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새로운 아틀란티스


새로운 아틀란티스 - 10점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김종갑 옮김/에코리브르


독자에게...5 

새로운 아틀란티스...9 

프랜시스 베이컨과 과학적 유토피아/김종갑...91





새로운 아틀란티스

31 대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학술원은 우리 왕국의 보배나 마찬가지입니다. 빛 기둥과 십자가를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던 그분이 갑자기 얼굴을 뱃바닥에 묻고서 쓰러졌습니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일어서면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우리 백성들에게 당신께서는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창조와 창조의 비밀을 이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이어지면서 인간이 신성한 기적과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좋은 예술작품을 분별하여 감상하며, 온갖 기만과 환상의 미혹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당신께서는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 백성들 앞에서 선언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광경은 틀림 없은 기적이며 당신의 섭리라는 사실을, 더욱이, 고결하며 훌륭한 목적을 위해서만 - 자신의 법칙은 또한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당신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책에서 배워 알고 있기에 우리는 당신에게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50 솔로몬 전당이라 불리는 학술원의 건립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있던 제도 가운데 가장 고귀한 기관은 우리 왕국의 등불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에 대해 연구하는 기관이지요.

 

72 우리 학술원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과 작용을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활동의 영역을 넓히며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86 이제 학술원 회원의 임무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신분을 감추고서 외국인의 이름을 가지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회원이 열두 명 있습니다.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는 발견이나 실험에 관한 자료와 책을 벤살렘으로 가져옵니다. 이들을 '빛의 상인'이라고 부르지요.

서적에 적힌 실험을 수집하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약탈자'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기계 기술에서 비롯된 결과물을 수집하며 인문학의 연구 결과, 또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 관행들을 수집하는 회원의 수가 세 명입니다. 이들을 '신비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새로운 분야를 실험하고 연구하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파이어니어' '광부'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앞서 언급한 회원들의 연구활동에 이름을 붙여 목록을 만들며, 이 연구활동으로부터 새로운 이론이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회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편찬자'라고 불립니다.

 

87 마지막으로 기존의 발견 결과를 다시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새로운 원리나 격언을 도출해내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자연의 해석자'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89 마지막으로, 우리는 벤살렘 왕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 방문합니다. 이때 유용한 발견이나 발명이 있으면 이것들을 책으로 출판해서 만인에게 알립니다. 또 우리는 질병이나 역병·유해한 동식물·기근·폭풍·지진·대홍수·혜성·계절에 따른 온도의 변화 등 다양한 자연 현상의 원인을 드러내어 규명하고, 이 재난들을 피하기 위해 백성들이 취해야 할 대책에 대해서 자문을 해줍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기서 배운 관습에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는 오른손을 내 머리에 올려놓고서 축복했다.

"나의 아들이여, 신이 그대를 축복하기를. 또 내가 그대에게 설명한 내용에 대해서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대는 이 내용을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세상의 다른 나라들도 계몽할지어다.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왕국인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느니라."

그는 나와 동료들을 위한 선물로, 2,000 다카트 금화에 상당하는 보물을 하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솔로몬 학술원 회원이 모습을 드러내는 행사마다 이처럼 푸짐한 하사품이 뒤따른다고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과학적 유토피아/김종갑

 

102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바탕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새로운 아틀란티스>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배경이 되어서 비로소 쓰여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앞서 베이컨의 생애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르네상스 정신과 지리상의 발견이 그것이다. 당시 이루어진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계의 지평선이 갑자기 확대되면서 느끼는 아찔한 지리적·문화적 현기증을 경험했던 것이다.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문화와 영토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유의 빗장을 활짝 열어놓는 구실을 했다. 더욱이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이런 확대되는 세계의 지평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진취적이며 도전적이었다.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움츠리는 사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낙관적으로 미래를 조망했던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호기심에 들떠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며 답사하고 싶어했다.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의 초상마저 발견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심리가 토머스 모어와 베이컨의 유토피아적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10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기 앞서 1516년에 출판된 모어의 <유토피아>와 병치해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교·대조되면서 두 저서의 차이와 특징이 두르러지게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법관이라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모어는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한 성직자였다. 그에게 지식이란 덕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설계한 유토피아는 무엇보다도 미덕의 유토피아이며,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유덕한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성직자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이상 사회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타고나 탁월한 재능과 기량에다 출세의 욕망에 박차를 가하면서 성공의 사다리를 꾸준히 밟아 올라 마침내 모어와 마찬가지로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베이컨에게 지식이란 힘이었다. 이 힘은 인간의 마음을 감화하며 움직이는 도덕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 세계를 좌지우지 엿가락 주무르듯이 지배하는 권력의 손길이다. 그래서 그에게 지식의 모델은 자연과학이며, 두말할 여지 없이 그의 유토피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도 과학자이다.

과학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유토피아를 설계했떤 베이컨은 <신기구>에서 자연과학의 위대한 성과로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을 꼽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사물의 모습을 바꾸며 세계의 상태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인쇄술은 글쓰기의 모습을, 화약은 전쟁의 모습을, 나침반은 항해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물질의 세계를 지배한다.

 

113 그러나 토머스 모어는 근대 과학의 눈부신 성과들이 쏟아져 나오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설혹 과학 혁명의 여파를 어느 정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기본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직자이면서도 인문학자였던 그의 시각은 언제나 내면으로 향해 있었다. 기술 문명의 진보나 물질 세계의 정복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던 듯이 보인다. 문제는 그것이 갖는 의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토론 주제는 '인간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지,' 또는 '행복의 요인은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기술 문명의 진보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는 행복이다.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고 정의롭게 배분되는 행복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그들의 눈에 물질적 풍요는 공허하거나 오히려 유해해 보인다. 자칫하면 물질은 불평등과 반목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인들은 금이나 은과 같은 보석을 하찮게 여긴다. 오히려 보석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보석에 탐닉하면 빈축을 산다.

 

115 이루헤아릴 수도 없는 과학의 결실을 헤아리느라 그는 숨이 막힐 지경인 것이다. 이렇듯 과학의 승리에 흥분해서 귀밑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학술원 회원의 얼굴을 모어의 유토피아인이 바라본다면 살며시 웃음을 띄우며 그것이 인간의 행복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지 반문할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벤살렘 왕국의 사람들은 온갖 보석을 치렁치렁 옷에 매달고서 유토피아를 방문한 외국의 사절들과 비슷하다.

 

120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에덴 동산과 흡사한 미래 세계의 청사진을 보여준다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타락 이후의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최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욕망이 무조건적으로 충족되는 벤살렘 왕국과 달리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욕망이 조건적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유토피아의 최대의 관심사는 욕망 충족의 조건, 달리 말해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행복의 기술 문제이다.

 

126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비판의 궤도가 아니라 희망의 궤도 위에 놓여 있다. 이 희망의 궤도에 실려서 그의 유토피아는 미래 과학 세계를 향해 질주한다. 베이컨과 동시대의 사람들은 이 과학의 청룡열차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127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꿈은 곧 현실이 된다. 유토피아라는 어휘에 깃듯 '없다' '좋다'의 모순은 과학의 힘으로 지양되는 것이다. '좋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과학이 알아서 인간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욕망은 노동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게다가 욕망의 대상이 한꺼번에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경제적으로 제어되며 윤리적으로 억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유토피아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서 노동을 해주는 데다가, 과학의 배양토로 기름진 땅에서 노동은 몇십 배, 아니 몇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 따라서 인간은 욕망을 관리하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다. 도깨비방망이가 그렇듯이 바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디스토피아로 다가온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