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6 방법서설 2


방법서설 - 10점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문예출판사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0829 27강 방법서설(1)

20130905 28강 방법서설(2)

20130912 29강 방법서설(3)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데카르트, 《성찰》

카를 뢰비트, 《헤겔에서 니체로》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적군파》

콜린윌슨, 《잔혹》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아주 평범한 사람들》


20130905 28강 방법서설(2)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1987년에 나왔다. 이 작품을 읽을 때 하루키가 쓴 감성소설로 보면 안된다. 일본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의 독자의 80%가 남성이었다. 하루키가 1949년생이고 1987년에 썼으니 40살 때쯤이다. 하루키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남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기 젊은 날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한국에는 90년대에 들어왔는데 한국에는 이걸 읽을 수 있는 남자가 없었다. 무슨 얘기인가하면 1949년생이니까 1969년에 대학을 다녔다. 이때가 일본의 전공투 세대인데 운동권 학생들이 나온다. 이들을 보고 와타나베가 참 유치하다고 말하는 지점이 있다. 한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40대인 사람은 이 세대가 없다. 이때 20대는 이 정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여성들만 읽은 것으로 소개가 되었는데 일본은 절대다수가 남성이었다.  당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너무 좋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두들 쓰레기 소설이라고 했으니. 같은 텍스트라 해도 하루키 작품이 세계적으로 읽히는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 같지만 독자들의 경험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미세해서 수용하는 양상이 굉장히 다르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방법서설》은 철학의 입문에 해당한다. 아마추어가 번역본을 읽는다 해도 배우지 않고 읽을 수 잇는 것은 헤겔은 《역사철학강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플라톤은 《향연》이나 초창기 대화편 정도이다. 《정치가》나 《티마이오스》 같은 것은 배워야 읽을 수 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와 《성찰》이 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텍스트이고, 동시에 데카르트와 플라톤을 이어주는 텍스트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으로 보면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한 계열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가 한 계열이다. 플라톤-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의 역사형이상학 이렇게 해서 5명의 형이상학자가 있다.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특수한 학문분야다 하면 5명의 형이상학을 배우면 된다. 인문과정에서 데카르트를 배운다 하면 《방법서설》이 적당한 텍스트가 된다. 책 제목을 보면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이렇게 되어있다.


143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방법에 관한 텍스트라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 methode, 즉 방법에 대한 것을 왜 따져묻는가를 생각해보겠다. 먼저 주체라는 말을 하는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종교개혁을 거쳐서 30년 전쟁쯤 오면 유럽 사람 전부가 다 모두가 기독교신자였고 신자로서 살았는데 이게 무너진다.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해서 종교가 과학에게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는가. 주체가 소멸된 상태에서 강력한 신앙이 요구되어서 완전히 터져버린 것.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사람들 머릿속에 신앙이라는 것이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점 의심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개신교와 가톨릭의 살육을 보고 종교가 콩가루였구나 생각하게 된다. 게다가 그냥 죽이지도 않는다. 악은 인간의 실체 속에 스며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칼로 찔러 죽여서는 악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불에 태워 죽인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사람들이 내가 그 동안 올바름, 진리라고 여겨왔던 것에 대해서 의심이 생긴 것.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 우주를 창조했고,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우리 삶의 목적도 설정이 되었고 신부님이 해주시는 데로 살면 깔끔하게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태를 보면서 사람들이 말 그대로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근대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적 질서에 따른 세계의 근본 목적인 신의 창조와 그 질서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그 의심이 선행되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놈은 아무도 없는데 왜 데카르트는 뻔한 얘기를 했을까. 처음에 하루키 얘기를 했는데 하루키가 일본에서 읽히는 방식과 우리나라에서 읽히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이 말도 17세기의 데카르트 시대에서는 어마어마했던 것. 이 시대에서 믿는 건 나중이고 일단 생각해보고 믿을 게요 라고 하면 혁명적이었던 것. 


철학사에서 또는 사상사에서 근대의 주체의 탄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주체가 탄생했으니까 지금 21세기 사는 우리는 근대적 주체다 라고 말하면 안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근대적 주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왜냐 신분제 질서 속에 살았기 때문.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신분이 삶을 규정한다. 의심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내가 도대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할 때에야 주체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서양 근대를 보면 300-40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서양사람들에게 의심하는 주체로서의 나, 근대적 주체라는 것이 엄격하게 확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근대사회가 들어서면서부터 예전에는 종교가 사람을 구속했는데 종교보다도 더 강력한 힘이 외부에서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근대국가. 그 근대국가가 우리 삶 전체를 규율한다. 그래서 다음 달에 읽을 '직업으로서의 정치' 강력한 힘을 가진 근대국가의 본질에 대해서 탐색해보는 것이다. 


주체가 등장했는데 신에서 벗어나니까 잠깐 의심의 시대가 있었다가 곧바로 국가가 우리의 삶을 일거수일투족 포획한다. 또 신에서 벗어난 줄 알았더니 과학이라는 게 있다. 자연과학이 사람을 도구화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을 벗어난 줄 알았더니 신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고 살짝 바꿔서 절대적 정신이니 또는 너의 의지의 준칙에 살라는 얘를 기한다. 사실 칸트의 도덕규칙 이런 것들은 신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근대적 주제를 확보한 줄 알았는데 확보하지도 못하고 자연과학이 억죄이고, 헤겔의 정대적 정신, 칸트, 그리고 독일 같은 경우는 가톨릭보다 루터주의가 더 엄격하다. 신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주체가 형성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그래서 화가 난 사람이 니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때는 데카르트부터 니체까지의 400년 정도 철학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는 기독교적인 의미의 신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이면서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명령과 질서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거대한 부정이다. 굉장히 강력한 부정과 그래서 니체는 여러분들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초인은 기존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던 것을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말하며,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거대한 부정이 바로 니체의 니힐이다.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볼 때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니힐이다. 허무주의가 아니라 절대 무 인데 그러한 절대 무라는 것은 인생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에게는 디폴트 값이 없다는 것. 절대 무로 내려갔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비워진 상태이고, 그것을 다시 채우겠다고 나아가는 사람이 초인이다. 


그래서 니체를 읽을 때에는 근대적 주체의 탄생부터 읽기 시작해야 한다. 니체가 무신론적 실존철학이다 하는데 이 무신론이 기독교적 신이라고 이해한다면 절반만 아는 것. 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선행하는 모든 철학적 사조를 가리킨다. 카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로》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말하는 헤겔은 특정한 역사단계에서 철학자 헤겔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근대철학의 전체가 헤겔에서 집약되었다 보고 근대철학의 해체와 니체로의 이행, 즉 포스트모던 철학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그러면 여기서 열심히 살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생겨난다.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산다고 해보자. 목적은 설정할 수가 없다. 살아봐야 아는 거니까. 목적이 없이 열심히 살면 노예다. 잠정적인 목적이라도 설정하고 실현해보고 해야 한다. 목적 없이 꾸준히 성실하게 이어지는 하루 하루의 과정,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은 인간의 삶의 의미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일본사람들. 일본사람들은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살았다. 봉건사회는 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진 체제.  쇼군 막부 체제와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근대화라는 것 자체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사실 이런 근대화는 근대화가 아니라 산업화, 국가화이다. 그렇게 해서 1955년에 이른바 55년체제. 보수주의 체제가 세팅이 된다. 그렇게 해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일본 근대사와 현대사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으쌰으쌰 하면서 뭔가 해보자고 한게 전공투 세대이다. 하루키의 젊은날. 그런데 《적군파》를 읽어보면 이것도 완전히 끝나버린다. 하루키 세대만이 그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뒤의 세대들은 이런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근대화 과정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과정에만 집중했는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 성과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과정을 끝없이 계속해야 한다면 그 한계가 있다. 리워드가 없으니 나가리되는 것. 사람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뭘 하다가 자살하는 것.


목적이 없어도 안되고 있어도 안되고 결국에는 목적과 과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왔다갔다 하면서 해야 삶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이게 그래서 근대인들은 자기가 목적을 세워야 한다. 유한자로서 내가 과정을 계속 축적시켜 가면서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고, 이 목적이 사실은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면 절대로 좌절하지 않고 다시 목적을 가설적으로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서 과정을 쌓아 올라가고 계속해서 삶 전체로서의 삶을 보면 목적이 있지만 사실은 목적을 향해서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국면에서 보면 목적을 잊은 듯이 과정에 미친듯이 몰두하는 삶. 서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 모순적인 것 같다. 목적이 있지만 확정되지 않은 목적인데 오늘 하루하루 쌓아 올려서 결국에는 뭔가 이르렀을 때 그게 목적이었음을 스스로 재검토해야하는 되는, 즉 목적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목적이어야 하는, 자기 목적적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과정으로서 성립시키는 목적. 이것을 추구해야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래서 결국 근대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니체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삶.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중세적인 삶의 방식으로 되될아 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오히려 중세보다 광신자들이 많고, 안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중독자들이 많고, 집단 대량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웃사이더》를 쓴 콜린윌슨의 책 중에 《잔혹》이라는 책이 있는데 인류역사에서 잔혹한 사건들만 모아둔 것. 그 잔혹한 사건들은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부터 대규모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물론 징기스칸 군대의 학살 이런 건 전쟁 중에 일어난 것이니 차치하자면 개인에 의한 잔혹한 사건은 다 근대 이후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근대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목적과 과정을 자기가 떠안아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고 괴롭고 불안한 상황에 있다. 그게 근대인의 삶. 그것을 자각해야 한다. 


데카르트 가 말한 근대 주체는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철석같이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철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방법서설》을 읽을 때는 의심에 관련된 부분들이 한 부분들일 테고, 디폴트 값을 비우는 단계가 있다가 그 다음에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 인가하는 부분이 있다. 이 두 가지가 다 방법이란 말이 걸쳐있다. 의심하는 방법과 확실성을 세우는 방법이 두 가지가 다 해당한다. 의심하고 확실성을 세우는 두 가지 단계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해봐야 한다. 그래야 사는 게 덜 힘들다. 


근대사람들은 자기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니 과정자체를 목적으로 변화시킨다. 과정의 완벽함과 깔끔함을 목적으로 삼아서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아주 잘 나타난게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근대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의 목적을 항상 생각해봐야하는데 선한 목적인지 계속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중세사회와는 다르게 종교가 해야할 일이 있는데 바로 선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불어넣을 수 있는 매트리스를 깔아줘야 한다. 철학은 너무 전문화 되어버렸고, 종교라고 하는 것이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근대적 주체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종교가 주체의 피로를 풀어주는 핫식스가 되어야 한다. 그게 종교의 일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해야할 일이 많아진 것.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데카르트도 신을 믿는 사람이었고, 굉장히 경건주의자였기 때문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예수가 나는 율법을 대신한다고 말했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이다. 사실 이슬람, 가톨릭 모두 율법의 종교이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을 없애러 왔다.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게 율법이 있는데 그 자리에 예수가 들어갔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예수가 있다. 목수의 아들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살았던, 민중들과 함께 고난을 같이했던 예수가 있다. 그 예수가 전부가 아니라 메시아로서 선포된 예수가 있다. 이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을 회복하려면 이 부분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리의 방황하는 주체에게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있어서 종교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주체에게 선한 목적이라고 하는 일견 판타지처럼 보이는 것을 계속해서 일깨워줘야 한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이 할 수 없는 일. 



그러면 이제 데카르트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고, 세우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두 가지의 규준을 가지고 《방법서설》을 읽어보겠다.


145 이 서설이 너무 길어 한 번에 읽을 수 없다면,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제1부에서는 제반 학문들이 다양하게 고찰되고 있다.


제1부에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제반 학문들, 즉 자기가 배웠던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배웠던 학문들을 나열하는데 어떤 과목은 재미없고, 어떤 과목은 재미있고 유용하고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 어떤 것이 여전히 의미있다고 하지를 체크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145 제 2부에서는 저자가 찾고 있는 방법의 주요한 규칙들이 고찰되고 있다.


데카르트 가 생각하기에 방법의 주요한 규칙들, 확실성을 위한 규칙이 되겠다. 


145 제 3부에서는 저자가 이 방법에서 끌어낸 몇몇 도덕 규칙이 제시되고 있다.


제 2부가 이론적인 원리라면 제 3부는 도덕규칙이다. 여기서 도덕이라는 번역된 단어에 유의해야 하는데 moral이다. 주저 없이 도덕이라고 번역되는데 주의를 해야 한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말에서 굉장히 무거운 것을 느낀다. 윤리 또는 도덕이라고 말을 하는데 우리는 사실 별로 구별하지 않고 쓴다. 그런데 moral라는 단어와 윤리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ethos는 거의 같은 뜻이다. ethos는 관습을 말한다. 즉, 도덕이라는 말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철석같이 지켜야 하는 도덕규칙 이런 의미가 아니다.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지상명령이 아니다. 독일어에서는 사용되는 단어와 불어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혼란이 있는데 알아두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독일어에서 Moralität라는 말은 도덕이라 옮기고, Sittlichkeit는 인륜, 관습이라고 번역한다. 이것이 칸트가 만들어 놓은 용법이다. Moralität라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하는 도덕 윤리의 의미하며, Sittlichkeit는 말은 희랍의 ethos, 즉 관습에 더 가깝다. 그런데 윤리라고 하는 것은 관습이 거대로 추상화되면 윤리가 되는것. 서양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도덕이라는 것이 없다. 성서에 나오는 것만이 시도 때도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계시이다. Moralität Sittlichkeit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에 대립되는 것이 신의 계시이다. 그런데 칸트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신의 말씀과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 하며 인간 안에서 거의 신적인 계시에 해당하는 부분을 떼서 Moralität라는 말을 썼다. 순수한 도덕명령이라 해서 신적인 명령의 성격을 가지는 것을 Moralität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를 읽을 때 moral이라 하면 지키면 좋은 훌륭한 소리를 듣는 관습·규칙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Moralität는 말이 칸트에서만 독자적으로 그런 의미로 쓰인다는 것에 유의하고, 칸트 이외에는 엄격하지 않다. 원래의 맥락에서는 도덕이든 윤리든 차이가 없다. 서양에서는 다 관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적인 명령은 사실 계시이고 성서의 부분이다. 


145 제 4부에서는 저자가 신 및 인간 정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 근거들, 즉 저자의 형이상학의 토대가 되는 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제 4부에서 데카르트가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하자면 신학이다. 데카르트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확실한 진리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을 버리지를 못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남겨놨다. 그래서 《방법서설》에도 형이상학 얘기가 있는 것. 그래서 4부는 읽지 않는다. 나중에 철학고전 강의를 할 때는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아리스토텔레스, 헤겔의 형이상학을 할 예정이다. 


145 제 5부에서는 저자가 탐구한 자연학적 문제들의 순서, 특히 심장의 운동 및 몇 가지 의학적 난제들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 영혼과 짐승의 영혼 간의 차이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다. 


심장의 운동 및 몇 가지 의학적 난제가 데카르트에서 중요한 부분인데 확실성을 세우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의존했던 것이 두 갈래이다. 하나가 신이고 하나가 자연과학. 특히나 데카르트 시대에 중요한 발견인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설이 여기서 설명된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확실한가에 대한 의심을 해보는데 확실성의 근거를 신과 자연과학에서 찾았다. 오늘날 이 둘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데카르트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윌리엄 하비는 데카르트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심장전문의에게도 중요한 역할.


145 제 6부에서는 자연에 대한 탐구를 더욱 진척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및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가 서술되고 있다.


제6부도 제5부에 이어지는 것.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의심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면서 근대적 주체가 되었고, 그런 주체가 확실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두가지 방향을 가졌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종래의 중세시대 신학과는 다른 방향을 띤다. 그래서 새로운 형이상학. 플라토닉한 부분이 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기독교 이전의 형이상학. 그래서 데카르트와 플라톤 이 초월론적 형이상학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가 존재론이고, 헤겔이 역사철학이다. 


이제 '동기'부터 보겠다.


236 내 스승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내 조국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쓰는 것도, 전적으로 순수한 자연적 이성만을 사용하는 사람이 옛날 책들만을 신뢰하는 사람보다 더 올바르게 내 의견을 판단해 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은 프랑스어로 쓰여졌다는 것을 유념. 단테가 토스카나 지방의 지역어로 《신곡》을 쓴 것처럼 일단은 자기 지역어로 텍스트를 쓰는 것이 근대성의 중요한 표상이다. "순수한 자연적 이성"은 데카르트 가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종의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같은 것. 라틴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스콜라철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은 과거의 구태 관습에 찌들어 는 사람이고, 나는 털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순수한 사람이고, 그게 바로 자연적 이성이라고 얘기하는 것. 데카르트가 자기입장을 천명하는 것이나 증명된 바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을 bon sens, 양식이다 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237 다음과 같은 말만 해 두고 싶다. 즉, 오늘날 알려진 것보다 더 확실한 의학적 규칙들을 끌어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는 일에 내 남은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러면 철학공부 안하겠다는 얘기인데 여기서 데카르트는 철학을 회수한다. 즉, 없앤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철학이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 이것을 없애는 것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세우는 것.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목표는 무엇인가. 철학을 없애는 것. 자연과학적 탐구를 통해서 스콜라 철학을 없애는 것. 다르게 말하면 과학을 탐구해서 모든 것을 확실한 것의 기반 위에 올려놓으면 철학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남아있는 것은 신에 대한탐구인 형이상학만 남는다, 즉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이 두 가지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재편하려는 것이다. 그 다음


226페이지를 보면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나온다. 데카르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청으로 스웨덴에 가서 다음 해에 폐렴으로 죽는다. 그러면 앞부분으로 간다.


제1부 학문들에 대한 고찰

146 양식(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오른편을 보면 레이덴에서 출간된 《방법서설》 초판의 속표지라고 되어있다. 레이덴은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 관련 대학이고, 루뱅 대학은 가톨릭관련 대학. 이 책이 레이덴에서 출간되었다 하면 성격을 알 수 있다. 


146 좋은 정신을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잘 사용한다"는 말이 포인트. 잘 사용해봐야겠다고 말하는 것은 방법론을 택하는 것.


148 또 이로부터 하나의 방법을 만들어 내었으며,


여기서 데카르트가 방법이라는 말을 쓴다. 그럼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서술하면 될 텐데 《방법서설》이라는 책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는 150페이지부터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 때문. 


150 어릴 적부터 나는 여러 학문을 배웠다.


"여러 학문을 배웠다"라고 되어있다. 데카르트가 배운 학문이 있다. 이것을 데카르트가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방법서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의미에 해당한다. 자기의 방법을 그냥 서술한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의 사상의 전개과정을 잘 보여주기 때문. 자기가 어떻게 이런 방법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자기 스스로 서술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거. 이게 《방법서설》이 가지고 있는 의미. 여러 학문을 배웠는데 거기서부터 데카르트의 부심이 나오는 부분. 학벌 자랑. 


150 나는 당대 최고 학식 있는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유럽 최고의 명문 학교에 다녔다.


학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가도 놓치지 말고 봐야 한다. 격자형이다. 161페이지의 도시를 보면 방사형이다. 이런 것들이 근대적인 기하학적 정신에서 나온 것. 설명을 보면


160 여러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보다 완전성이 종종 떨어진다.


한 사람이 더 완전하다. 한 사람이란 하나의 이성을 말할 때 또는 완전한 이성을 갖춘 한 사람. 그러면 데카르트는 흔히 요즘 말하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서 역사적 과정에서 이렇게 생겨난 지식을 부정하는 것. 제일 원리로부터 한 사람이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연역적으로 추론해낸 지식이 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151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을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학교에서 가르치는 언어는 고전을 이해하는데 필요하고, 재미있는 우화는 정신을 일깨워 주며, 기억될만한 역사적인 사건은 정신을 고양시키고, 


언어, 우화 배우고 양서, 웅변에 대해 말한다. 웅변은 레토릭을 말한다. 다음에 보면 수학이 있고, 신학이 있고, 법학, 의학이 있고 이런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것을 존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154페이지를 보면


154 나는 특히 수학에 마음이 끌렸는데, 이는 그 근거의 확실성과 명증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수학과 같지만 조금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추론하는 힘, 연역하는 힘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로 데카르트의 철학의 성격이 나온다. 수학적 철학.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는 수학을 모범으로 삼아서 철학에 확실성을 시도했던 사람. 플라톤이 말하는 수학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플라톤의 수학은 우주론이며. 확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초월적인 것. 다음 주에는 수학적 확실성 위에서 어떤 것을 세우려 했는지 윌리엄 하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데카르트가 무너뜨린 고대 철학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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