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1 막말·유신 5


막말.유신 - 10점
이노우에 가쓰오 지음, 이원우 옮김/어문학사


Reading_20min_20140428_5

– ‘半西歐’의식을 가진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1875년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후 1876년에 조선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 조약) 체결. 조선을 ‘자주국’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청의 종주권을 부인함

– “서양이 후발국(반미개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과 맺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일. 에도 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을 일본의 후발국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서양과 입장을 같이 하여 동아시아의 小서양으로서 임한 것이다.”

– “무리한 서양화, 만국대치라는 대국주의, 이것이 막부토벌파인 소수파가 신정부의 요인이 될 때부터 정치의 기본으로 몸에 익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 “징병령 반대를 비롯해 이러한 과격화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메이지 정부에 의한 문명개화 중심선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장기간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혈사태가 빚어진 싸움이었다. 그것을 무지몽매한 농민을 문명화된 국민으로 교화했다는 듣기좋은 이야기로 바꾼 것도 문명개화가 이룩한 것 중 하나이다.”

– “막말에 일본 국민 대부분이 양이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천황·조정이 있었다고 하는 신국사상과 대국주의로 채색된 이야기야말로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오류 중 하나였다. 그런 이야기는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천황제 근대국가의 국가창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 , 《만들어진 전통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야스마루 요시오, 《근대 천황상의 형성


《막말•유신》을 읽고 있다. 지난 번에 일본이 개항을 하고 그에 따라서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작용한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근대국가의 목표가 바로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구사회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얘기했다. 근대국가라고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전통이라는 말이 굉장히 포괄적인 말인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생활세계 속에서 지내오던 관행과 습속들을 다 폐기하고 전혀 그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속으로 폭력적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이라고 해서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도 마찬가지. 


어쨌든 일본 사람들은 메이지유신을 하면서 자기네들이 이제 절반쯤은 서구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미국과 조약을 맺을 때는 절반쯤은 미개한 단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자기네들이 절반쯤은 서구에 들어갔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일본사람들 전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국가의 의식이 그런 것을 갖게 된 것. 그런 점에서 항상 근대국가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성립한다. 국가에 대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니까 나하고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을거라 생각하면 안된다. 어쨌든 서구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겉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그게 바로 가까운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게 바로 조선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침략의 제1단계가 조선을 침략하는 것. 내용상으로는 침략인데 그들은 조선을 개국, 문명개화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명분을 내건다. 그래서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 텍스트에 따르면 "서양이 후발국(반미개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과 맺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일. 에도 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을 일본의 후발국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에도 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다라는 말에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가서 문화를 전해주지 않았는가.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대등외교였다는 것. 


247 운양호의 무장 단정이 첫날 범한 돌연한 행동은 페리의 행동과 비교할 수가 없다. 무법적인 작전 행동 그 자체이다. 이어지는 포격전에서의 육전대 상륙, 성과 민가를 파괴하는 작전, 조선군 격멸도 물론 국제법 위반이다.


247 사건에는 외무부도 관여하고 있었고 목적도 명확했다. 서양이 후발국(반미개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과 맺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일. 에도 시대에는 이웃 나라 조선과 대등외교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조선을 일본의 후발국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876년, 여기서 기준점을 잡으면 되는데 정조가 사망한 것이 1800년이다, 조일수교조구를 맺게 된다. 이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했다는 것. 이것은 동시에 청이 가지고 있던 일종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것. 이것이 조일수교조구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자주국으로 인정한 것이 굉장한 대우를 한 것 같지만 동시에 조선이 아주 오랫동안 속해 있었던 청나라 중심의 이른바 중화체제 속에서 끄집어 내려고 한 것이 조일수교조구에 들어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서양과 입장을 같이 하여 동아시아의 소(小)서양으로서 임한 것이다. 한편 조선이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조선으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이 되었다." 조선이 일본에 대해서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조선 외교의 상당한 성과로 판단할 수 있는 것. 일본은 미합중국과 조약을 맺으면서 불평등조약인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인정했다. 달리 말하면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이때까지도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249 1876년 2월에 조일수교조구가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 병자조약이라고도 한다. 조선을 자주국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청의 종주권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용은 철저한 불평등조약이며, 부산 외 2개항의 개항, 일본인의 '왕래 통상'을 인정하고, '일본의 항해자'에게 해안을 수시로 자유 측량을 하는 것과 나아가 일본의 영사재판권을 인정했다.


249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서양과 입장을 같이 하여 동아시아의 소(小)서양으로서 임한 것이다. 한편 조선이 편무적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조선으로서는 최악의 사태를 막는 것이 되었다.


동시에 훗카이도를 내국식민지로 만들었다. 훗카이도에 살고 있던 아이누족을 약탈한 것. 지금 우리는 훗카이도를 일본 땅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200년도 되지 않은 일. 일본이 훗카이도 그전에 오키나와를 식민지로 삼았던 것. 그리고 나중에는 대만도 식민지로 삼는다. 조선, 대만, 훗카이도 즉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식민지로 삼는 것. 어쨌든 탈아시아의 길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단계가 동아시아 침략으로 귀결되었다는 것. 


261 1875년 7월,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기 2개월전, 정부는 류큐에 대하여 청국으로의 조공 폐지, 메이지 연호의 사용, 번정개혁, 진대 분영 설치 등을 명령하고 류큐를 청국에서 최종적으로 분리하여 일본으로 편입시키려는 류큐 처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264 이민족을 '미개'로서 억압하고 부정하는 정책, 정부와 대자본에 의한 외지 자원의 약탈적 수탈, 침략 즈음의 민중의 국가적 동원 등 훗카이도 '개척'은 동아시아 침략의 제1단계가 되었다.


맺음말에서는 1권에서 했던 얘기를 다시 정리를 하는데 우선 서양세력과의 외교교섭단계에서 에도막부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성숙함과 근면, 규율을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근면과 규율, 위생은 사실 서양과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에도 민중 사회에 성숙한 형태로 존재했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 초기의 문명개화라는 것은 굉장히 강력하게 주장하고 내세웠는데 이것이 과연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근거해서 미개했기 때문인가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메이지유신을 하면서 저자의 말에 따르면 무리하게 서양화를 진행하고 또 전세계의 나라가 대치하고 있다는 대국주의를 내걸게 된 것은 막부토벌파인 소수파인 새로운 정부의 주요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내걸고 있었던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는 것. 


268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근면과 규율, 위생은 사실 서양과 형태는 다를지 모르나 에도 민중 사회에 성숙한 형태로 존재했다. 그렇다면, 메이지 초기의 문명개화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학교와 징병령, 관청이나 징역장, 나아가 병원까지도 메이지 초기의 파괴 폭동에서 '방화'의 공격 대상인 의미가 여기에 있다.


268 무리한 서양화, 만국대치라는 대국주의, 이것이 막부토벌파인 소수파가 신정부의 요인이 될 때부터 정치의 기본으로 몸에 익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일본사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징병령 반대를 비롯하여 과격한 민중운동이 등장하게 된 것. 그리고 이것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메이지정부에 의한 문명개화 정책의 핵심적인 노선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에도막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났던 일이라 생각하기 쉽고, 일본사람들 전체가 그것을 모두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아갔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것. "수많은 유혈사태가 빚어진 싸움이었다. 그것을 무지몽매한 농민을 문명화된 국민으로 교화했다는 듣기좋은 이야기로 바꾼 것도 문명개화가 이룩한 것 중 하나이다." 이렇게 지적을 하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근대국가의 전환이 일어났는데 일본처럼 위로부터의 근대국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이런 일들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한국사회에서 근대국가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는 언급하지 않겠다.


269 징병령 반대를 비롯해 이러한 과격화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메이지 정부에 의한 문명개화 중심선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장기간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혈사태가 빚어진 싸움이었다. 그것을 무지몽매한 농민을 문명화된 국민으로 교화했다는 듣기 좋은 이야기로 바꾼 것도 문명개화가 이룩한 것 중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메이지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렇게 두 개의 문자들로 정리한다. "막말에 일본 국민 대부분이 양이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천황•조정이 있었다고 하는 신국사상과 대국주의로 채색된 이야기야말로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오류 중 하나였다. 그런 이야기는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천황제 근대국가의 국가창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천황제 근대국가라는 것을 다시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준다. 이런 것들을 보면 에릭 홉스봄과 같은 역사학자들이 만들어진 역사, 이른바 서구근대국가라고 하는 나라들도 그 기원에 엄청난 신화들이 사실은 만들어진 신화에 불가하다고 얘기를 한다. 또 참조해 볼만한 책으로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쓴 《상상의 공동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은 민족을 말한다, 민족이라는 의식이 거의 절대 다수의 나라에서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 근대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


269 고메이 천황은 중국에서는 현명한 인재를 선택하여 왕으로 삼지만 일본은 '진무 천황이래로 황통이 면면'하며, 그 때문에 중국보다 뛰어난 '신주(神州, 일본)'라고 말하고 조약은 '신주의 흠'으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양이를 주장한 것이었다. 진무 천황부터 황통이 면면하다는 신화에 근거한 대국주의 사상에 천황의 양이론이 탄생하는 하나의 길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야마우치 도요시게 등의 히토쓰파 다이묘들로부터 천황•조정의 양이론은 무모한 모험주의라고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270 막말에 일본 국민 대부분이 양이로 들끓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천황•조정이 있었다고 하는 신국사상과 대국주의로 채색된 이야기야말로 본문에서 말한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오류 중 하나였다. 그런 이야기는 근대 일본이 만들어낸 천황제 근대국가의 국가창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1권 《막말•유신》을 읽었다. 적어도 일본이 어떤 경과를 거쳐서 근대화를 했는가. 이것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서구적인 근대화로 나아간 과정이기 때문에 일종의 본이 되는 것.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탐구의 본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점의 이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일본이 근대화를 하고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화하는 과정 자체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이 굉장히 크고, 또 서로 그것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여전히 남겨진 유산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기서 중심적으로 생각해볼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일본이 서구와 외교를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대응해 나아갔는가. 둘째로 일본의 근대국가화 과정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전통사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근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는 대항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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