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 - 10점
이순구 지음/너머북스


머리말 조선시대 가족, 그 안과 밖의 사연 


장가들기, 남자가 움직이는 혼인 

김종직은 왜 밀양에서 태어났을까?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인가? 

왜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더 많이 키우는가? 


처가 또는 외가의 위력 

인목대비는 왜 아들보다 친정 집안을 선택했을까? 

왕실의 외가, 단지 외척인가 정치적 파트너인가? 

‘칠거지악’으로 부인이 쫓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처, 적자들의 배타적 권리 

조선에서는 사위도 연좌제에 걸릴까? 

한때의 전통이 다른 시절엔 금기가 되다 


집안의 중심, 여자 

딸들은 상속받은 재산을 결혼 후에도 소유했을까?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다 

맏며느리의 저력 

투기도 부덕도 여자의 생존 전략 

중국의 전족, 조선에는 왜 없었을까? 

신여성 인수대비 

정부인 안동 장씨에 대한 오해 

큰물에서 놀았던 소현세자빈 강씨 

강정일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특별꼭지 조선의 혼인이 가족에 미친 영향 


가족들의 생활상 

세 번 결혼한 양반은 진정 행복했을까? 

종손이라는 것 

사랑은 조선시대에도 불가해였을까? 

사랑과 우정 사이 

안 예쁜 여자는 없다 

청과 조선의 경계, 그 땅의 풍속 

우리는 시험을 좋아한다 

고려와 조선이 타협한 장례 문화 

왕실 제사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다 


조선 가족의 마이너리티 

그 많은 홍길동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자 노수, 족보에서 ‘서’ 자를 빼다 

과부는 재가할 수 없다 

양반과 기생,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기생 석벽, 양반의 첩이 되다 

기생 ‘머리 올려주기’의 진실 

조선의 여성들, 불교의 명맥을 잇다 


우리가 도덕성에 열광하는 이유 

어우동의 죽음, 도덕 사회로 가는 발판이 되다 

어느 열녀의 퍼포먼스 

화순옹주는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 

언제까지 도덕성 경쟁을 해야 하는가? 

강정일당의 도덕성 열망 

18세기 말에 쏟아진 간통 사건 


참고문헌




43 조선에서는 '칠거지악'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실제로 이 때문에 부인이 쫒겨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칠거지악의 악조건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가령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양자 제도가 그 대안이 되었다. 이처럼 이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조선의 부부들은 상황에 적응하는 쪽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혼인이 개인 의지가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조선의 부부를 더 심한 갈등 관계에 놓이지 않게 했다. 부모는 충분히 숙고한 끝에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혼인을 맺어주었다. 조선 후기 혼인이 대개 같은 당색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부는 문화적 배경이 유사했고, 따라서 근대 이후처럼 개인적인 감정 대립으로 갈등하는 경우가 적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부부라고 해도 동거 비율이 매우 낮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부부 갈등의 첨예화를 막는데 일조했다.


50 소실에게서 낳은 아들은 늘 서아라고 불리며 온갖 집안일을 돌봤다. "서아가 나무 베는 일로 노비 셋을 데리고 천주, 대승에 갔다", "서아로 제사를 대신 지내게 했다"와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서자들은 비록 실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끝내 그 집안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양반 남자들은 서자가 아닌 적자를 낳아줄 수 있는 정식 부인을 존중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신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가족을 구성하려면 신분이 훌륭한 적처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51 조선의 유교 시스템 도입으로 적처의 위치를 보장하자, 여자들은 누구나 적처가 되고 싶어 했고 적처가 된 후에는 그 지위를 배타적으로 누리고 싶어 했다.


80 우리나라는 본래 중국과 달리 총부의 권한이 강했다. 조선의 총부는 남편 사후 제사를 계속 받을 수가 있었으며, 아들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아들이 없는 경우라도 양자를 들여 제사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즉, 가계 계승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맏며느리들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116 중국에서는 남자 가족이 며느리나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은 취(取)한다고 하고, 신부 쪽에서는 누군가에게 '딸을 주었다'거나 누군가에게 '신부'를 주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자가 혼인하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할 남자 집안으로 '돌아왔다'는 뜻에서 귀(歸)라고 표현한다.

[시경]의 이 구절들은 중국 고대의 혼인 형태와 그로 인해 여자들이 갖게 되는 감정 상태를 잘 보여준다. 


118 조선 초기의 혼인은 이러한 형태였다. 고구려의 서옥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혼인 후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움직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선에서도 이른바 남귀여가혼이라고 하여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례식을 하고, 여자 집에서 그대로 살림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남자가 본가와 처가를 오가는 생활을 했다. 중국에서는 여자에게 해당되던 '귀'라는 용어가 조선에서는 남자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혼인은 '아내를 취하는' 것이기보다는 '장가드는' 행위였다.


120 조선은 왜 이런 혼인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했을까? 조선에서는 혼인에서 어느 한쪽 집안이 주도권을 갖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두 집안이 적절하게 공조하면서 대사회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던 것 같다. 두 집안의 공조가 잘 유지되려면 여자가 시집을 가버리는 것보다는 남자가 처가와 본가를 오가는 것이 더 유용했고, 그 때문에 남귀여가혼이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조선 후기가 되면 이러한 시스템에 변화가 온다. 한쪽 집안, 즉 부계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된다.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더 선진적이며 또 권력을 집중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가 이후에는 혼인하면 대개 남자 집 쪽에서 살게 되었다. 즉, 여자들이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사나 상속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남자 위주에 적장자 중심이 되었다.


132 [예기]에서는 종손과 지손을 하늘과 땅 차이로 구분했다. 지손은 종손보다 귀하고 부유해졌더라도 절대 부유한 티를 낼 수 없었다. 가령 지손은 좋은 수레가 있어도 종손 집에 들어가려면, 수레를 멀리 두고 단촐하게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종손의 권위를 한 껏 높여준 것이다. 침해될 가능성이 높을수록 더 높여줘야 했다. 


162 조선은 먹는 것에서도 슬픔을 표시했다. 조선의 왕들은 부왕의 죽음에 소선, 즉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편한 마음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은 이 대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고기를 삼가고 겨우 죽만 먹는 정도였다. 또한 여묘살이를 하고 부부간에 합방도 금했다. 역시 슬프기 때문이다.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선에서 장례란 명백히 흉례였다. 고려의 상례와 상충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고, 사실상 그리 오래지 않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유교의 내면화가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63 그럼, 조선에서 이전 장례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을까? 공식 의례에서는 사라졌지만 사실은 이면으로 스며들었다. 빈소 밖의 명량한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고려와 조선의 타협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상가의 이중성은 여기에 연원이 있어 보인다.


174 그러나 승엽은 율도국으로 가지 않았다. '서얼허통'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수행, 병간호, 집 짓는 일, 농사 관리등 집안 일을 했고, 그럴수록 노상추의 승엽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커져갔다. '서얼허통'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모든 서얼이 다 운동권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살아내는 서얼이 더 많았다. 천남이, 권상일의 서아, 승엽이 그들이었다.

조선 후기에 가문은 하나의 기업과 같았다. 가문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조선이 망할 때쯤에는 국가는 없고 가문만 있을 정도였다. 가문의 이익이 우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이 초기에 사회운영의 책임을 일정부분 가족에게 맡긴 것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었다. 

어쨌든 기업과도 같은 가문은 종손이라는 CEO외에 실무진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홍길동'들이 했던 것이다. 이들은 꾸준히 집안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키워갔다. 특히 경제력을 확보했다. 이는 '서얼허통' 운동과는 또 다르게 서얼의 신분과 지위를 높여주었다. 드러난 운동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서얼의 삶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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