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하워드: 제1차세계대전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8. 5. 5.
제1차세계대전 -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교유서가 |
제1장 1914년 유럽
제2장 전쟁 발발
제3장 1914년: 개전 국면
제4장 1915년: 전쟁이 계속되다
제5장 1916년: 소모전
제6장 미국이 참전하다
제7장 1917년: 위기의 해
제8장 1918년: 결정의 해
제9장 강화 합의
부록/ 더 읽을거리/ 역자 후기/ 도판 목록/ 지도 목록
제1장 1914년 유럽
8 전쟁이 그토록 끔찍하게 전개되고 파국적인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전지구적 규모 탓이 아니라 발전된 군사기술과 전쟁을 수행한 국민들의 문화가 결합된 탓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속에서 전쟁이란 정부 정책과 군부의 행위들, 그리고 '민족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삼위 일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이 왜 일어났고 왜 그렇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 세 가지 요소를 하나씩 따져보아야 한다.
23 비스마르크의 후임자들은 여러 복잡한 이유 때문에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못했고 따라서 러시아가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렸다. 끔찍한 실수였다. 러시아에 이 신생 강국 독일은 동맹국이 아니라면 곧 위협, 그것도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으로만 상쇄 될 수 있는 위협이었다.
26 영국은 대일 동맹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식 동맹도 체결하지 않았지만 독일은 영국이 자국을 포위하고 속박하는 그물을 짜고 있다고 불평했고 양국의 관계는 꾸준히 나빠졌다. 1911년 독일이 아가디르 앞바다에서 해군력 시위를 통해 모로코의 프랑스 세력에 도전하고 프랑스에 굴욕을 안기려고 했을 때,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지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영국과 독일의 많은 이들이 상대방을 자연스러운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이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3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전쟁은 비스마르크가 음울하게 예견한대로 유럽의 다른 쪽 끝, 발칸 반도에서 일어났다.
27 관계를 진정시키는 비스마르크의 손길이 사라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영국과 독일의 관계만큼이나 악화되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발칸 국가는 세르비아였고 특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보호령에서 다수의 세르비아인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자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제2장 전쟁 발발
36 모두가 앞다투어 비행기와 자동차라는 신기술을 도입했으나 1914년에 비행기는 기병대 정찰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막 이용되기 시작했고 자동차는 주로 참모 장교들과 고위 지휘관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용되었다. 전쟁 내내 철도 종점 너머의 수송은 압도적으로 말이 담당했다. 일단 열차에서 내리면 군대는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 사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의 군대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선 통신 - 그리고 통신 도청 - 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고 있었고 특히 해전에서 중요했다. 지상전에서는 통신 장비가 너무 무거워서 사령부 이하 단위에서는 작전에서 사용하기가 힘들었고, 이런 기술적 어려움이 전방 전투에서 초래 한 결과는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44 세르비아는 예상대로 오스트리아의 최후 통첩을 거부했고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군사적 계산들이 유럽의 모든 수도에서 정책 결정을 좌우했다. 7월 30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극도로, 주저하다가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46 베를린에서 동원령은 8월 1일에 발효되었다. 벨기에 땅을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게 하라는 최후 통첩은 다음날 나왔고 그것이 거부되자 8월 3일 독일군은 벨기에 국경선을 넘었다.
46 영국 정부는 즉시 벨기에의 중립을 존중한다는 확약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여기에 아무런 회답도 없자 독일을 상대로 8월 4일 선전 포고를 했다. 약소국들의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관심과 유럽 열강 사이의 세력 균형 유지에 대한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의 관심이 한데 모이면서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다.
제3장 1914년: 개전 국면
64 1914년이 저물 무렵, 유럽 각국 군대들이 지난 40년 동안 열심히 대비해온 단기전은 끝났다. 그러나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다.
제4장 1915년: 전쟁이 계속되다
66 1914년에 벌어진 전쟁이 18세기식 '제한전'이었다면 각국 정부는 이 시점에서 휴전을 선언하고 협상을 거쳐 그럭저럭 강화를 이끌어 냈을지도 모른다.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분쟁의 원래 당사자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쟁의 원래 이유들은 다들 잊은 듯했고 저 두 나라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동맹국들이 운전대를 잡았고 그들은 이제 그만하자고 외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76 이 제국이 한 세기에 걸쳐 쇠락과 패배, 굴욕을 겪은 뒤 살아남은 것은 주로 유럽 열강이 동유럽에서 균형을 유지하는데 터키의 존재가 필수라고 봤기 때 문이었다.
제5장 1916년: 소모전
98 1915년이 저물 무렵, 다들 6개월 안으로 끝나리라 예상했던 전쟁은 1년 반 가까이 지속되는 중이었고 조속한 종결을 기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전쟁이 그토록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간단한 대답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교전국 국민들의 지속적인 지원이다. 그들은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감내했을 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따른 곤경과 통제를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각국 정부는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보유했다. 정부가 장악하지 않은 영역은 자발적 조직이 접수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예상되었던 재정 파탄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99 그러나 1915년 말이 되자 어느 쪽에서든 해상봉쇄의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가 상승과 지폐 유통의 증가로 초래된 인플레이션이 봉급 생활자 계층에 타격을 입혔다. 공업용 수입 원자재는 감소하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해상 봉쇄와 군대의 수요로 인한 압력은 갈수록 심해져 식량, 연료, 운송의 부족을 초래했다. 1916년 한 해 동안 민간인들은 심각하게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잘 대처한 쪽은 서유럽의 잘 조직되고 결집력이 강한 사회들, 즉 독일, 프랑스, 영국이었다. 사실, 전쟁은 이 나라들이 더 잘 조직되고 더 단단히 결집되도록 만들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 문제의 중심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투쟁은 유예되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행정적·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그들은 새로운 협상력을 얻었다.
99 대학 출신 전문가와 실무가들에 의해 강화된 관료 조직은 국민 생활에서 갈수록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해 나갔고, 많은 경우에 그때 얻은 권한을 전후에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전쟁 말기가 되자 유럽의 모든 교전국은 심지어 자유방임적인 영국마저도 통제 경제를 수립했으며, 그중 독일이 가장 심했다.
제6장 미국이 참전하다
118 전쟁의 원래 주역들인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제 기꺼이 강화를 맺을 태세였다. 두 나라의 후방이 받는 부담은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디서나 식량, 연료, 공산품 원자재가 부족했는데, 이는 연합국의 해상봉쇄 때문이라기보다는 군사 경제 부문에서의 그칠 줄 모르는 수요 탓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재는 암시장으로 쏠렸다. 수혜자들은 군수산업으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뻔뻔하게 부를 과시하면서 사회적 긴장은 높아만 갔다.
119 파업과 식량 폭동이 중유럽과 동유럽 전역에서 빈발했다. 국내의 곤경과 자국 군대들이 겪는 인명 손실로 지난 2년 동안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체제를 지탱해온 애국주의적 정서와 왕가에 대한 충성심은 바닥났고, 1916년 말이되자 이 두 제국이 경쟁이라도 하듯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86세의 노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죽음은 합스부르크 제국 자체의 종말의 전조로 여겨졌다.
124 1914년에 잠수함의 잠재력을 이해하는 해군은 거의 없었다. 초창기의 휘발유 추진형 잠수함은 항속 거리가 짧아서 연안 방어에만 적합했고, 전쟁 직전에 디젤 추진 엔진을 단 모델이 나왔을 때도 잠수함은 기본적으로 '잠수 가능한 탈 것', 즉 수면에서는 적의 공격에 극히 취약하고 매우 제한된 잠항 능력만 보유한 것에 불과했다. 잠수함의 잠재적 살상력은 앞서 본대로 전쟁이 발발한 지 단 몇 주 만에 독일 잠수함 1척이 영국 해협에서 방심하고 있던 영국 순양함 3척을 침몰 시켰을 때 입증되었다.
136 미국 내 반응, 특히 그때까지 고립주의적이었던 서부의 반응은 결정적이었다. 선박 몇 척이 더 격침되자 윌슨은 의회에 선전 포고를 요청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5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 포고를 요청했다. 윌슨이 몇 달 전에 제안한 것과 같은 '승리 없든 평화' 이야기는 이제 나오지 않았다.
제7장 1917년: 위기의 해
140 미국이 참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패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1917년이 흘러가면서 이는 갈수록 의심스러워 보였다.
151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혁명 지도자가 독일 최고 사령부의 기민한 도움을 받아 망명지 스위스에서 귀국하여 거의 모든 러시아인의 요구사항을 간단한 세 단어로 압축해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빵, 토지, 평화였다. 11월에 그는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번 시도는 3월의 쿠데타처럼 권력의 공백 상태를 낳는 것이 아니라 가차없는 독재를 수립했다. 새 독재 정부의 강령이나 이데올로기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즉각적 목표들은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레닌은 즉시 독일군 최고 사령부에 휴전을 요청했고, 12월에 양측은 강화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만났다.
제8장 1918년: 결정의 해
169 독일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언제나 천적으로 여겨 온 전제적 차르 제국은 무너졌고, 새로 들어선 사회민주주의 정권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동지인 듯했다. 미국의 참전은 패권적 야심과 함께 잔혹한 전쟁 수행방식을 추구하는 독일 국가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동맹을 완성시켰다. 독일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갈수록 그러한 독일 국가를 옹호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1917년 6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 참석한 독일 대표단은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고 인기가 없음을 실감했다.
171 강화의 본질은 유럽에서의 독일의 지위뿐만 아니라 독일이 장차 어떤 종류의 국가를 세울 것인지도 결정했을 것이다. 최고사령부와 그들의 민간인 지지자들이 보기에 병합이나 배상금이 없는 강화라는 제국의회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에서 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 이상 독일의 외부 적들에 맞선 전쟁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독일의 가치를 파괴하려고 작심한 듯한 국내 세력들에 맞선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의 시각에서 후방전선이 모조리 붕괴하기 전에 적대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부 전선에서의 승리, 압도적인 타격으로 연합국의 전의를 앗아버려 독일의 강화안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승리였다. 이것 이야말로 독일의 진정한 '마지막 패'일 터였다.
189 베를린의 정부는 더 임박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독일 안에서 터져 나오는 혁명에 대한 공포였다. 독일 수상 바덴 공 막스는 지난 반세기 동안 카이저와 군대가 저항해온 모든 체제 개혁을 3주 만에 속성으로 단행함으로써 혁명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10월 말이 되자 제국의회는 비밀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주권의 최고 기관이 되었고, 전쟁성 장관을 포함한 모든 장관들은 제국의회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 최고 전쟁 지도자인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의 사촌인 영국왕(조지 5세)과 마찬가지로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로 위상이 바뀌었다. 이제 대담해진 막스는 루덴도르프의 해임을 요구했고 카이저는 만족감을 감추지 못한 채 여기에 동의했다.
191 지상전에 관한 한, 연합국의 조건은 대체로 프랑스 측이 좌우했다. 적대 행위를 최대한 서둘러 종결하고 싶었던 영국은 조건들을 좀더 완화했을 것이다. 미군의 퍼싱 장군은 싸움을 몹시 원하는, 이제 막 피를 본 군대와 '무조건 항복'을 부르짖는 본국의 여론을 감안하면 결국 어떤 조건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 연합국이 내건 휴전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독일군은 14일 안으로 벨기에와 프랑스의 영토에서 모두 철수한다. 둘째, 연합군은 라인 강 좌안의 독일 영토 전부와 마인츠, 코블렌츠, 쾰른의 교두보를 포함해 라인 강 우안으로부터 10킬로미터까지 점령한다. 셋째 1914년 이후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의 영토는 모두 포기한다. 넷째, 함대 대부분과 잠수함 전부를 포함해 대량의 전쟁물자를 연합국에 넘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합국의 해상봉쇄는 최종적으로 강화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된다.
제9장 강화 합의
199 결국 배상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집어삼킨 경제적 재난들을 모조리 배상 요구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배상 요구보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애초에 연합국이 전쟁 피해 배상금을 부과한 근거, 바로 이른바 독일의 전쟁 책임 조항이었다. 여전히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전쟁이 적들에 의해 강요됐고, 지난 5년 동안 자신들의 희생은 대의 명분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200 이같은 돌히슈토스(등 뒤에서 찌르기)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후 집권하는 독일 정부의 정통성은 조약이 부과한 예속 상태를 변경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그렇게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은 그 일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203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존재로 야기된 '동방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독일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적어도 동쪽 국경선에 관한 결정은 반드시 뒤집으려 했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소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불신, 동유럽 동맹국들의 허약성,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유사한 시련을 겪지 않으려는 자국민들의 심한 거부감으로 인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개입하기를 꺼렸다. 국내 문제와 제국의 문제들 외에도 점점 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 때문에, 연이은 정부들은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기보다 들어주는 식의 해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유럽에 대한 개입은 고약한 실수이자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될 실수로 널리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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