반드시 그 결과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고인의 관뚜껑을 닫을 때 한 마디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시체가 모양이 좋네" 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일생은 이러이러했다"는 식으로 묘비명epitaph을 쓴다. 이는 그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의 일생을 본질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생 전체를 압축한 것으로 그 사람의 진리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생성된 진리이다. 종국에 가서야 비로소 진리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의 본성은 현실적인것, 구체화된것, 객관과 주관이 서로 작용한 주체 또는 자기 형성이라는 것, 이것을 헤겔은 진리로 본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 것은 방법론적 전체주의다. 어느 한 순간의 단면만을 진리로 보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전체를 죽 살펴보는 것이 진리이다. 어떤 대상이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 전체를 Hegel은 변증법(Dialektik)으로 보았다. 사람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을 우리는 총체성(Totalität)이라고 부른다. 총체성은 단순한 Allheit(전체,전부)와 다르다. 총체성은 그 모든 것을 다 보는 것이다. 이 총체성을 학문의 목적이자 방법으로 삼은 사람 중의 하나가 게오르그 루카치이다. 루카치를 이른바 헤겔리안이라고들 말한다. 헤겔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헤겔리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헤겔의 주요한 방법론을 자기의 학적 방법론으로 삼아서 직접 해보는 사람이 헤겔리안이다. 오늘날 현대철학의 사조들은 거대담론이라는 이유를 들어 총체성을 부정하곤 한다. 그러면 파편화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사람이 한 단면 만을 보고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듯 학문도 단면만 볼 수는 없다.


어떤 대상이든 층위가 있는데 그 층위를 따져가면서 봐야 한다. 이는 비단 학적인 얘기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여러 삶의 층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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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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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 국회의원으로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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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집단 : 그 구성원으로서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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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 심리, 가족 - 노무현을 사랑하는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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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적 : 먹고 자고 생리작용하는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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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발언을 했는데 그것이 단순히 '노무현 사랑'이라는 개인 심리상태에서 이를 표현하는 발언을 할 경우 두 층위사이에는 상위, 어긋남이 생긴다. 이를 한마디로 '추잡하다'고 한다.


우리가 'What are you?' 'Who are you?'를 물을 경우가 있다. What은 보편적 본질을 묻는 것이므로 똑같은 대답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Who는 다르다. function에 해당하는 것,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층위를 고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긋난다. 즉 자신의 층위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층위에 대한 '分'도 존재한다. 즉 '君君臣臣父父子子'에서 '君'은 '君'의 '分'을 갖는다. 즉 '君 다움'이다. 이것이 어긋날 경우 추잡한 짓이 된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객관적 정신 영역에서 function과 층위를 규정하는 요소로서, 그 사람 호칭과 먹고 사는 방식이 중요하다.


* 지식을 많이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공부하느냐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과 사회 (p16)


영웅의 운명 : 『일리아스』


우리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 미케네를 포함하는 - 그리스 시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일리아스]는 호메로스로 추정되는 서사시인의 작품이다. [일리아스]를 읽을 때 호메로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먼저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를 한번 생각해보자.


Homeros의 인간 이해

"초기 그리스의 조형예술에서의 인간 묘사 역시 인간의 실체적인 신체가 통일체로서가 아니라, 집합체로서 파악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의 고전기 예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 부분이 서로에게 관련을 맺고 있는 유기적이며 통일적인 신체로 묘사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호메로스적인 인간들은 후대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체를 '신체 자체'로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四肢의 총체로서 알고 있었던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호메로스는 거듭해서 민첩한 다리, 약동하는 무릎, 아주 건강한 팔을 몇 번이고 말하고 있는데..."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까치)


브루노 스넬의 [정신의 발견]은 반드시 사서 읽어야 할 2차 텍스트이다. 


"이도메네우스가 그(알카투스)의 몸을 다녀간 지켜주던 청동 갑옷을 창으로 찔렀다......"(p16) 

여기서 호메로스가 생각하는 '몸'에 대해 알아보자.


아이들조차도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팔과 몸을 잇는 선이 떨어져 있지 않게 그린다. 아이들에게는 통일된 전체로서의 신체와 신체의 각 부분이 동시에 움직여가는 것이다.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몸과 팔, 발을 따로 그렸다. 즉 이들에게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신체 개념이 없었다. 여기서 '몸'은 몸 전체가 아니라 토르소만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서도 피부만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테면 내가 누구의 몸을 창으로 찔렀을 때 이들은 몸이 찔렸다고 얘기하지 않고 허벅지가 찔렸다고 말했다.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 언어에 근거해서 호메로스를 이해해야 한다. 이는 호메로스를 그 자체로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몸'이라는 표현에서 그저 '아..몸이 찔렸나보다'가 아니라 몸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텍스트를 당대에 즉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호메로스는 '몸'을 그리스어 chros로 썼는데 이는 '피부'를 뜻한다.

그 당시에 그 언어가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보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호메로스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운명' 역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운명 moira'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선 Anaximandros의 구절을 하나 보자.


"사물들은 그들의 출생 연원인 그 사물들에로, 정해진 바에 따라 소멸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며, 그들의 불의에 대해 시간의 섭리에 따라 벌금을 문다."(Anaximandros)


'정해진 바'가 바로 '운명'이다. 질서 지워지고 각자의 장소에 배치된 것이 운명이다. 이들은 반드시 그 자리로 가야 한다. 여기서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서로 간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그들의 불의에 대해 시간의 섭리에 따라 벌금을 문다는 것이다. 사물들이 무슨 배상금을 물며, 불의를 저지른 다는게 뭔가 의아하다. 

만약 이 텍스트를 그 당시에 쓰여진 뜻으로 읽지 않고,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버리면 이상해진다. 예를 들어 일종의 '탈주적 방식'으로 해석해서 Anaximandros는 이 때부터 이미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Anaximandros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다. 이는 당대성으로 보아야 한다. 이 텍스트에서 불의라든가 배상금이라든가 하는 건 뭔가 의미가 있음에 틀림 없다. 이것을 알려면 우선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세계를 보는 태도를 알아야 한다. 이는 물활론으로 물질이 그것 자체로 활동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질 그 자체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적인 원리 - 이들은 이를 영혼이라고 불렀다 - 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Anaximandros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moira, 정해진 바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대체로 운명이라고 하면 '내가 몇 살 때 뭐하게 되고......' 등의 시간의 순서에 따르는 어떤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생각한 운명은 이와 다르다. moira와 가장 비슷한 영어 단어는 element이다. element는 기초, 요소, 원소, 원리, 영역 등 여러 뜻이 있다. moira와 가장 가까운 뜻은 '영역'이다. 생활은어로는 '나와바리'다. '나와바리'란 조폭이나 양아치가 관리하는 생활 영역을 말한다.


만약 A라는 사람이 의정부를 자기 나와바리로 가지고 있는데, K라는 사람이 의정부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선생이라면 K는 차를 운전해서 의정부에 갈 때면 A에게 일종의 통행세를 내야 한다. 이것이 Anaximandros 말로 얘기하자면 배상금을 무는 일이다.


4 element (4대 요소) 지수화풍이 있다. 지수화풍은 각각의 자신의 영역을 갖는다. 만일 수가 자신의 moira, 즉 정해진 바를 넘어서 다른 영역으로 가면 Anaximandros가 보기에 이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영원한 생명은 사람의 moira가 아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면 Nemesis(복수의 여신)가 나타난다. moira를 어긋내는 것은 불의이며, 이는 당연히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 

『종교에서 철학으로』(이화대학 출판부)에서 콘포드는 위처럼 설명한다.


거드리, 『희랍철학입문』(서광사) -- 희랍철학 공부하는데 좋은 텍스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부분에 대해 거드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진화론은 어떤 환상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고의 새벽을 위한 하나의 주목할만한 업적이었다"고 말했다. 이건 잘못된 해석이다. 그리스 철학을 합리주의만을 가지고 설명하려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운명moira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가령 대장, 부하1, 부하2...가 있다고 치자. 대장 메넬라오스의 지휘 아래 전투를 해서 전리품을 얻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대장은 부하 1,2....가 따온 적의 머리수, 즉 moira에 따라 전리품을 분배해 줬다. moira는 이처럼 분배에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목을 두 개만 따온 부하가 네 개 따온 부하처럼 행하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다.


분배는 그리스어로 nemein, 즉 나누어주다는 뜻이다. nemein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이 nemesis다. 똑바로 안하면 바로 복수한다는 것이다. nemein에서 나온 말이 nomos, 즉 법이다. moira가 nemein의 차원에 오면 justice(정의)가 된다. justice의 첫째 뜻은 다름 아닌 '제대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Aristoteles [정치학]에서 정의의 첫째 뜻이 바로 제대로 나눠 먹기다.


그럼 그리스는 왜 그리 제대로 나눠먹는 것에 신경을 썼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분배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농사는 혼자 지을 수 없고 여럿이 모여 서로 도우며 짓는다. 이는 축구와도 비슷하다. 누구 때문에 이기고 졌는지 알기 힘들다. 공을 먹으면 수비수들은 골키퍼 잘못이라 할 것이고 그러면 골키퍼는 수비수가 제대로 막지 못해서라고 미룰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배 타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다.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죽을 지 모른다. 뭔가가 생기면 그때그때 처와 자식에게 줘야 한다. 제 몫을 바로바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농사야 1년 되면 수확을 하지만 이들은 자기 것이 언제 생길지 모르는 상태다. 왜 서양인들이 그리 분배에 집착하는지, 음식을 먹을 때 조차 자기 그릇을 들고 덜어서 먹는지는 이들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합리성, 합리주의 rationalism에서 ratio는 라틴어로 '계산하다'이다. 깔끔하게 따지고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성이다. 이렇듯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보니 이를 nomos(법)로 만든 것이다. moira는 오늘날 champ(場)의 뜻으로도 쓰인다고 할 수 있다.


"항상 정태적인 moira는 힘이라기 보다는 체계로서, 부정적 측면으로 기울어... 한계를 설정하고 금지한다... nomos는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경향을 갖는다. 한 지역이나 영역의 고정된 경계를 함축하긴 하나, nomos는 항상 주어진 영역 내에서 허용되고 권유되는 정상적인 행위, 관습을 의미한다."(Conford, 『종교에서 철학으로』, 이화여대출판부)


nomos는 아테네 체제를 이해할 때 아주 중요하다. 아테네 시민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moira에 따라 살면 자기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이며 동시에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moira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다. nomos는 한 지역의 고정된 영역이기는 하나 정상적 행위, 관습을 의미한다. moira라는 정해진 바가 nomos로 바뀜에 따라 공동체, 사회철학적 의미로 바뀌게 된다. 이게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말하는 것이다. 

moira는 처음에는 종교적인 개념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는 인격신의 종교가 아니라 신비주의적 개념이었다. 종교적 개념인 moira가 누구나 정상적인 사람이면 머리를 굴려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인 nomos로 바뀐 것이다.


* 철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설득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이해할 수 없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숭구리 당당' 같은 주문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moira에서 nemesis가 올까 겁내는 사람들에게 nomos를 제시하는 것이 철학이다. 

moira든 nomos든 공통된 것은 '정해진 바'이다. 이는 필연성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지행합일이다. 이는 '진리를 알면 바로 실천하라'인데 여기서 진리가 정해진 바이다. 즉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moira와 nomos를 알고 nomos를 따라가면 recht(법칙에 따라 합당한)한 것이다.


『책과 세계』라는 이 책에서 일종의 nomos를 찾아보자. 어떤 문장은 단문, 어떤 문장은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일물일어(한 대상에 대해 한 단어만 쓴다)와 같은 원칙은 아니더라도 그 대상에 가장 합당하고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쓰는게 중요하다.


이제 名譽(time 티메), 德(arete), 善(agathos)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간 미케네의 영웅들은 암흑 시대에도 사람들의 입을 거쳐 명맥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일리아스』에서 자신들의 용맹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적 세계관과 인생관의 집약이다. 그들은 선악이 아닌 명예와 불명예로 움직인다."(p21)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란 것이 아니고 그가 원한 건 명예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 선악이 아닌 명예와 불명예로 움직인다. 그들은 시체에서 갑옷 떼어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명예로운 것이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덕(arete)'은 선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떤 것을 잘하는 탁월한 능력이었다...... 죽어야 하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불멸성은 명예뿐이기 때문이다."(p21-22)


아킬레우스는 탄식한다. "제가 요절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p.22)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moira를 인정한다. 그리하여 명예를 원하지만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명예조차 얻지를 못한다.


"arete와 agathos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을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있고, 수완(능력)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arete를 위해서 행하게 되는 경쟁의 보수는 고전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명예였다. 공동체는 개인에게 부과되고 있는 가치를 보증한다. 따라서 명예(time)는 도덕의식의 발달에서 arete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까치)


agathos는 도덕적 의미의 '선'이 아니다. 이익이 되는 것을 말한다. good 과 같은 의미이다. 이게 바로 합리주의다. 로마시대로 가면 이것이 의식으로 머물지 않고 제도화되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그리스, 로마에 기초한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한국 인구의 2/3는 서양적 의미의 근대 세계에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 아니다. 본격적 근대는 3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도 싸가지 중심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 완전히 서양화되지 못한다. 서양인들은 그리스때부터 이미 합리주의적인 사고, 행동을 해왔다. 

하버마스는 대화부재를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삶에 엄청나게 참견한다. 옆집 사는 사람 숟가락 수 까지 알 정도다. 서양인들과는 다른 것이다. 우린 인터넷 동호회의 커뮤니티가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지만 서양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moira 나눠먹기부터 생활화가 되어있다. 어쨌든 agathos는 호메로스시대부터 유용한, 소용, 수완 있는 의미로 쓰였다.


'저 사람은 철학공부에 arete가 있어.'라고 할때 이것은 철학공부를 잘 한다는 뜻, 맘이 곱다는 뜻은 없다. 이당시 이들은 사람의 신체를 따로따로 떼어내 생각했듯이 인간의 심정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명예였고 명예를 얻은 자가 영웅이다.


영웅이란 뭔가?

시공디스커버리 총서, 『그리스의 문명의 탄생』에 보면 영웅의 정의가 나와있다.

"영웅이란 낱말 크레타어에서 온 것인데... 영웅이란 자손이 정성껏 바치는 재산을 받아 무덤 너머까지 그의 권능을 행사하여 사후에도 생전에 다스리던 공동체를 보호해주는 위대한 인물을 말한다." 


영웅이 되려면 명예(time)를 얻어야 한다. 명예는 누가 주는가? 공동체에서 준다. arete, 즉 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명예가 먼저다. 명예가 있은 후에 arete로 간다. 그래서 도덕의식의 발달에서 arete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게 명예다. 즉 서양인의 도덕의식은 명예에서 왔고 이에 따라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같은 전통이 생겼다. 전쟁에서 죽으면 명예를 받은 서양인과 달리 동양에서는 대가 끊겨서 아니될 일이었다. 도덕을 바라보는 근본 구조가 다르다. 이들에게는 개인이 도를 닦아서 도덕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얻어야 덕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인들의 행동 동기는 뭔지 보자 .

1. 유용한 것, 이익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

2. 행복의 탐구 - 철학자들이 하는 것.

3. 자신의 공적을 통한 명망을 획득하는 것.

즉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거나 명예가 될 때 사람들은 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세 가지 종류의 인간의 삶을 얘기했다.

아테네 올림픽이 열릴 때 오늘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1. 상인 -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 

2. 운동선수 - 삶에 직접 뛰는 사람

3. 관객 - 관찰하면서 반성하는 사람 

여기서 상인은 agathos, 운동선수는 time 이다. 이 두 가지가 추상화되어 arete덕이 됐다. 관객은 theoria 관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theoria가 되는가. 운동을 해 보고 관객이 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소룡 흉내내며 고양이 울음 짓는 애와 다를 바 없다. 그리스인들은 실제로 관조만 한 게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맡은 일을 하면서 arete를 쌓고 그 후에 theoria를 했다. 그리스인들은 pragmata (눈 앞에 주어진 구체적인 것)주의자들이다. data와 같은 말이다. 이것을 먼저 생각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사람이 태어났을때부터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철학 즉 변증술을 익힐 단계가 된다. 플라톤이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 했어도 시대의 아들이다. 즉 자신의 시대를 뛰어 넘지 못한다. 

자신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철학을 해야 제대로 된 철학을 할 수 있다. 환상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agathos, time -> arete는 사실 동물 집단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에게 명예를 주어 영웅이라 칭하면 이는 moira -> nomos로의 이행에서와 같이 동물집단에서 공동체 사회로 넘어가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인식 :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 (p22)


사람은 동물적 차원에 있다가 객관적 세계로 나아가고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다. 세계사의 전개 단계도 그러하고 개인의 정신의 전개 과정도 그러하다. 그리스 비극은 철저한 자기 의식에서 나온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비극이 나올 수가 없다. 인간조차 사지를 떼어서 생각하던 시대인데 무슨 자기의식이 있겠는가. 

문제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이다. 비극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온 인간들을 자기의식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대표적이다. 오레스테스 3부작에 나오는 아가멤논은 호메로스 서사시와 다르지 않지 않은가? 다르다. 호메로스는 영웅들을 선과 덕, 명예의 관점에서 봤고 아이스킬로스는 전적으로 자신의식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호메로스 서사시 아무리 읽어보아도 '내 출생의 비밀을 밝혀내기를 꺼려서는 안돼."(p25)와 같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 즉 독백이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문제사적으로 볼때 비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요구될 때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비극 등장의 객관적 배경은 그리스가 이미 전쟁 불바다가 되어 있을 때이다. 박홍규 선생의 『형이상학 강의2』에 나오는 '플라톤과 전쟁'을 참조하면 좋다. 전쟁에 나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갈데 까지 가서 도대체 답을 못 내는 상황에서 비극이 나오는 것이다. 


갈 때까지 간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의 운명moira을 묻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면 갈때까지 간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공동체의 운명을 묻는 것이 플라톤의 국가론이다. 그래서 그리스 비극과 플라톤의 국가론은 공통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인문학의 관심 즉 인간과 사회에 대한 모든 탐구가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안티고네'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둘 다 파멸에 이를때까지 대결한다. 갈 데 까지 가는 것, 이게 radical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경연대회는 나흘간 진행되었는데 그걸 다보면 15편정도였다. 아마 나중에는 몽롱한 상태였을 것이다. 

비극의 특징은 자기파멸이다. 파멸을 예상하면서 그 길을 가는 것이 비극이다. 이렇게 갈때까지 간 상태에서 문제상황을 보는 것이다. 혈연공동체가 우선이냐 시민적 결사체가 우선이냐를 피말리면서 보는 것이다. 혈연공동체는 신이 정해준 것이고, 시민결사체(시민공동체가 아니다)는 인간이 정한 것으로 대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은 후자에 강조를 두었다. 그래서 로마가 가능했다. 노모스만 지킨다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식민지 인에게도 시민권을 준 것이다.


우리는 한 핏줄이라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면 많은 피가 섞였다. 이태원이라는 말이 어떻게 생겼는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게 겁탈 당한 여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는 梨泰院라고 썼는데 그것이 민망하다하여 지금은 異胎院이라고 한다. 우리와 유전자적으로 제일 가까운 민족이 일본이다.


플라톤은 영원한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속에서도 불변하는 것을 찾아보다가 『국가』를 썼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쓸쓸한 세계에 대한 처절한 반응이다. 모세5경은 신과 인간의 교섭의 역사이다. 호메로스 영웅 서사시, 그리스 비극 등은 공동체의 덕과 망가진 세계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렇듯 인문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이 다 나온다.

플라톤의 『플라톤과 전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피튀는 세계를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단순히 반영하는게 아니라 지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관조하여 순수주의로 올라선다. 

여기서 서양철학의 화해 하기 어려운 두 조류가 생겨난다. pragmata에 중점두고 moira지키면서 나눠먹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순수한 관조, 형이상학을 강조하는 순수주의가 동시에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가 '서양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근대로 들어가면 다시 언급을 하겠다. '인간과 사회'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다음 주에는 로마와 중세를 한꺼번에 묶어서 한다. 로마와 중세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별로 없다. 문제사적으로 별로 중요치 않다. 철학사가 없다. 철학자가 없는 시대는 행복한 시대다. 철학자가 없어지면 행복해지는 건지 행복하면 철학자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철학자가 없어야 행복한 시대이다.



* 다음 주 숙제 :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A4용지 한 장 분량의 레포트를 낸다.



200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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